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핀은 하얗게 질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새겨진 낙인이 보랏빛으로 명멸했다.
혈관을 따라 뜨거운 박동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카엘의 심장이 이식된 가슴 안쪽이 터질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공중에 흩날리는 검은 날개 깃털 하나가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부에 닿은 깃털이 날카로운 자상처럼 쓰라린 통증을 남겼다.
발밑의 대리석이 거칠게 진동하며 비명을 질렀다.
부유도 아르카디아를 지탱하던 거대한 마법 진이 깨져 나갔다.
추락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성소의 기둥들이 쩍쩍 갈라지며 하얀 먼지를 폭포처럼 쏟아냈다.
세라핀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며 감각을 잃어갔다.
"멈춰."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성소의 진동을 잠재울 만큼 묵직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광휘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은 성휘와 마독이 융합된 금기의 빛이었다.
빛줄기는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 추락하던 부유도의 밑바닥을 움켜쥐었다.
끼이익, 하는 고막을 찢는 듯한 소음이 대기를 가득 메웠다.
허공에서 요동치던 섬이 일순간 정지했다.
지상의 구름들이 거센 충격파에 밀려나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다.
세라핀의 코끝에 비릿한 피 냄새가 감돌았다.
한계를 넘어선 신성력이 혈관을 갉아먹는 감각이 선명했다.
목 안쪽에서 울컥하며 뜨거운 액체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비릿한 액체를 강제로 삼켜냈다.
눈꺼풀 안쪽을 혀로 누르며 밀려오는 현기증을 견뎠다.
"겨우 이 정도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건가."
무너진 제단 너머에서 교황 카스틸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품 안에서 검은 복음서가 끈적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교황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붉게 점멸했다.
세라핀이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그 빛은 더욱 선명하게 깜빡였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동자처럼 불길했다.
카스틸로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자 성소 중앙이 갈라졌다.
그 틈새에서 거대한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그것은 생명체의 심장 소리라기엔 너무나 기계적이었다.
신의 심장이라 불리는 성국의 최종 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수정체 안에 갇힌 거대한 혈관 뭉치가 맥동했다.
성소 주변의 꽃들이 순식간에 검게 말라 비틀어졌다.
세라핀의 피부에서도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장갑 안 손등의 흉터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한 그녀만의 오랜 습관이었다.
옆을 지키던 카엘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차갑게 식어가던 체온이 돌아왔다.
"저것이 작동하면 모든 생명은 성국의 연료가 된다."
카엘의 목소리가 벼랑 끝의 바람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세라핀은 수정체 속에 흐르는 기묘한 빛을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의 흐름이 아니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시스템의 언어가 환각처럼 시야를 덮었다.
현대인 이솔로서 보았던 수많은 데이터 코드가 명멸했다.
성소 벽면에 걸린 거대한 거울 속으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거울 속에는 은발의 성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안경을 쓴, 피로에 찌든 이솔이 서 있었다.
거울 속의 그녀는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삭제해.
세라핀은 떨리는 손을 뻗어 신의 심장을 향했다.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일그러지며 나타났다.
경고 문구가 붉은색으로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허공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누군가 설계한 정교한 감옥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 시스템의 핵으로 파고들었다.
카스틸로의 얼굴이 경악으로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관리자 권한으로 명령한다."
세라핀의 목소리가 시스템 언어와 공명하며 증폭되었다.
손등의 낙인이 보랏빛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제3의 힘이 그녀의 의지를 타고 심장부로 쏟아졌다.
대륙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던 관들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성소의 공기가 뒤틀리고 중력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교황이 비명을 지르며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카스틸로의 반지 속 보석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터졌다.
파편이 세라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오류를 수정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수정체 표면에 균열이 가며 데이터들이 비명처럼 쏟아졌다.
"이 세계의 멸망 시나리오를 삭제해."
손끝에서 시작된 푸른 불꽃이 신의 심장을 휘감았다.
그것은 성휘도 마독도 아닌, 완전한 소멸의 빛이었다.
폭발적인 빛의 파동이 성소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무너져 내리던 천장이 허공에서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세라핀은 무릎을 꿇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오리온이 챙겨두었던 금속 통에서 퍼져 나온 향이었다.
대리석을 부식시키던 그 지독한 독극물의 냄새였다.
세라핀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며 노이즈가 발생했다.
시스템 창이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형체를 잃어갔다.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피 묻은 검을 바닥에 끌며 오리온이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세라핀을 집어삼킬 듯 길게 늘어졌다.
카엘이 그를 막아서려 했으나 움직임이 둔해졌다.
오리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카엘을 묶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근원적인 어둠이자 시스템의 장벽이었다.
세라핀은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고막을 직접 두드렸다.
차갑고 건조한 음성이 모니터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드디어 찾아냈구나, 나의 오타.
세라핀의 고개가 꺾이듯 돌아갔다.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 창 뒤로 거대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닌, 관찰자의 시선이었다.
오리온이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기사의 충심 따위는 없었다.
오직 임무를 완수하려는 기계적인 냉혹함만이 가득했다.
세라핀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손톱으로 손바닥을 찍었다.
그의 입술이 귀밑에서 가늘게 떨리며 호선을 그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이솔 씨."
오리온이 품 안에서 빛나는 유리 병을 꺼내 그녀의 입가에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