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핀은 눈을 떴다. 눈꺼풀이 젖은 가죽처럼 무거웠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정교한 마법 진이 그려진 성소의 천장이 아니었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명멸하고 기계음이 고막을 긁는 하얀 방이었다.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신념의 흔들림을 증명하던 검은 낙인 대신 투명한 링거 줄이 꽂혀 있었다. 살갗을 뚫고 들어온 바늘의 감촉이 생경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정신이 듭니까, 이솔 씨.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교황 카스틸로, 아니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익숙한 자애로운 미소 대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두드렸다. 액정의 푸른 빛이 그의 안경알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16회차 데이터는 흥미롭더군요. 성녀가 마왕과 결탁해 부유도를 추락시키다니.
목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갔다. 세라핀은 갈라진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입술이 메말라 찢어지는 감각이 뒤따랐다.
이게 무슨 짓이지.
실험이죠. 인간의 감정이 극한의 절망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는지 확인하는.
남자가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다가왔다. 그의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수석 연구원 강진혁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세라핀은 눈을 감고 혀로 입천장을 강하게 눌렀다. 울고 싶을 때마다 반복하던 그 오랜 버릇이었다.
하지만 손등의 흉터는 그대로였다. 하층 도시 루인스의 아이들을 위해 잠긴 급식소 자물쇠를 따다 다친 그 흔적이 살갗에 선명했다. 이것조차 설계된 데이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서늘해졌다.
다음 회차의 역할은 최종 보스입니다. 성녀가 아닌,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자.
남자의 손이 다가오자 세라핀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주삿바늘이 팔뚝의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액체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순간, 하얀 방의 벽면이 물결치듯 일렁이며 무너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다시 동굴 속에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마독의 비릿한 냄새와 축축한 흙의 감촉이 피부로 전해졌다. 눈앞에는 카엘이 있었다. 그는 무너진 세계의 파편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라핀.
그의 부름에 명치 부근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엘은 그녀의 떨리는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방금 본 실험실의 냉기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 열기가 마비되었던 감각을 일깨웠다.
방금 무엇을 보았는지 묻지 않겠다. 하지만 네 눈동자가 죽음을 향하고 있군.
카엘의 시선이 세라핀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꽉 쥐었다. 그 강압적인 손길에 낙인이 잠시 보랏빛으로 명멸했다. 검은 반점 사이로 푸른 불꽃 같은 빛이 스며 나왔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 네가 이 세계를 가짜라 부른대도, 내가 너를 이곳에 붙들어 매겠다.
세라핀은 카엘의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기계음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의 박동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기묘한 안도감이 전신을 감쌌다.
누군가 이 세계를 설계했다면, 그 설계도 자체를 찢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소설의 독자로 남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녀는 손등의 흉터를 엄지손가락으로 세게 문질렀다. 아픔이 느껴졌다.
이 세계가 글자로 이루어졌다면, 내가 그 잉크를 다시 쓰겠어.
세라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녀는 카엘의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진 검은 복음서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이솔이라는 이름이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가죽 표지를 거칠게 넘겼다. 정해진 결말, 예고된 비극, 성녀의 희생. 그 모든 문장 위에 손톱을 세워 깊게 줄을 그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카엘, 당신을 노리는 건 교황청만이 아니야.
알고 있다. 내부의 반동 분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지.
카엘이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동굴 입구 너머에서 수십 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지 않은, 살의가 섞인 발걸음이었다. 마계의 반란 세력이었다. 그들은 교황청에서 지급받은 신성 무기를 들고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반란군의 선두에 선 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성수병을 흔들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성수에서는 일전에 대리석을 부식시켰던 그 달콤하고도 불쾌한 향기가 풍겼다.
마왕의 목을 가져가면 교황청에서 아르카디아의 시민권을 약속했다.
세라핀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현대에서 배운 경제적 제재와 보급로 차단의 원리를 떠올렸다. 이 세계의 힘은 결국 한정된 자원에서 나온다. 신성력도, 마력도 결국은 에너지의 흐름에 불과했다.
그녀는 몸을 낮춰 손을 뻗어 지면을 짚었다. 신성력과 마독이 뒤섞인 보랏빛 기운이 지맥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녀가 노린 것은 반란군의 목이 아니었다.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 아래 흐르는 고농축 에너지, 마석 라피스의 맥이었다.
