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검이 바닥을 굴렀다. 맑은 금속음이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도서관 최하층의 정적을 깨뜨렸다. 시우는 제 발치에 멈춰 선 검날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시온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자루가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카시안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그의 목을 옥죄는 검은 사슬은 맥박에 맞춰 조금씩 조여들고 있었다. 평의회가 심어둔 예속의 낙인이 주인의 의지를 짓씹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우는 검을 줍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카시안의 눈을 마주했다. 항상 정의와 질서를 말하던 푸른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채 흐릿했다. 그 안에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스스로를 파괴해 달라는 비참한 애원. 시우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을 맴돌자 비로소 차가운 감각이 되살아났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쉰 목소리를 냈다. 그곳엔 예전에 시우가 남겼던 검은 흉터가 여전히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공허의 잔재가 성스러운 기사의 심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중이었다. 카시안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딛고 선 돌바닥 아래에서 묵직한 진동이 올라왔다.
시우의 심장이 그 진동에 공명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인 박동은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일치했다. 1화에서 느꼈던 그 기분 나쁜 통증이 다시금 전신을 훑었다. 이곳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었다. 세계의 뿌리와 가장 가까운 곳이며, 가장 추악한 진실이 매몰된 무덤이었다. 시우는 카시안을 지나쳐 거대한 석판 위로 손을 뻗었다.
석판 위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낡은 서적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책장 가장자리마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카시안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참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시우의 손끝이 금서의 표지에 닿았다. 차가운 냉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서서히 책장이 넘겨졌다. 누군가 강제로 열어젖힌 듯한 기세로 종이가 파르르 떨렸다. 책장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광이 공중에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의 역사를 기록한 홀로그램이었다. 찬란한 빛의 무리가 도서관의 어둠을 밀어내며 거대한 영상으로 변했다.
화면 속의 아르카디아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대지는 갈라진 채 연기를 내뿜었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행성이었다. 마력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죽음의 땅. 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상 속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지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과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지에 처박혔다. 그들의 가슴에는 일련번호가 새겨졌다. 시우의 팔뚝에 새겨진 실험체 사백이호라는 글자와 같은 형식이었다. 카시안은 그 광경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이 바닥을 긁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빛의 파편들이 다음 장면을 투사했다. 소환된 이방인들은 거대한 압착기 아래에 놓였다. 기계가 돌아갈 때마다 투명한 액체가 추출되어 유리관에 담겼다. 그것은 영혼이었다. 정제된 영혼의 정수는 세계수의 뿌리에 주입되었고, 곧이어 메말랐던 대지에서 푸른 싹이 돋아났다. 아르카디아의 모든 마력은 이방인들의 생명을 갈아 넣은 결과물이었다.
우리가 구원이라 믿었던 빛은, 누군가의 영혼이 타오르는 불꽃이었군.
카시안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뼈를 깎는 듯한 절망이 서려 있었다. 평생을 바쳐 수호해온 왕국과 질서가 거대한 도살장 위에 세워진 신기루였다는 사실이 그의 정신을 무너뜨렸다. 그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 깃든 찬란한 금빛 마력이 이제는 역겨운 시체 썩는 냄새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시우는 영상의 마지막 페이지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실험실 철문에서 보았던 그 명단이었다. 명단의 가장 끝자락에서 시우는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름 옆에는 붉은색 낙인이 찍혀 있었다. 공허 마력 적합 판정.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최종 목적지는 세계수의 심장이었다.
공허는 마력의 변칙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추출 과정에서 살아남은 영혼들이 내뱉는 단말마이자, 시스템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반응이었다. 시우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세계수의 진동이 이제는 비명처럼 들렸다. 지하 호수에서 만났던 원혼들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귀를 막고 싶어졌다.
카시안은 성검을 다시 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 끝을 자신의 목줄기로 가져갔다. 예속의 사슬이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그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카시안의 얼굴 근육이 비틀렸다. 그는 고통을 억누르며 시우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기사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한 인간으로서 건네는 작별이었다.
그때 도서관 천장 너머에서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마력의 파동이 공기를 매섭게 때렸다. 석조 구조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돌덩이가 금서가 놓여 있던 석판을 박살 냈다. 자욱한 먼지 구름 너머로 은색 갑옷을 입은 무리가 보였다.
황제 직속 심판관들이었다. 그들은 등 뒤에 거대한 빛의 날개를 펼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각자의 손에는 영혼의 파장을 감지하는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심판관들의 중심에 선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도서관 전체를 진동시키며 시우의 심장을 압박했다.
이방인을 말살하고 배신자에게 신벌을 내려라.
