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린 향이 코끝을 찔렀다. 성수라고 불리는 액체가 대리석 바닥에 닿자마자 치익 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1화에서 보았던 그 부식의 흔적보다 훨씬 진하고 고약했다.
세라핀은 발치에 떨어진 유리병 조각을 굽어보았다. 신성한 축복이라 믿었던 액체는 바닥을 뚫어버릴 듯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게 네 기억을 갉아먹던 벌레들의 먹이란다.”
그림자 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라핀은 고개를 돌렸다. 습기 찬 지하 벽면에 기댄 채 앉아 있는 여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 있었다. 한때 성녀의 상징인 백색 예복이었을 누더기가 그녀의 굽은 등 위로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세라핀은 숨을 들이켰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신물이 올라왔다. 여자의 눈꺼풀은 짓물러 있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는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전임 성녀…… 헬레나 님?”
여자는 대답 대신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기침 소리가 텅 빈 지하 감옥의 벽을 타고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가 떨리는 손을 뻗어 세라핀의 신발 끝을 더듬었다. 손등에는 세라핀의 것보다 훨씬 깊고 검은 낙인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교황이 준 성수를 마셨니? 매일 아침, 기도가 끝나고 나서?”
세라핀은 대답 대신 장갑 안의 손등 흉터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 장식 너머로 맥박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마셨다면 조만간 네 이름도 잊게 될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전임자가 그랬던 것처럼.”
헬레나가 핏기 없는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이가 빠진 잇몸 사이로 검붉은 타액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젖은 모래가 섞인 듯 거칠었다.
“우리는 신의 도구가 아니에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인 여자들이었지. 하지만 그 노인은 우리를 소모품으로 썼어. 기억을 지우고, 영혼을 깎아 부유도를 띄우는 땔감으로.”
세라핀의 눈꺼풀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꺼풀 안쪽을 혀로 강하게 눌러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 울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헬레나의 말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세라핀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자신이 지켜온 세계, 하층민을 가련하게 여기며 축복을 내리던 그 모든 행위가 결국 교황의 거대한 사기극 아래 놓인 연극이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가거라. 아직 네 영혼이 다 타버리기 전에.”
헬레나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세라핀은 차가운 지하 복도를 달려 나왔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성소의 중앙 홀로 들어섰을 때, 거대한 종소리가 아르카디아 전체를 진동시켰다. 단순한 예배의 종소리가 아니었다.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을 깨우는, 살의가 가득 담긴 청동의 울림이었다.
“성녀 세라핀을 찬양하라!”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목소리가 하나로 뭉쳐 하늘을 찔렀다. 세라핀은 발코니로 향하는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예복을 입고, 얼굴의 절반을 면사포로 가린 여자. 교황 카스틸로가 그녀의 손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신의 적들이 마계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성전의 시간이 도래했다!”
교황의 외침에 군중이 광기 어린 함성을 내질렀다. 세라핀의 시선이 교황의 품 안에서 빛나는 검은 복음서로 향했다. 9화에서 그가 떨어뜨렸던 그 불길한 서적은 이제 기괴한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복음서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대지를 적셨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성소 앞마당에 안치되었던 역대 성기사들의 유해가 흙을 헤치고 일어났다. 살점은 문드러지고 뼈마디가 드러난 언데드 군단이었다.
그들은 눈구멍에 푸른 불꽃을 갈무리한 채, 기계적인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살아있는 병사들은 공포에 질리는 대신, 그것을 신의 기적이라 믿으며 무릎을 꿇었다.
“가짜…….”
세라핀은 신음하듯 내뱉었다. 단상 위의 여자는 세라핀이 알던 그 어떤 사제도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성휘가 아니라, 복음서에 박힌 마석 라피스의 강제적인 공명이었다.
교황은 마계와의 경계선으로 대군을 진격시키고 있었다. 지상의 비탄의 계곡을 지나, 카엘이 다스리는 제르노스의 국경을 향해 죽음의 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세라핀은 뒤를 돌았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 장갑의 감촉. 오리온이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오리온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세라핀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오리온의 귀수 같은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미친 짓을 막아야 해요, 오리온. 저들은 죽은 자들이라고요!”
“알고 있습니다.”
오리온이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그의 장갑 끝이 세라핀의 예복 소매를 파고들었다. 3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의 장갑 끝이 미세하게 보랏빛으로 변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녀님, 당신은 이미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지금 나가면 저 언데드들의 칼날에 가장 먼저 목이 날아갈 분은 당신입니다.”
“비켜요.”
세라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공포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동작이 정확해졌다. 그녀는 소매 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오리온의 팔을 내리쳤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오리온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단검을 맞은 그의 장갑 위로 검은 잉크 같은 액체가 배어 나왔다.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
“당신도…… 교황의 피조물이었나요?”
세라핀의 물음에 오리온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7화에서 보았던 그 기묘한 표정으로 세라핀을 내려다보았다.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솔.”
자신의 본명을 부르는 오리온의 목소리에 세라핀의 전신이 굳었다. 빙의한 이후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름이었다. 오리온은 바닥에 떨어진 세라핀의 장갑 한 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코끝에 가져가 향기를 맡았다.
“마왕의 냄새가 진하게 배었군요. 역시 공허의 불꽃을 피워내기에 가장 적합한 촉매였습니다.”
오리온이 성큼 다가왔다. 세라핀은 뒷걸음질 치다 차가운 벽에 부딪혔다. 창밖의 하늘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8화의 복선처럼,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구름 사이로 번개가 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균열이 가듯 붉은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성국의 심장부에 우뚝 솟아 있던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다. 대기를 정화하던 푸른 잎들이 하나둘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거대한 잎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 지상으로 떨어졌다. 부유도 아르카디아의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루인스로, 그리고 마계의 국경으로 불타는 파편들이 쏟아졌다.
세라핀은 창밖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떨어지는 잎들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공중에서 궤적을 그리며 거대한 문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늘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빛의 글자들.
[엔딩이 시작됩니다]
시스템의 알림창 같은 그 문장이 핏빛 하늘 위로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계시인 줄 알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세라핀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이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었다.
이그드라실의 거대한 뿌리가 뒤틀리며 아르카디아의 대리석 바닥을 뚫고 솟구쳤다. 성소의 기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고, 비명과 굉음이 뒤섞여 지옥도를 그려냈다.
오리온이 세라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배어 나온 검은 얼룩이 세라핀의 피부로 전이되었다.
“이제 마지막 화를 장식할 시간입니다, 성녀님.”
오리온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만 개의 데이터 코드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세라핀은 보았다.
멀리 마계의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검은 안개가 몰려오고 있었다. 카엘이었다. 그는 날개를 펼친 채 불타는 하늘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세라핀의 낙인과 공명하는 보랏빛 검이 들려 있었다.
세라핀은 오리온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창밖의 카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카엘!”
그녀의 비명이 무너져 내리는 성소의 굉음에 묻혔다. 이그드라실의 가장 큰 가지가 꺾이며 세라핀이 서 있는 발코니를 덮쳤다.
오리온은 그녀를 놓지 않은 채 무너지는 잔해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함께 가시죠, 무대 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