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안이 터뜨린 백광이 도서관의 천장을 집어삼켰다. 파괴적인 성광이 사방으로 튀며 심판관들의 은색 갑주를 타격했다. 시우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공허의 파동이 그 빛과 엉켰다. 서로 밀어내야 할 두 힘이 기묘한 나선형을 그리며 보호막을 형성했다. 심판관들이 내지른 창끝이 투명한 막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시우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옆에 있던 레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발밑의 바닥은 이미 형체를 잃고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무너지는 잔해 사이로 비명이 섞여 들었다. 공기가 먼지와 마력 잔해로 걸쭉해져 폐부를 찔렀다. 시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낙하지점을 가늠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습한 물비린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시야가 좁아지고 감각이 예민해졌다.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풍덩.
얼음장 같은 물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충격으로 허파의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시우는 입술을 세게 물어 정신을 붙잡았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자 썩은 이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으나 공허의 마력이 지형을 그려냈다. 이곳은 도서관 하부와 연결된 고대 수로였다. 벽면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미끄러운 소리를 냈다.
"이봐, 정신 차려."
바르가스의 목소리가 수로의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그는 이미 수로 저편의 턱을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낡은 마력 증폭기가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깜빡였다. 시우는 레나를 끌어안은 채 물가로 기어올랐다. 그녀의 몸이 평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아니, 부피 자체가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그녀의 피부가 마치 안개를 만지는 것처럼 희미했다.
시우의 검지 손톱이 손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레나의 손등에서 시작된 투명화가 팔목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그녀의 혈관을 흐르던 검은 마력이 공기 중으로 증발했다. 희박한 잔상만이 그녀의 위치를 증명했다. 레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지만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아르카디아의 대기 속으로 녹아드는 중이었다.
"레나, 내 말 들려?"
시우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손가락이 어깨를 그대로 통과했다. 섬뜩한 감각이 뇌수까지 전해졌다. 레나의 몸이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변해갔다. 그녀의 맥박은 이미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느렸다. 바르가스가 기어오듯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시스템이 그녀를 회수하고 있어."
바르가스의 목소리가 젖은 바닥에 깔렸다. 제물로서의 기능이 다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증폭기의 다이얼을 거칠게 돌리며 주변 마력 밀도를 측정했다. 숫자가 기록되지 않을 만큼 수치가 요동치고 있었다. 시우는 레나의 희미해진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공허의 마력을 끌어모아 그녀의 신체를 고정하려 했으나 힘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살릴 방법은."
시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바르가스는 침을 삼키며 수로 위쪽을 가리켰다. 세계수의 뿌리가 뻗어 내려온 방향이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탐욕이 섞여 있었다.
"세계수의 심장에 자네의 공허의 핵을 심어야 해."
바르가스의 제안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세계수의 심장을 건드리는 것은 아르카디아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이 세계의 멸망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시우는 주저하지 않고 레나를 다시 업었다.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박동이 더욱 거세졌다.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공명하며 느껴지는 통증이 온몸을 훑었다.
"그녀를 잃으면 이 세계도 필요 없어."
시우는 수로의 벽을 타기 시작했다. 벽면에 돋아난 세계수의 잔뿌리들이 공허 마력에 반응하며 뒤틀렸다. 뿌리들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대며 길을 방해했다. 시우는 손바닥에서 공허의 칼날을 뽑아 방해물을 베어냈다. 검은 불꽃이 튈 때마다 수로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진동에 휩싸였다.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고지대 특유의 고밀도 마력이 피부를 압박했다. 레나의 몸은 이제 거의 소멸 직전에 이르렀다. 그녀의 숨소리는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변했다. 바르가스는 뒤에서 연신 마력 증폭기를 조절하며 뒤를 쫓았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거의 다 왔어. 이 위가 성소 외곽이야."
바르가스가 외치는 순간 머리 위의 석판이 폭발음과 함께 부서졌다. 눈부신 햇살이 수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지상으로 몸을 날렸다. 도서관 지하의 습한 기운이 가시고 건조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하늘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수백 척의 거대한 비행 함선들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함선들의 돛에는 거친 톱니바퀴와 덩굴이 엉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방랑자 연합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함선들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나팔 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수천 명의 목소리가 합쳐진 듯한 기묘한 선율이 공명하고 있었다.
"노래가 공명하고 있어."
시우가 중얼거렸다. 방랑자 부족의 침묵의 노래였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시우의 심장 속에 박힌 핵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노래의 선율을 따라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지상에 대기하던 제국 기사단과 성소 가디언들이 당황하며 대열을 흩트렸다. 하늘을 뒤덮은 함선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바르가스는 무너진 성벽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눈동자에 함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함선의 갑판 위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방랑자 부족의 장로였다.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노래의 파장이 더욱 거세졌다. 시우는 레나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방랑자들의 노래가 스며들자 레나의 형체가 아주 미세하게 응집되었다. 시우는 고개를 들어 성소의 가장 높은 탑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세계수의 심장이 있었다. 은색 망토를 휘날리는 수천 명의 심판관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하늘의 함대를 향해 마력의 방패를 전개했다.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는 기세였다.
그때 가장 큰 함선의 선두가 성소 중앙 탑을 향해 급강하했다. 함선의 선체에는 거대한 강철 닻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성소의 결계를 깨부수기 위한 파성추였다. 시우는 레나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손가락 끝이 허공을 휘젓는 감각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함선들 사이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성소의 결계가 유리 조각처럼 공중에서 비산했다. 산산조각 난 마력 파편들이 눈처럼 쏟아졌다. 시우는 성소 내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방랑자들의 함선이 지면에 닿으며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성소의 정문이 열리며 황금빛 갑주를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그의 투구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차가운 기계적 안광을 내뿜었다.