심판관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들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 마력은 카시안이 쓰던 것보다 훨씬 고결하고도 잔혹했다. 카시안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제 목에 겨눴던 검을 고쳐 쥐고 시우의 앞을 막아섰다. 예속의 낙인이 그의 피부를 태우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지만, 카시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우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공허의 박동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빛의 무리를 응시했다. 이 세계가 자신을 연료로 쓰려 한다면, 자신은 그 세계의 엔진을 태워버리는 재앙이 될 생각이었다.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쏟아지는 잔해 사이로 심판관들이 번개처럼 낙하했다. 카시안의 성검과 심판관의 칼날이 부딪치며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시우는 그 혼란의 중심에서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검은 구멍이 공중에 나타나며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심판관이 시우의 목을 겨냥해 창을 내질렀다. 시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창날이 닿기 직전, 그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듯 솟구쳐 올라 심판관의 가슴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심판관이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시안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너, 그 힘은 대체.
카시안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심판관이 그의 등 뒤를 노렸다. 시우는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공허의 기운이 그의 발밑에서 폭발하며 도서관 바닥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 그는 카시안의 등을 노리던 칼날을 손으로 직접 잡아 챘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적들을 찢어발겨야 한다는 갈망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심판관들의 공격이 거세졌다. 그들은 진형을 갖추고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했다. 도서관 최하층 전체가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정화의 불꽃이었다. 예속된 자와 이방인을 동시에 소멸시키려는 황제의 의지였다. 카시안은 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쏟아지는 빛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시우의 심장 박동이 멈췄다. 아니,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칠흑 같은 빛을 내뿜으며 전신을 뒤덮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짧게 움직였다. 그것은 마법의 주문도, 신에 대한 기도도 아니었다. 죽어간 이방인들이 남긴 단 하나의 의지였다.
먹어 치워라.
시우의 손끝에서 시작된 어둠이 순식간에 도서관 전체를 잠식했다. 심판관들의 정화 불꽃은 공허의 파도에 힘없이 잡아먹혔다. 빛의 날개를 펼치고 있던 자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추락했다. 카시안은 그 압도적인 힘 앞에 넋을 잃고 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청년의 모습은 없었다.
먼지 구름이 걷히며 도서관의 잔해 너머로 새로운 인영이 나타났다. 황제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는 추락한 심판관들을 무심하게 짓밟으며 시우에게 다가왔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시우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그는 지구에서 자신을 지하철 선로로 밀어 넣었던 그 사내였다.
사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사백이호. 아니, 시우라고 불러줘야 하나?"
사내의 손바닥 위에서 시우의 심장과 똑같은 박동을 내뱉는 검은 구슬이 회전하고 있었다. 시우는 검게 물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떨어진 공허의 방울이 바닥에 닿자마자 돌을 녹이며 구멍을 냈다. 그는 대답 대신 사내의 심장을 향해 공허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카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성검을 쥐었다. 그는 시우와 사내 사이를 가로막으며 검 끝을 사내에게 겨눴다. 그의 목을 조르던 예속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살을 파고들었다. 카시안은 피를 토하면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우, 도망쳐라. 저자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카시안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무형의 압력이 카시안을 짓눌러 벽에 처박았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카시안의 어깨뼈가 으스러졌다. 시우는 바닥을 차고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공허의 칼날이 사내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하지만 사내는 단 두 손가락만으로 시우의 칼날을 잡아 멈춰 세웠다.
사내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뜩였다. 그것은 황제의 권능이자, 아르카디아 그 자체의 의지였다. 그는 시우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왜 이곳으로 불려왔는지, 정말로 모르는 건가?"
사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시우의 공허 칼날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우는 이빨을 드러내며 사내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자신의 심장에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폭발시키려는 찰나, 도서관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다시 한번 발생했다.
그것은 지진이 아니었다. 세계수 에르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도서관 바닥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틈새로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뿌리들은 심판관들의 시신을 감싸 안으며 순식간에 마력을 흡수해버렸다. 그리고 그 뿌리들의 끝은 모두 시우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카시안은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갈라지는 바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수천 개의 유리관이 빛을 내며 매달려 있었다. 각 유리관 안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방인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진짜 심장, 제물 저장소였다.
사내는 시우의 목을 움켜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너는 파괴자가 아니야. 너는 이 시스템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이지."
시우의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목을 조르는 사내의 손아귀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세계수의 부름이 더 고통스러웠다. 그는 멀어지는 정신 속에서도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카시안은 부러진 팔로 성검을 다시 고쳐 쥐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죽음을 구걸하던 절망이 없었다.
카시안이 성검을 거꾸로 쥐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내리꽂았다. 황금빛 마력이 그의 심장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예속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한 자폭이자, 시스템에 균열을 내기 위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시우, 살아라!"
카시안의 외침과 함께 눈을 멀게 하는 백광이 도서관 최하층을 집어삼켰다. 시우는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갈라진 바닥 틈새로 추락했다.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그의 귓가에 수만 명의 통곡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바닥에 닿기 직전, 시우는 보았다. 수조 속에 갇힌 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잠들어 있는 수많은 '한시우'들을.
사내는 무너지는 도서관 잔해 위에서 추락하는 시우를 내려다보며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 화차에서 보자고, 사백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