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안개가 일렁였다. 발밑으론 기호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성휘도, 마독도 없는 무채색의 격자였다. 시야를 가득 메운 무채색의 그물망은 마치 거대한 화면의 노이즈 속에 던져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고요를 짓밟으며 뇌장을 헤집었고, 비릿한 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정전기가 이는 듯 피부 위로 곤두서는 진동이 전해졌다. 눈앞에 반투명한 사각형 창이 떠올랐다. [치명적 오류 발생: 관리자 권한을 승인하시겠습니까?]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글자는 기괴하게 뒤틀리며 명멸했다. 이것은 성국의 신탁도, 마계의 저주도 아니었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차갑고 딱딱한 기계의 언어였다. 현실이라 믿었던 세계의 피부가 벗겨지고, 그 아래 숨겨진 조악한 회로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세라핀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에 퍼지며 혼미하던 정신이 맑아졌다. "이솔 씨, 들립니까?" 허공에서 목소리가 쏟아졌다. 특정할 수 없는 위치에서 울리는 음성은 평평하고 건조했다. 감정이 거세된 소리였으나 권위만큼은 절대적이었다.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이 날카로운 통증뿐이었다. "누구지. 오리온인가?" 대답 대신 거대한 진동이 공간을 흔들었다. 발밑의 격자가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파편 하나하나에 그녀의 과거가 담겨 있었다. 강의실 창가에 앉아 졸던 오후의 나른한 햇살, 편의점 봉투를 흔들며 걷던 밤거리의 가로등 불빛, 그리고 마지막 순간 보았던 노트북 화면의 번쩍임까지. 흩어지는 파편들은 마치 깨진 거울 조각처럼 세라핀의 망막을 할퀴고 지나갔다. "나는 이 세계의 설계자입니다. 당신은 그저 잘못 기입된 문장 부호일 뿐이고." 목소리는 비웃음조차 담지 않은 채 선고했다. 세라핀은 가슴을 쥐어짜는 압박감에 무릎을 굽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금속 가루가 섞인 듯한 깔깔한 공기가 들어찼다. 심장 근처에 심어진 카엘의 핵이 뜨겁게 박동했다. 마왕의 힘이 시스템의 간섭을 밀어내려 발악하며 그녀의 혈관을 타고 뜨거운 용암처럼 흘러다녔다. "오타라고? 내 삶이, 이 사람들의 고통이 고작 오타 한 줄이라는 거야?"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 나누었던 대화, 누군가를 위해 흘렸던 눈물조차 데이터라는 단어 아래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버그는 삭제되어야 마땅하죠. 이 세계는 이미 한계입니다. 곧 서버가 폐기될 예정이니까요." 허공의 창이 붉게 변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6화에서 오리온이 건네주었던 낡은 가방이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이질적인 가죽의 질감, 현대적인 지퍼의 매끄러운 감촉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이 세계와 바깥을 잇는 단말기였다. 손끝에 남아있던 그 서늘한 금속의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당신만 승인하면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주겠습니다. 취업 준비로 힘들었던, 하지만 안전했던 그곳으로." 세라핀의 눈꺼풀 안쪽이 뜨거워졌다. 집.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전기장판과 식어버린 배달 음식이 널브러진 자취방. 그곳엔 교황의 음모도, 날카로운 성검의 위협도 없었다. 낡은 벽지 냄새와 익숙한 이불의 감촉이 환상처럼 그녀를 유혹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무너져가는 아르카디아의 잔해가 보였다. 지상에서 정화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신음하는 루인스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사슬에 묶인 채 자신을 바라보던 카엘의 애처로운 안광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은 이곳이 가짜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절절하고 뜨거웠다. "내가 가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지?" "삭제됩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데이터로 돌아가는 거죠." 설계자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세라핀은 손등에 새겨진 흉터를 손톱으로 깊게 눌렀다. 통증은 명확했다. 이것은 가공된 데이터가 줄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살점이 짓눌리는 고통과 손톱 밑으로 전해지는 딱딱한 흉터의 감촉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거절한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공포가 밀려올수록 그녀의 척추는 곧게 펴졌다. 다리에 힘을 주자 부서진 격자 파편들이 발밑에서 바스라지며 불쾌한 소음을 냈다.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오타라면, 이 소설의 결말을 완전히 오타로 채워주겠어." 세라핀은 허공의 시스템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흑백의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의 공기를 거칠게 빨아들였다. 공허의 힘이 디지털 공간의 법칙을 무시하고 텍스트 창을 움켜쥐었다. 지익, 유리가 긁히는 듯한 소음이 고막을 찔렀다. 마력이 시스템의 막과 충돌하며 내뿜는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데이터의 나부랭이가 창조주를 거역하려 드는군." 주변의 풍경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공간이 뒤틀리며 원근감이 상실되었고, 오리온의 얼굴을 한 인형들이 수천 개로 복제되어 그녀를 에워쌌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든 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수천 개의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서늘한 금속음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세라핀은 날개를 펼쳤다. 순백과 칠흑이 섞인 깃털이 폭풍처럼 휘날리며 인형들의 목을 벴다. 하지만 쓰러진 인형들은 곧바로 코드로 분해되어 다시 일어섰다. 마치 끊임없이 재생되는 악몽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이었다. 세라핀의 신성력이 급격히 바닥을 드러내며 사지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카엘의 핵이 비명을 지르듯 고동치며 그녀의 가슴을 안쪽에서부터 때려댔다. 시야가 붉은 경고등으로 점멸하며 흐릿해졌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눈가에 스며들어 따가운 통증을 자아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머리통을 으깨는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검은 마력의 실타래가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그것은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뻗어 나와 세라핀을 에워싸고 있던 시스템의 격자들을 하나하나 옭아매기 시작했다. 마력이 닿는 곳마다 푸른 코드가 검게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지르듯 불꽃을 튀겼다. 무거운 장벽 너머에서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세라핀! 정신 차려!" 카엘의 목소리였다. 시스템의 인과율을 억지로 비틀고 들어오는 마왕의 절규가 공간을 갈랐다. 그는 장벽 밖에서 자신의 영혼을 태워 길을 만들고 있었다. 흑색 마력이 격자무늬 공간을 부식시키며 균열을 냈다. 그 틈새로 매캐한 황금빛 마력의 잔향이 흘러들어왔다. "카엘……." 