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액체가 폐부를 찔렀다. 비릿한 금속취가 섞인 배양액이 코와 입으로 역류했다. 시우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틀었다. 사방이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수조 너머의 풍경은 기괴할 정도로 정갈했다. 하얀 석조 바닥 위로 복잡한 마법진이 명멸했다. 그 중심에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 서 있었다. 그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자애로운 미소였다. 하지만 금색 눈동자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기계적인 서늘함이 그 눈빛 속에 박혀 있었다.
시우는 유리벽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타인의 호의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호의를 베푼 이는 없었다. 카시안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구두 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시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맥박을 늦췄다. 공허의 박동이 심장 아래에서 나직하게 공명했다. 그것은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닮아 있었다. 가슴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카시안이 유리벽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손가락으로 수조의 표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맑은 소리가 실험실 내부로 퍼졌다. 시우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검지 손톱으로 손등을 강하게 눌렀다. 살점이 패여 나가는 통증만이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카시안의 입술이 우아하게 호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실험은 성공적이다.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마치 오늘의 날씨를 칭찬하는 귀족과도 같았다. 시우는 입안에 고인 배양액을 삼켰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옆쪽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레나가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 위로 검은 혈관이 나무뿌리처럼 돋아 있었다. 가느다란 숨결이 수조 안에서 작은 기포를 만들어냈다. 시우는 레나의 얼굴을 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분노는 뜨거운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뼈마디를 얼려버리는 차가운 냉기였다.
시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공허의 마력이 혈관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액체 속으로 검은 잉크가 번지듯 마력이 퍼져 나갔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벽에 금이 갔다. 카시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놀라움보다는 흥미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시우는 남은 힘을 쥐어짜 벽을 밀어냈다. 수천 개의 유리 조각이 보석처럼 흩어지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배양액이 쏟아지는 소리가 고요를 찢었다.
바닥에 처박힌 시우는 거칠게 기침했다. 폐에 남은 액체를 토해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카시안은 젖은 옷자락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여전히 결점 없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우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벽을 짚어야 했다. 레나가 갇힌 수조로 손을 뻗으려 했으나 손가락 끝이 허공을 긁을 뿐이었다.
레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시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카시안의 가슴팍에 남은 상처에서 검은 연기가 가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성소에서 입었던 부상은 그에게도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우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그녀에게 무엇을 한 거지.
카시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 속 검은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그것은 영혼 예속의 흔적이었다. 평의회가 그에게 심어놓은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카시안은 손을 들어 허공에 홀로그램 차트를 띄웠다. 시우의 영혼 파장이 정교하게 분석된 그래프들이 나열되었다. 그 끝에는 실험체 사백이호라는 차가운 명칭이 적혀 있었다. 시우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의 감각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처음부터 이곳의 주민이 아니었다. 지구라는 세계에서 끌려온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르카디아의 평화는 그런 이들의 생명력을 짜내어 유지되는 가짜 천국이었다. 시우는 카시안을 지나쳐 실험실 뒷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레나를 살릴 방법부터 찾아야 했다. 바르가스가 마지막에 남긴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제국 도서관 최하층에 진실의 파편이 있다는 그 말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카시안은 시우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터주듯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시우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는 그의 축복이 소름 끼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시우는 실험실을 벗어나 어두운 복도를 달렸다. 심장이 뛸 때마다 공허의 마력이 전신을 훑었다. 그것은 통증이자 이정표였다. 공허 마력은 평의회의 기운이 가장 짙은 곳을 본능적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마력 경보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시우는 멈추지 않았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에테르 라인을 공허의 힘으로 짓눌렀다. 전등이 하나둘 꺼지며 복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뒤에서 추적자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영혼의 나침반을 들고 시우의 파장을 쫓고 있었다. 시우는 그림자 통로의 입구를 찾아 몸을 던졌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시야가 반전되었다.
