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비가 쏟아졌다.
비탄의 계곡 상공, 부유도 아르카디아의 거대한 파편들이 지상을 향해 유성처럼 박혔다. 대지를 뒤덮은 것은 성국 엘리시온이 숨겨온 추악한 유산, 언데드 군단이었다. 수천의 시체병이 관절을 비틀며 진군했다. 그들의 눈구멍 속에서는 희뿌연 마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세라핀은 무너진 성소의 잔해 위에서 카엘의 손을 잡았다.
오리온이 그들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뽑았다. 그의 등 뒤로 교황 카스틸로의 친위대, 백색 기사단이 들이닥쳤다. 오리온의 망토가 거센 바람에 휘날렸다. 그는 세라핀을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가십시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오리온의 검 끝에서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그는 세라핀과 카엘을 향해 쇄도하는 기사들의 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가 그의 뺨에 튀었으나, 오리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성국의 방패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녀의 유일한 퇴로였다.
카엘이 세라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흑색 날개가 펼쳐졌다.
"준비됐나, 세라핀."
세라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카엘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곳에서 고동치는 마왕의 심장 박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세라핀이 눈을 감고 내면의 성휘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카엘의 마독이 그녀의 몸속으로 밀려들었다.
두 힘이 충돌하며 비명을 질렀다. 세라핀의 쇄골에 새겨진 낙인이 보랏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6화에서 카엘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을 때 보였던 그 기묘한 변색이, 이제는 전신을 집어삼킬 듯한 광휘로 번져 나갔다.
"아악!"
세라핀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비명이 터졌다. 몸 안의 혈관이 하나하나 터져 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고통과 함께 폭발적인 힘이 차올랐다. 세라핀과 카엘의 발치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성휘도 마독도 아닌,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공허의 불꽃이었다.
보랏빛 불꽃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불길이 닿는 곳마다 언데드 군단의 시체들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정화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는 기적이었다.
"성녀여, 감히 신의 권능을 더럽히는구나!"
공중에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핀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에 한 여자가 떠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사제복을 입고, 세라핀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였다. 교황이 내세운 가짜 성녀였다.
가짜 성녀가 손을 뻗자, 공중에 떠 있던 성수병 수백 개가 일제히 깨졌다. 쏟아진 성수는 빗물과 섞여 세라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세라핀의 살갗이 타 들어갔다. 1화에서 대리석 바닥을 부식시켰던 그 독극물이 섞인 성수였다.
"이건……!"
세라핀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쇄골을 움켜쥐었다. 가짜 성녀가 주문을 외우자, 세라핀의 신성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신성력이 강해질수록 낙인의 독성도 함께 강해지는 저주였다.
검은 반점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세라핀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낙인의 끝단이 심장을 향해 날카로운 가시처럼 파고들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압박감에 세라핀의 무릎이 꺾였다. 눈앞이 붉게 점멸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타오르는 불길이 들이친 것 같았다.
"세라핀!"
카엘이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가짜 성녀가 내뿜는 백색 결계가 그를 밀어냈다. 성녀의 순수한 신성력만이 통과할 수 있는 거부의 장벽이었다.
세라핀은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댄 채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낙인의 가시가 심장 근처의 얇은 막을 찔렀다. 찌릿한 통증이 뇌를 관통했다.
그 순간, 세라핀은 자신의 손등에 남은 흉터를 보았다. 하층 도시 루인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물쇠를 따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얻었던 훈장이었다.
이건 빙의한 소설 속 캐릭터의 고통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 숨 쉬고, 투쟁하며, 사랑하는 이솔이라는 인간의 고통이었다.
세라핀이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톱이 대리석 잔해를 긁으며 깨져 나갔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의 가짜를 노려보았다.
"이 아픔조차…… 내가 이 세계에 살아있다는 증거야."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으나 단단했다.
"결코 굴복하지 않아!"
세라핀이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낙인이 심장을 찌를 때마다 전신이 경련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카엘이 결계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공기가 뒤틀렸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며 마왕의 진정한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켜라, 인형."
카엘의 목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손톱으로 깊게 그었다.
선명한 핏줄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 피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보랏빛 액체였다.
카엘이 자신의 가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박동하는 검은 보석이었다. 마왕의 모든 근원이 담긴 핵이었다.
"카엘, 안 돼! 그건 당신의……!"
세라핀이 경악하며 손을 뻗었으나, 카엘은 이미 결계를 찢고 그녀에게 다가와 있었다.
카엘이 세라핀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서늘한 광기와 지독한 애정이었다.
"나의 전부를 가져라, 세라핀 이솔."
카엘이 박동하는 핵을 세라핀의 가슴, 정확히 낙인이 파고든 심장 위로 밀어 넣었다.
"아아아아악!"
세라핀의 비명이 전쟁터의 소음을 집어삼켰다.
심장 속에서 마왕의 핵과 성녀의 성휘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두 힘은 서로를 갉아먹다가, 이내 기묘한 나선형을 그리며 융합되기 시작했다.
세라핀의 전신에서 눈부신 은색 섬광과 칠흑 같은 어둠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낙인의 검은 가시들이 하얗게 변하며 정화되었다. 아니, 정화가 아니라 진화였다.
세라핀의 등 뒤에서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견갑골 부근에서 뼈가 돋아나고 살이 차올랐다.
마침내 펼쳐진 것은 한 쌍의 거대한 날개였다. 오른쪽은 신의 축복을 받은 듯한 순백의 깃털이었고, 왼쪽은 밤의 심연을 닮은 흑색의 깃털이었다.
은색과 흑색이 섞인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날개가 세라핀을 감쌌다.
공허의 성녀.
세라핀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왼쪽은 금색으로, 오른쪽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날개를 한 번 크게 휘젓자, 주변을 압박하던 백색 결계가 유리 조각처럼 박살 났다.
날개 끝에서 떨어진 은색 깃털 하나가 바람을 타고 가짜 성녀를 향해 날아갔다.
가짜 성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깃털이 그녀의 가슴 중앙을 관통하는 순간, 여자의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툭, 하고 가짜 성녀의 고개가 꺾였다.
터져 나온 것은 피가 아니었다. 정교하게 짜인 마법 회로와 짚단, 그리고 기괴한 연금술 재료들이었다.
하늘을 비행하던 가짜 성녀의 몸이 허무하게 지상으로 추락했다. 바닥에 부딪힌 그녀의 몸은 수천 개의 나무 조각으로 산산조각 났다.
처음부터 생명 따위는 없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세라핀은 부서진 인형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교황, 당신의 연극은 여기서 끝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성소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때, 멀리서 오리온이 챙겨두었던 금속 통에서 기묘한 향기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라핀의 새하얀 날개 깃털 하나가 검게 물들며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엘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세라핀의 시선은 무너진 성소 너머,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한 그림자에 고정되었다.
"아직 한 명 더 남았군요."
그림자 속에서 오리온이 피 묻은 검을 바닥에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오리온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세라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날개, 제 주인이 찾으시던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