세라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설계자의 음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섞여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가치 있는 표본이 자폭을 선택하다니. 어리석군요. 이솔, 마지막 기회입니다. 승인하고 돌아오십시오." 세라핀은 무너지는 세계의 파편 사이로 카엘을 보았다. 그의 전신이 검은 연기로 화하며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이 공간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존재 자체를 연료로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소멸해갈 때마다 공간은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현대의 기억, 부모님의 얼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은 소중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위해 소멸해가는 마왕의 슬픔보다 무겁지는 않았다. 그가 흘린 땀방울, 그가 쥐어준 손의 온기가 지금 그녀에겐 가장 확실한 현실이었다. 세라핀은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금빛과 보랏빛으로 동시에 번뜩였다. 결연한 의지가 그녀의 전신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었다. "승인한다. 하지만 네 방식은 아니야." 그녀는 승인 버튼 위로 자신의 심장을 가져다 댔다. 카엘의 핵이 든 그곳을.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을 통해 버튼으로 전달되었다. [데이터 동기화 시작: 사용자 '이솔'의 기억 장치를 매개체로 설정합니다.] 순간, 세라핀의 머릿속에 있던 현대적 지식과 기억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수학 공식, 헌법 조항,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와 수천 권의 책들이 이그드라실의 타버린 뿌리로 흘러 들어갔다. 성국의 법도도, 마계의 규율도 아닌 현실의 법칙이 세계의 근간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지면이 거칠게 뒤틀렸다. 아르카디아의 대리석 바닥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졌다. 성소의 촛불이 형광등의 차가운 빛으로 점멸하며 지직거리는 소음을 냈다.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외부 데이터가 주입되자 설계자의 목소리가 비명으로 변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시스템이 과부하로 무너진다!" "무너져도 상관없어. 다시 쓰면 되니까." 세라핀은 손을 뻗어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기계적 명령어가 사라지고 새로운 문장이 새겨졌다. 그것은 신의 뜻도, 작가의 설정도 아닌 세라핀 이솔 자신의 의지였다.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튀며 허공에 선명한 궤적을 남겼다. 눈앞의 오리온이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에서 기계적인 안광이 사라지고 공허한 빛만이 남았다. 그가 쥐고 있던 유리 병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다. 챙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 안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대리석을 시커멓게 부식시키며 독한 연기를 내뿜었다. 1화에서 보았던 그 성수였다. 지독하게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것이 너희의 진실이었나." 세라핀이 낮게 읊조렸다. 배신감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멀리서 카엘의 형체가 완전히 스러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라핀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도망치라고, 제발 살아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시선이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공간 전체가 붉게 점멸하며 경보음을 울려댔다. 세라핀은 카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날개가 꺾이고 발바닥이 코드 조각에 베여 뜨거운 피가 흘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부서지는 바닥 너머로 끝없는 어둠이 보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가지 마, 카엘!"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으려던 찰나, 등 뒤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번졌다. 멈춰 있던 오리온이 기괴한 각도로 고개를 돌렸다. 뼈가 어긋나는 듯한 뚜둑 소리가 정막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의 입에서 사람의 것이 아닌, 수천 명의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겹쳐진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업데이트를 시작합니다." 오리온의 가슴팍이 기계 장치처럼 벌어지며 그 안에서 거대한 강철 가시가 솟구쳐 나왔다. 기름때 묻은 금속의 비릿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세라핀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심장을 향해 쇄도하던 강철 가시가 세라핀의 옷깃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들려온 차가운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시스템 강제 일시정지: 절대 관리자 '데우스'의 개입]. 붉게 점멸하던 경보음이 사라지고, 오리온의 가슴에서 솟구쳤던 무기들이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먼지처럼 흩어졌다. 세라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무너져 내리던 아르카디아의 잔해 위로, 오리온조차 감히 쳐다보지 못했던 성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리온의 기계적인 신체가 그 존재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남자는 세라핀의 심장에 박힌 카엘의 핵을 보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천천히 후드를 벗자 드러난 안광은 금빛도, 보랏빛도 아닌 현대의 평범한 갈색이었다. 세라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떨렸고,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 얼굴은 분명, 1화에서 그녀를 이 세계로 밀어 넣었던 남자의 것이었다. "결말을 바꾸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남자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세라핀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손가락이 닿은 피부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세라핀의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공허의 불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이제 네가 쓴 오타를 내가 지워주마." 남자의 손이 세라핀의 흉부를 관통했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카엘의 핵이 그의 손아귀에서 바스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라핀의 시야가 암전되기 직전,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카엘이 자신을 향해 절망적인 손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안 돼!" 세라핀은 마지막 힘을 다해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