바람이 외투를 거칠게 할퀴고 지나갔다. 거대 비공정 노아의 갑판 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한시우는 난간을 쥔 채 구름 아래를 굽어보았다. 발밑으로 펼쳐진 아르카디아의 대지는 조각난 채 멀어지고 있었다. 뒤편에서는 수백 명의 방랑자가 숨을 죽인 채 그를 응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경외와 공포가 기묘한 비율로 뒤섞여 있었다. 낡은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갑판의 틈새로 새어 나오는 엔진의 진동이 장화 밑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녹슨 철의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함교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발소리가 고요를 깼다. 방랑자 부족의 원로인 가르간이 시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르간은 시우의 가슴에 새겨진 공허의 문양을 힐끗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짐승의 갈기 같은 수염 사이로 거친 숨결이 새어 나왔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뗐다. 지팡이 머리에 박힌 낡은 마력석이 흐릿한 빛을 내뿜었다.
이제 당신이 이 배의 주인이라는 뜻입니까.
시우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려 가르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노인의 동공이 수축하며 뒤걸음질을 쳤다. 시우는 타인의 호의나 기대를 마주할 때마다 목 뒷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습관적으로 검지 손톱으로 반대쪽 손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살갗이 짓눌리며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통증이 선명해질수록 흐릿했던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손등의 붉은 줄기가 하얗게 변할 때까지 힘을 주었다.
지휘권은 이미 내게 넘어왔을 텐데.
목소리는 건조했고 낮게 깔렸다. 갑판 한편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덩치가 산만한 사내 하나가 도끼를 바닥에 찍으며 걸어 나왔다. 그의 어깨에는 제국군에게서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붉은 망토가 걸려 있었다. 사내의 눈에는 노골적인 적의가 서려 있었다. 그는 시우의 발치에 침을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도끼날이 갑판의 목재를 파고들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공허의 마력인지 뭔지 하는 불길한 힘을 믿고 따를 순 없다. 제물로 바쳐졌던 놈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줄 알고.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방랑자 연합 내부에서도 시우의 존재는 양날의 검이었다. 평의회를 무너뜨릴 유일한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세계를 집어삼킬 재앙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시우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묵묵히 들으며 맥박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심장 안쪽에서 느껴지는 공허의 박동이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공명하며 욱신거렸다. 가슴 안쪽이 얼음 송곳에 찔린 듯 서늘한 통증이 번졌다.
나를 두려워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그것이 너희가 살 유일한 길이다.
시우가 한 걸음 내딛자 갑판의 목재가 검게 부식되며 바스러졌다. 발밑에서 시작된 검은 그림자가 파도처럼 퍼져 나가 사내의 발등을 덮었다. 도끼를 들었던 사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컥컥거렸다. 시우는 감정을 배제한 채 사내의 눈동자 너머를 응시했다. 슬픔이나 분노 따위는 생존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사내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부딪혔다.
증명은 말로 하는 게 아니지.
시우의 시선이 지평선 끝에 걸린 거대한 강철 탑으로 향했다. 제국 제3 마력 정제소였다. 저곳은 저지대 거주민들의 생명력을 추출해 고지대 귀족들의 마력석으로 변환하는 공장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굴뚝에서는 보랏빛 연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구름을 오염시키며 기괴한 무늬를 그리며 흩어졌다. 시우는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시우의 몸이 허공에서 멈췄다. 등 뒤로 검은 연기가 날개처럼 펼쳐지며 중력을 거부했다. 그는 화살처럼 정제소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구름을 뚫고 하강하는 시우의 시야에 정제소를 수호하는 마법 기사단이 포착되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치켜들자 수십 개의 화염구가 하늘을 덮었다. 열기가 얼굴을 쓸고 지나가며 머리카락이 그을리는 냄새가 났다.
시우는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응집되더니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화염구들이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력의 흐름이 뒤틀리며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시우는 기사단의 한복판에 착지했다. 발바닥을 타고 지면의 진동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충격파가 지면을 휩쓸며 대리석 바닥을 조각냈다. 기사들의 갑옷이 종이처럼 구겨졌고 비명이 사방에서 터졌다. 시우는 멈추지 않고 정제소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와 마력이 정제되는 기계음이 고막을 때렸다. 기름진 냄새와 타버린 마나의 잔향이 코를 찔렀다.
통로를 가로막는 철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허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두꺼운 강철문이 단번에 베여 나갔다. 문 너머에는 거대한 유리 수조 수천 개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조 안에는 마력 결핍으로 피부가 갈라진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뽑혀 나온 미세한 빛줄기들이 중앙의 거대한 증폭기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가슴은 힘겹게 오르내리며 희미한 생명의 신호를 보냈다.
시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전에 보았던 침식의 늪의 풍경이 뇌리를 스쳤다. 제물로 선택된 자들의 운명은 이곳에서 연료로 소모되는 것이었다. 시우는 증폭기 하단의 제어 장치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기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기분 나쁜 박동을 내뱉고 있었다.
이것이 너희가 말하는 신성한 희생인가.
그가 손에 힘을 주자 공허의 마력이 증폭기 내부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설계된 마나 회로가 검게 타들어가며 불꽃을 튀겼다. 기계가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고 수조를 감싸던 빛이 꺼졌다. 정적도 잠시, 증폭기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기 시작했다. 내부의 부품들이 비산하며 벽면의 수조들을 타격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정제소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시우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수조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력이 끊기자 수조가 깨지며 사람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끈적한 배양액이 바닥을 적시며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형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육체는 비어 있었고 영혼의 찌꺼기만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폭발의 여파로 증폭기 내부에 갇혀 있던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제물로 바쳐진 빙의자들의 원혼과 기억이 뒤섞인 영혼의 집합체였다. 소용돌이는 굶주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정제소 내부를 휘저었다.