자원을 잃은 군대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지맥을 타고 흐르던 에너지가 일순간 역류했다. 반란군이 들고 있던 신성 무기들이 붉은 불꽃을 튀기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마력이 공급되지 않는다.
반란군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비좁게 메웠다. 그들이 목숨처럼 의지하던 마석 장비들이 검게 타들어 갔다. 보급로가 차단된 군대는 길 잃은 짐승에 불과했다.
세라핀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성휘를 쥐어짜 내어 그들의 발밑을 얼려버렸다. 공포로 질린 반란군들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퇴로는 카엘의 그림자에 잠식된 후였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어둠이 그들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효율적이군.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카엘이 그림자 칼날을 가볍게 휘둘러 선두에 선 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어둠이 그들을 통째로 삼켰다. 전투는 허망할 정도로 빠르게 마침표를 찍었다.
동굴 안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세라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일정한 박자. 오리온 크레스트였다. 그는 피 냄새가 진동하는 현장을 무심하게 지나쳐 세라핀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손에는 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지만, 소매 사이로 비친 검은 얼룩은 감추지 못했다. 오리온은 허리춤에서 은색 원통을 꺼내 들었다. 금속 통이 부딪히며 챙그랑 소리를 냈다.
성녀님, 아니 이솔 씨.
그의 입에서 나온 본명에 세라핀의 어깨가 돌처럼 굳었다. 오리온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광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꺼졌던 촛불이 다시 타오를 때가 되었습니다.
그가 통을 열자 안에서 낡은 문장이 새겨진 인장이 나타났다. 백은색 날개와 붉은 눈동자가 교차한 문양이었다. 그것은 성국 내부의 비밀 저항 세력, 백은의 새벽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그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분이 계시더군요.
세라핀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리온의 시선이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동자에 기묘한 동질감이 서렸다.
죽은 줄 알았던 당신의 전임자, 제14대 성녀께서 살아계십니다.
오리온은 인장을 세라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세라핀의 귀에 입술을 바짝 다가대고 낮게 속삭였다. 숨결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그녀가 루인스의 쓰레기 더미에서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세라핀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인장의 날개 문양을 더듬었다. 뾰족한 금속 끝이 지문을 파고들었다. 오리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둠 속으로 몸을 돌렸다.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그가 던진 것은 성국의 봉인이 찍힌 낡은 지도였다. 세라핀이 지도를 펼치자, 그곳에는 성소 뤼미에르의 지하 지하도가 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선의 끝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곳, 루인스의 폐공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엘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하지만 세라핀은 이미 인장을 움켜쥔 채였다.
가야겠어. 진실이 그곳에 있다면.
세라핀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지만 카엘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그의 체온이 옷감을 뚫고 전해졌다.
동굴 밖으로 나서자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이그드라실의 잎들이 말라 비틀어진 채 눈송이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루인스로 향하는 비밀 통로는 거대한 하수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정화되지 않은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세라핀은 코를 막으며 어두운 통로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성휘의 빛이었다. 하지만 평소 보던 백색의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썩은 고름처럼 탁하고 누런 빛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세라핀은 숨을 멈췄다. 낡은 침대 위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한 몸이었다. 그녀의 전신은 검은 낙인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세라핀을 향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갈라진 소리를 내뱉었다.
오셨군요, 나의 가짜.
여인의 손이 세라핀의 뺨을 향해 뻗어 왔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딱딱한 마석의 질감이었다. 세라핀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눈을 가져가세요. 그래야 당신이 보게 될 테니까.
여인이 자신의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손톱이 눈꺼풀 안쪽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공포가 세라핀의 발끝부터 차올랐다.
여인의 손바닥 위에 피 칠갑이 된 안구 대신 푸른색 라피스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세라핀의 입가로 밀어 넣었다.
이것이 성국의 마지막 성찬입니다.
세라핀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돌덩이가 밀고 들어왔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거대한 기억의 파편들이 뇌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닥을 구르며 자신의 목을 쥐어뜯었다.
기억 속에서 교황 카스틸로가 웃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수천 명의 성녀가 마석으로 변해 탑의 자재로 쓰이고 있었다. 부유도를 지탱하는 것은 신성력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쌓아온 성녀들의 사체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여인은 이미 먼지가 되어 사라진 후였다. 세라핀은 입안의 핏물을 뱉어내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그녀는 더 이상 성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인이 건넨 푸른 마석의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카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는 세라핀의 변화를 목격하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세라핀은 바닥에 떨어진 백은의 인장을 발로 짓밟았다. 금속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성국을 추락시키겠어. 한 명도 남김없이.
