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우의 검지 손톱이 제 손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살갗이 찢기며 붉은 선이 그어졌다. 통증은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닻이었다. 눈앞의 사내는 밭은 숨을 내쉬며 비틀거렸다. 바르가스의 목울대를 누른 시우의 손가락 끝에 기묘한 진동이 전해졌다. 거친 가죽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그것은 생명체의 맥박이 아니었다.
금속이 맞물려 돌아가는 불쾌한 기계음이 적막한 협곡에 울려 퍼졌다. 바르가스의 안색은 이미 자줏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매달고 시우를 응시했다. 시우는 시선을 피하며 바르가스의 낡은 로브 단추를 낚아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가려져 있던 흉부가 드러났다. 인간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기괴한 금속 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투명한 강화 유리 너머로 마력석의 푸른 빛이 맥동했다. 혈관 대신 구리선이 온몸으로 뻗어 나가 피부 위로 검은 줄기를 형성했다. 시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해. 네가 숨긴 진실이 무엇인지."
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을 거세한 칼날처럼 차가운 문장이 바르가스의 귓가를 찔렀다. 바르가스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제 가슴을 가리켰다. 톱니바퀴가 회전하며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내뱉었다. 그는 바닥에 고인 핏물을 무심하게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악마가 아니다. 이 세계를 지탱해온 유일한 죄인일 뿐."
바르가스의 목소리는 기계적인 마찰음과 섞여 기묘하게 변주되었다. 그는 자신을 세계수 에르드의 관리자라 칭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구원의 의식. 그 이면에 숨겨진 제물의 실체를 그는 알고 있었다. 지옥 같은 아르카디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손을 더럽혀야 했다는 변명이 이어졌다.
시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배신감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시스템의 거대한 불공정함에 대한 혐오였다. 누군가의 영혼을 연료로 삼아 유지되는 평화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우가 다시 검을 치켜들려던 순간이었다.
협곡 입구에서부터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이 밀려왔다. 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안개를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말발굽 소리가 바위벽을 타고 증폭되어 고막을 때렸다. 선두에 선 여자는 타오르는 듯한 백금발을 휘날리며 말에서 내렸다. 제국 최고의 이단 심문관, 이자벨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거대한 성검이 태양 빛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이자벨의 눈동자에는 자비라고는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녀가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바닥의 암석들이 순식간에 용암처럼 녹아내렸다. 성스러운 불꽃이 원형을 그리며 시우와 바르가스를 포위했다.
공기 중의 산소가 순식간에 타버렸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시우는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맥박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공허의 마력이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되어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자벨이 뿜어내는 신성한 압력은 시우의 마나 회로를 강하게 압박했다.
고지대 귀족들의 전유물인 고밀도 마력이 사방에서 화살처럼 쏟아졌다. 시우는 몸을 낮추며 공허의 장벽을 펼쳤다. 콰광, 하는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뒤로 밀려나는 시우의 발치에 바르가스가 쓰러져 있었다.
바르가스의 가슴속 기계 장치가 과부하로 인해 붉은빛을 내뿜었다. 그는 이미 전투 불능 상태였으나 여전히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우는 차가운 눈으로 바르가스의 옷덜미를 움켜쥐었다. 살기 위한 방패로 쓰기에 이 늙은 관리자는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이걸로 속죄해라."
시우가 바르가스를 방패 삼아 이자벨의 화염 속으로 몸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뒤편에 웅크리고 있던 레나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겁이 많아 작은 소리에도 움츠러들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레나의 눈동자는 이미 맑은 청색이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순백의 광채가 그녀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레나가 양손을 뻗자 허공에서 거대한 빛의 장막이 솟구쳤다. 이자벨의 성스러운 불꽃이 장막에 닿는 순간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것은 시우가 가진 공허의 힘과는 정반대의 성질이었다. 제국의 황실만이 계승한다는 절대적인 신성 마력이었다.
시우의 시야가 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레나의 등 뒤로 보이지 않는 날개가 펼쳐지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이자벨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그녀는 검을 멈추고 레나를 향해 소리쳤다.
"어째서 네가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레나는 대답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발이 닿는 곳마다 시들었던 풀들이 자라나고 대지가 진동했다. 시우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레나의 마력 파장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공허와 신성,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힘이 협곡의 대기를 찢어발기며 충돌했다.
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수천 명의 여인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웅장한 울림이 되어 협곡 전체를 뒤덮었다.
"이 불꽃을 거두세요."
명령에 가까운 한마디에 이자벨의 성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사들은 공포에 질린 채 무릎을 꿇었다. 시우는 손가락 끝을 만지며 레나의 등을 응시했다. 그녀가 가진 힘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파멸의 시작일지도 몰랐다.
협곡 너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계수 에르드의 거대한 줄기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며 대륙 전체를 뒤덮는 진동이 발생했다. 시우는 손등의 상처를 꽉 움켜쥐었다. 짓이겨진 살점 사이로 공허의 마력이 검붉게 타올랐다.
이자벨은 비틀거리며 다시 검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레나의 발치에서 시작된 백색 파동이 그녀의 갑주를 순식간에 부식시켰다. 철편이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도 공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우 님, 이제 알 것 같아요."
레나의 목소리는 맑았으나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협곡의 어둠을 완전히 지워버릴 기세였다. 시우는 뒷걸음질 치며 공허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는 더 이상 그가 알던 레나가 아니었다.
바르가스가 바닥을 기며 레나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바르가스의 기계 심장이 그대로 멈춰 섰다. 금속음이 사라진 자리에 기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자벨은 신음하며 뒤로 물러났고, 기사들은 공포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시우는 검을 고쳐 쥐며 레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맥박이 공허의 파동에 맞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레나의 주변으로 마력의 소용돌이가 형성되며 지면이 함몰되었다. 저지대의 늪에서 올라온 안개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녀는 우아하게 손을 뻗어 시우의 뺨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가 바쳐야 할 제물은 따로 있었어요."
레나의 손가락이 시우의 살갗에 닿기 직전이었다. 시우는 망설임 없이 공허의 칼날을 그녀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다. 검은 마력이 순백의 광채를 파고들며 불꽃을 일으켰다. 레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녀는 피를 흘리는 대신, 눈부신 마나의 파편을 쏟아내며 시우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협곡의 벽면이 무너지며 거대한 바위들이 쏟아져 내렸다. 시우는 숨이 막히는 감각 속에서도 검자루를 놓지 않았다. 레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 마력이 시우의 팔을 태워버릴 듯 뜨겁게 달구었다. 이자벨의 성검이 다시 빛을 발하며 두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시우는 남은 한 손으로 공허의 폭풍을 일으켰다. 검은 소용돌이가 레나와 이자벨, 그리고 몰려오는 기사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비명과 굉음이 뒤섞여 지옥도를 그려냈다. 시우는 피가 흐르는 눈으로 무너져 내리는 협곡의 천장을 응시했다.
바닥이 꺼지며 시우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레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닌, 세계수 에르드가 내뱉는 거대한 신음이었다. 시우는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공허의 박동을 느끼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추락의 끝에서 시우는 단단한 바닥 대신 차가운 액체의 감촉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거대한 수조 안에 갇혀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수십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 우아하게 차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실험은 성공적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