갑자기 소용돌이가 방향을 틀어 시우를 향해 쇄도했다.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영혼들이 그의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수천 명의 기억이 한꺼번에 뇌세포를 난도질했다. 이름 모를 이들의 비명과 단말마가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눈앞의 풍경이 수만 갈래로 찢어지며 과거의 환상들이 교차했다.
시우는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일으켰다. 가슴 중앙의 문양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검은 빛을 내뿜었다. 영혼들이 흡수될 때마다 그의 혈관이 검게 도드라지며 박동했다. 뜨거운 열기가 식도를 타고 올라와 시야를 가렸다. 입 안에서 쇠 비린내가 강하게 느껴졌다.
안 돼. 아직은.
그는 이를 악물며 의식을 붙들려 노력했다. 하지만 밀려드는 영혼의 무게는 개인의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시우의 피부 위로 검은 반점이 번져 나갔다. 눈동자의 흰자위가 점차 사라지더니 심연 같은 어둠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정신의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며 낯선 감정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정제소 외부에서 지켜보던 방랑자들이 경악 어린 함성을 질렀다. 비공정 노아의 갑판 위에서 가르간은 지팡이를 놓친 채 주저앉았다. 정제소 건물 전체가 검은 안개에 휩싸여 소멸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파괴라기보다 존재의 지워짐에 가까웠다. 거대한 건축물이 소리도 없이 공허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의 주변에는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끝을 알 수 없는 공허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더 이상 굳은살도,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매끄럽고 차가운, 마치 조각상 같은 질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던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비명은 어느덧 조용한 속삭임으로 변해 있었다. 시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아의 형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세계수 에르드가 서 있는 방향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파동을 감지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자 명확한 적의였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거울이 있다면 자신의 눈을 마주하기 두려웠을 것이다. 시우는 발걸음을 뗐다. 그가 밟는 땅마다 생명이 사그라지고 검은 재만이 남았다. 그는 폐허가 된 정제소의 잔해를 밟으며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밖에는 살아남은 제국군 병사들이 공포에 질린 채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시우가 다가오자 그들은 검을 떨어뜨리고 뒤걸음질을 쳤다. 시우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감정의 편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검게 물든 눈동자가 병사들을 훑었다. 기사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대열이 무너졌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으나 시우가 손을 뻗기도 전에 바닥에 처박혔다. 주변의 모든 마력이 시우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공기 중에 섞인 수분조차 그의 폐 속에서 얼어붙는 듯했다.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한시우는 멈춰 서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한 진동만이 전신을 울렸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흡수된 영혼들의 합창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다음은 성소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몸에서 검은 촉수들이 뿜어져 나와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삼켰다. 갑자기 정제소의 잔해 속에서 붉은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부서진 마력 증폭기의 핵심 코어였다. 코어가 시우의 가슴 문양과 공명하며 거대한 마력 폭풍을 일으켰다. 시우는 튕겨져 나가는 병사들 사이로 손을 뻗어 코어를 움켜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의 살을 태웠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시우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는 코어를 자신의 가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강렬한 빛이 그의 흉곽을 뚫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시우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라 믿기 힘든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주변의 중력이 뒤틀리며 거대한 바위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노아의 갑판 위에서 방랑자들이 밧줄을 붙잡으며 버텼다. 가르간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시우의 등 뒤로 거대한 공허의 그림자가 형상화되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원혼이 만들어낸 거대한 날개였다.
공중에서 멈춘 시우가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 동작 하나에 정제소 주변의 모든 수호탑이 단번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완전한 소멸이었다. 시우는 공중에 뜬 채 멀리 보이는 엘리시온 왕국의 수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복수심보다 더 깊은, 근원적인 갈증이었다.
한시우의 몸이 빛의 속도로 가속하며 대기를 찢었다. 소닉 붐이 정제소 터를 휩쓸며 지면을 평평하게 다져버렸다. 노아의 갑판 위로 쏟아지는 충격파에 방랑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시우는 이미 보이지 않는 점이 되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남겨진 폐허 위로 보랏빛 연기 대신 검은 재가 눈처럼 내렸다. 가르간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하지만 그가 믿던 신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하늘을 가로지르며 남겨진 검은 궤적만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시우가 지나간 자리는 공간 자체가 왜곡되어 일그러진 잔상이 남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고지대를 향해 고도를 높였다. 마력 밀도가 높아질수록 공허의 박동은 더욱 거세졌다. 세계수 에르드의 가지가 구름 위로 그 위용을 드러냈다. 시우는 거대한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검은 번개가 튀어나와 하늘을 두 갈래로 갈랐다.
성소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황금빛 갑옷을 입은 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카시안이 서 있었다. 카시안은 검을 뽑아 시우를 겨누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마력에 실려 하늘 전체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우리의 위대한 제물이여.
시우는 대답 대신 자신의 심장에 박힌 코어를 더욱 깊숙이 눌러 넣었다. 검은 피가 갑옷 사이로 흘러내려 허공에서 증발했다. 그는 카시안을 향해 내리꽂히듯 낙하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마력이 충돌하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우는 공허의 칼날을 형상화하며 카시안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