"이방인을 처단하라."
기사의 외침과 함께 은색 검기가 시우의 뺨을 스쳤다. 시우는 고개를 비틀어 공격을 피하며 발끝에 공허의 마력을 집중했다. 바닥의 대리석이 그의 발짓 한 번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기사는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시우의 진로를 막아섰다. 방패 표면에 새겨진 신성 문자가 푸른 빛을 발하며 공허의 파동을 억눌렀다.
시우는 호흡을 멈추고 신체 내부의 마나 회로를 역방향으로 비틀었다.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통증이 밀려왔다. 입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그는 검지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찢어 피를 흘려보냈다. 붉은 피가 공중에 닿는 순간 검은 불꽃으로 변해 타올랐다. 기사의 방패 위로 검은 불꽃이 덩굴처럼 옮겨붙었다.
치익.
금속이 부식되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기사는 당황한 듯 방패를 내던지고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우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손끝에서 형성된 공허의 칼날이 기사의 투구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기사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칼날을 막아내려 했으나 공허의 힘은 물리적 방어를 무시했다.
칼날이 기사의 어깨를 깊게 파고들었다. 비명 대신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가 성소 복도에 울려 퍼졌다. 시우는 기사의 가슴을 발로 차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면에 박힌 기사가 힘겹게 팔을 뻗었지만 시우는 이미 그를 지나쳐 중앙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레나의 존재감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주변의 중력이 무거워졌다. 성소의 방어 시스템이 침입자의 무게를 수십 배로 늘리고 있었다. 시우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닿았다. 대리석 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그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펴려 애썼다. 척추가 끊어질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여기서 멈출 순 없어."
시우는 자신의 영혼 예속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성소가 발산하는 압력을 공허의 핵으로 빨아들였다. 외부의 압력이 내부의 공허와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력을 만들어냈다. 그의 몸을 짓누르던 중력이 일순간 사라졌다. 시우는 탄력을 받아 단숨에 계단 꼭대기까지 도약했다. 탑의 정상에는 거대한 수정 구체가 공중에 떠 있었다.
세계수의 심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고동치며 눈부신 에메랄드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침입자를 거부하는 날카로운 살기를 품고 있었다. 심장 주변에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가 회전하며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시우가 다가가려 하자 고리에서 번개가 튀어 나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시우 씨, 제발 그만둬요."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시우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카시안이 서 있었다. 그의 은색 갑주는 곳곳이 부서져 있었고 망토는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정의감을 담고 있었다. 카시안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시우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을 파괴하면 아르카디아의 수백만 명의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당신이 지키려는 한 명을 위해 세계를 멸망시킬 셈입니까?"
카시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시우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 업힌 레나의 투명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제 형체조차 남지 않아 옷소매만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시우는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카시안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당신들이 말하는 세계는 이미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가짜야."
시우의 목소리가 탑 상층부의 공기를 갈랐다. 그의 가슴 속 공허의 핵이 세계수의 심장과 공명하며 검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빛과 검은 빛이 충돌하며 성소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카시안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서둘러 검을 고쳐 쥐고 시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과 공허의 칼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불꽃이 튀며 성소의 벽면이 조각났다. 카시안의 검술은 정교하고 우아했지만 시우의 공격은 변칙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시우는 카시안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거리를 좁혔다. 어깨에 검이 박히는 감각이 선명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로지 세계수의 심장만을 응시했다.
"미쳤군. 정말로 모두를 죽일 생각인가?"
카시안이 외치며 검에 성스러운 마력을 불어넣었다. 검신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며 시우의 시야를 가렸다. 시우는 눈을 감는 대신 공허의 감각에 의존했다. 빛의 틈새로 보이는 세계수의 심장, 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핵의 위치를 포착했다. 그는 자신의 공허의 핵을 손바닥으로 끌어올렸다.
검은 구체가 시우의 손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빛과 마력을 빨아들이며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 카시안의 검이 시우의 가슴을 관통하려는 순간 시우는 몸을 틀어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구체가 에메랄드빛 수정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한 순간이었다. 세계수의 심장 내부로 침투한 공허의 핵이 맥동을 멈췄다. 수정 구체 표면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검은 연기가 스며 나오며 찬란했던 에메랄드빛을 잠식해 들어갔다. 카시안의 검이 시우의 옆구리를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아, 결국..."
카시안의 허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계수의 심장이 검게 물들며 성소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하늘을 덮었던 함선들이 요동쳤고 지상의 기사들은 무릎을 꿇었다. 아르카디아의 모든 마력 흐름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고지대의 풍부한 마력이 저지대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레나의 몸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투명했던 그녀의 피부에 생기가 돌고 희미했던 맥박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시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시우는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움켜쥐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검게 변한 세계수의 심장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수천 개의 검은 촉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시우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성소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닥치는 대로 휘감기 시작했다. 카시안조차 그 촉수에 발목을 잡혀 허공으로 끌어 올려졌다.
"이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야."
바르가스가 성소 입구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나 검은 촉수는 그의 마력 증폭기를 단숨에 낚아채 파괴했다. 시우는 레나를 감싸 안으며 공허의 칼날을 휘둘렀다. 촉수들은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밀려왔다. 그것들은 마력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성소의 바닥이 거대한 구멍과 함께 붕괴했다. 시우와 레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시우는 레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어둠 너머에서 누군가의 거대한 눈동자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수의 의지도, 평의회의 힘도 아닌 근원적인 공포였다.
시우는 공허의 마력을 끌어모아 마지막 방어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손이 그들의 방어막을 종이처럼 찢어발겼다. 레나의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시우는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지만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거대한 존재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제물이 도착했군."
그 목소리가 뇌를 직접 타격하는 순간 시우는 정신을 잃고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