세라핀은 카엘의 검을 빼앗아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보랏빛 피가 바닥에 떨어지며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공허의 불꽃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냈다.
그녀는 폐공장의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아르카디아가 보였다. 화려한 금색 궁전들이 가증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세라핀은 손을 높이 쳐들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 바람도, 떨어지던 이그드라실의 잎도. 세라핀의 발밑에서 시작된 보랏빛 불꽃이 거대한 용의 형상이 되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부유도의 하부 결계가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비명 소리가 대기를 타고 지상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세라핀의 표정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을 즐기며 미소 지었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려왔다. 교황청의 최종 병기, 성휘의 심판이었다. 빛은 세라핀의 머리 위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카엘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 날개가 빛의 기둥과 충돌하며 굉음을 냈다. 충격파로 인해 주변의 폐건물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림자 속에서 카스틸로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세라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오렴, 세라핀. 너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단다.
세라핀은 카스틸로의 환영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보랏빛 불꽃이 환영을 불태웠다. 빛의 기둥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내 소멸했다.
공중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졌다. 부유도의 일부인 시계탑이었다. 그것은 세라핀이 서 있는 곳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 처박혔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오리온이 나타났다.
그의 하얀 예복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기괴하게 뒤틀린 자세로 웃으며 세라핀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성녀의 심장이 담긴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이 진짜 마왕이 되셨군요.
오리온이 유리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유리 파편이 튀며 세라핀의 뺨에 상처를 냈다. 그녀는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핥으며 오리온의 목을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오리온은 고통 속에서도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세라핀은 그를 내동댕이치고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카엘의 날개가 그녀를 감쌌다. 두 사람은 무너져 내리는 부유도의 파편들을 딛고 상층부로 치솟았다. 결계가 사라진 아르카디아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니었다. 지상의 마기가 위로 치솟으며 귀족들을 괴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교황청의 정문에 도착했을 때, 세라핀은 보았다. 성소의 제단 위에 묶여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그들은 루인스에서 사라졌던 실종자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너의 연료였나.
세라핀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제단 뒤에서 카스틸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성녀의 권능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지팡이 끝에 박힌 것은 성녀의 눈동자들이었다.
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한 법이지. 너도 곧 저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카스틸로가 지팡이를 내리쳤다. 성소 전체가 진동하며 바닥에서 수천 개의 사슬이 튀어 올랐다. 사슬은 세라핀과 카엘의 사지를 결박했다. 신성력이 깃든 사슬은 피부를 태우며 뼈를 조여왔다.
세라핀은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혀로 입천장을 누르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실험실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강진혁의 목소리, 기계음, 그리고 주삿바늘의 감촉.
이건 데이터일 뿐이야.
그녀가 중얼거리는 순간, 사슬의 장력이 약해졌다. 세계의 법칙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라핀은 자신을 묶은 사슬을 손으로 잡아 뜯었다. 불가능한 힘이 그녀의 팔근육을 타고 흘렀다.
카스틸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성휘의 폭풍을 일으켰지만, 세라핀은 그 폭풍 속을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보랏빛 노이즈가 발생하며 현실이 깨져나갔다.
너, 너는 대체 무엇이냐.
나는 네가 만든 악몽의 끝이다.
세라핀은 카스틸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공허의 불꽃이 터져 나와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교황의 몸이 재가 되어 흩어지는 순간, 성소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카엘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밖으로 날아올랐다. 등 뒤에서 성국 엘리시온의 심장이 폭발하며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었다. 부유도는 서서히 균형을 잃고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세라핀은 떨어지는 낙원 위에서 카엘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보랏빛 낙인이 번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력이 완전히 섞여 하나가 된 증거였다.
이제 돌아갈 곳은 없어.
카엘의 말에 세라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낡은 역사서를 꺼냈다. 최초의 성녀 테레사의 이름 위에 자신의 이름을 겹쳐 썼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기준이 될 거야.
그 순간, 하늘 위로 거대한 모니터 같은 창이 떠올랐다. 실험실의 강진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세라핀은 하늘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카엘의 목을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몸이 눈부신 빛에 휩싸이며 폭발했다. 하얀 방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지지직거리며 꺼졌다. 강진혁은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화면에는 오직 한 문장만이 반복해서 출력될 뿐이었다.
[사용자에 의해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