도착한 곳은 수도 에테르노의 외곽이었다. 지상에는 화려한 마법등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고지대의 귀족들은 풍부한 마력에 취해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발밑의 하수구 너머 저지대는 달랐다. 마력 결핍으로 피부가 갈라진 하층민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시우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제국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시의 화려함이 역겨워 눈을 질끈 감았다.
제국 도서관은 수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상에는 화려한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우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환기구로 몸을 숨겼다. 공허의 힘으로 신체의 파동을 지우자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최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벽면에 설치된 마력등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시간이 멈춘 공간이었다.
계단 끝에 도달했을 때 시우는 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서고가 눈앞에 펼쳐졌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책장들은 별자리처럼 엉켜 있었다. 먼지조차 대기 중에 멈춰 있었다. 시우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정지된 공기가 파동을 그리며 밀려났다. 그는 서가 사이를 헤매다 낡은 가죽 장본 하나를 발견했다. 표지에는 금박으로 이방인 강림사라고 적혀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다급했다. 그곳에는 수천 년간 이 세계로 소환된 빙의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우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김민수. 박서윤. 이준호. 십 년 전 한국에서 실종되었던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그들의 이름 옆에는 숫자들이 기입되어 있었다. 추출된 마나의 양과 소모된 기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폐기라는 단어가 찍혀 있었다.
시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단순히 개인의 복수를 위한 여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거대한 도살장이었다. 아르카디아라는 시스템은 다른 세계의 영혼들을 비료 삼아 피어난 독초였다. 시우는 책장을 거칠게 찢어냈다.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정막한 도서관에 날카롭게 울렸다. 기록된 역사는 모두 거짓이었다. 피로 쓴 각주만이 진실이었다.
공허의 박동이 거세졌다. 심장 안쪽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시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수만 명의 원혼이 내뱉는 비명이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구원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존재를 기억해주길 원했다. 시우는 검지 손톱으로 손등을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바닥의 석판 위로 떨어졌다. 피가 닿은 자리에 고대 문자가 빛을 발하며 떠올랐다.
그것은 제물의 피로만 열 수 있는 봉인이었다. 바닥이 진동하며 거대한 석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세계수 에르드의 뿌리가 거대한 신경망처럼 얽혀 있었다. 뿌리 마디마디에는 투명한 고치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안에는 아직 폐기되지 않은 빙의자들이 희미한 맥박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우는 비틀거리며 뿌리 가까이 다가갔다. 뿌리 중앙에는 거대한 마력 증폭기가 박혀 있었다. 바르가스가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정교한 고대 유물이었다.
뿌리에서 뻗어 나온 덩굴들이 시우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것은 마력을 갈구하는 굶주린 짐승 같았다. 시우는 공허의 칼날을 휘둘러 덩굴을 끊어냈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푸른 수액이 뿜어져 나왔다. 수액이 바닥에 닿자 석재가 녹아내리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우는 증폭기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공허의 마력이 증폭기와 공명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도서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간의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증폭기 내부의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리며 굉음을 냈다. 시우는 증폭기를 파괴하려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서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 순간 뒤편에서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차갑고도 정제된 에테르의 파동이었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었다.
그는 어느새 어둠 속에서 나타나 시우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의 갑옷 위로 도서관의 희미한 빛이 반사되었다. 카시안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평소의 미소도, 기사다운 엄숙함도 없었다. 그는 그저 무기력한 인형처럼 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목 주위로 검은 마력의 사슬이 감겨 있었다. 평의회가 심어놓은 영혼 예속의 낙인이었다. 카시안은 검을 뽑는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성검을 풀었다.
엘리시온 왕가의 상징이자 평의회의 축복이 깃든 보검이었다. 카시안은 무릎을 굽히지 않은 채 성검을 시우의 발치로 던졌다. 챙그랑 하는 금속음이 도서관 바닥에 길게 여운을 남겼다. 시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시안의 눈동자 속 검은 그림자가 잠시 걷히며 처절한 갈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입술이 경련하듯 미세하게 떨렸다.
"나를 끝내다오."
카시안이 짧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