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기분 나쁘게 눅눅했다. 카엘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그가 이끄는 길은 마계에서도 가장 깊은 곳, 태초의 어둠이 고여 있는 심연의 요람이었다.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와 썩은 나무껍질의 향이 뒤섞여 감돌았다. 세라핀은 자신의 쇄골 부근을 짓누르는 낙인의 열기를 느꼈다. 성국에서 하사받은 성수가 대리석을 부식시키며 내뿜던 그 독한 연기와 닮은 감각이었다.
천 장 높이의 동굴 벽면에는 거대한 뿌리들이 혈관처럼 엉켜 있었다. 위쪽 부유도를 지탱한다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하단부였다. 성전의 벽화에서는 황금빛으로 빛나던 그 뿌리들이 이곳에서는 검게 죽어 있었다. 진물이 흐르는 나무껍질 사이로 희끄무레한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세라핀은 목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게 우리가 지키려던 세계의 실체인가요."
낮게 깔린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공허하게 울렸다. 카엘은 대답 대신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집채만 한 뿌리 뭉치가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거대한 뿌리 더미는 정화되지 못한 마독에 절어 괴사 직전이었다. 카엘이 입을 열자 차가운 증기가 흩어졌다.
"성국은 이 뿌리가 마계를 정화한다고 가르쳤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마계의 생명력을 빨아올려 상층부의 화려함을 유지하는 빨대에 불과해."
세라핀은 장갑 안 손등의 흉터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어린 시절 루인스의 아이들과 함께 보았던 잿빛 하늘이 떠올랐다. 상층부 귀족들이 버린 찌꺼기를 먹으며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던 아이들의 얼굴. 신성력이라는 이름의 착취가 이곳 심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눈꺼풀 안쪽을 혀로 강하게 눌렀다. 울음 대신 선택한 익숙한 고통이었다.
뿌리 근처로 다가갈수록 대기가 일렁였다. 성휘와 마독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미세한 정전기가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세라핀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보랏빛으로 변한 낙인이 맥박에 맞춰 점멸하고 있었다. 6화에서 카엘과 처음 접촉했을 때 느꼈던 그 기이한 공명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뿌리를 정화해야 해요. 이게 썩어 문드러지면 부유도도, 지상의 루인스도 모두 끝장나니까."
카엘이 고개를 돌려 세라핀을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복잡한 감정의 파고가 일었다. 그는 세라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닿은 부위에서 보라색 섬광이 튀어 올랐다.
"내 마력과 당신의 성휘를 섞어야 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일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어."
세라핀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차가운 금속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교황이 내렸던 그 독성 강한 성수의 향보다 훨씬 짙고 선명한 향이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알던 세계의 법칙이 무너질 것임을. 6화 봉인실 지하에서 보았던 그 푸른 불꽃이 다시 한번 피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타버릴지언정 혼자 두지는 않을 테니까. 내 손을 잡아요."
카엘의 낮은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세라핀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다. 그것은 신성력도, 마력도 아닌 제3의 무언가였다. 두 사람의 손이 맞물리는 순간, 동굴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뿌리 뭉치를 덮쳤다. 성휘의 백색 광휘와 마독의 칠흑 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며 섞여 들었다. 보라색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썩어가는 나무껍질을 태워버렸다. 세라핀은 전신이 조각나는 듯한 감각에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공허의 불꽃이 소용돌이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 뿌리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튕겨져 나왔다. 그것은 이 세계의 유물이라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고 버티는 검은 천 재질의 가방이었다.
세라핀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 가방을 낚아챘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지졌지만 놓지 않았다. 카엘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불꽃이 잦아든 자리에는 정화된 뿌리가 아닌, 기괴하게 뒤틀린 공간의 틈새가 남았다.
"이게…… 뭐지?"
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세라핀의 손에 들린 것은 현대적인 디자인의 노트북 가방이었다. 지퍼 위에는 낡은 인형 키링이 매달려 있었다. 이 세계의 공예 기술로는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매끄러운 합성 섬유의 질감. 세라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는 몇 권의 노트와 낡은 태블릿 PC, 그리고 구겨진 종이 뭉치들이 가득했다. 가장 위에 놓인 종이에는 한글로 된 메모가 적혀 있었다.
[설정 오류 수정: 성녀 세라핀 이솔을 죽여야 세계가 리셋된다.]
종이를 움켜쥔 세라핀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것은 이 세계의 복음서에 적힌 예언보다 훨씬 잔혹하고 명확한 문장이었다. 그녀가 이 세계를 구하려 애쓰는 모든 행위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과정이라는 선고였다.
카엘이 종이 위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한글을 읽을 수 없었지만, 세라핀의 얼굴에 서린 공포를 읽어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세라핀, 그 종이에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세라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가방 안쪽에서 발견된 것은 종이뿐만이 아니었다. 낡은 볼펜과 먹다 남은 사탕 껍질, 그리고 누군가의 사원증. 사원증 사진 속 인물은 세라핀이 거울 속에서 매일 보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빙의 전, '이솔'로서 살아가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뿌리 너머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구두 굽이 바닥을 때리는 규칙적인 소리. 마계 최하층에는 존재할 수 없는, 너무나도 정중하고 차분한 발소리였다.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그림자 사이에서 나타난 인물은 오리온 크레스트였다. 그는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의 손등에는 세라핀의 낙인과 똑같은 형태의, 하지만 훨씬 거대한 보랏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세라핀이 들고 있는 가방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찾으러 오실 줄 알았습니다. 작가님이 남긴 마지막 유산을."
오리온의 시선이 세라핀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오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 위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카엘이 세라핀의 앞을 가로막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오리온은 카엘이 아닌 세라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죽어야 이 지옥 같은 연극이 끝납니다, 이솔 씨."
오리온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세라핀의 호흡이 멎었다. 그는 성국의 기사도, 이 세계의 주민도 아니었다. 그는 이 가방의 주인을 알고 있었고, 이 세계의 결말을 쥐고 있는 자였다.
"어떻게…… 그 이름을……."
세라핀이 뒷걸음질 치다 뿌리에 등을 부딪혔다. 오리온은 검 끝을 세라핀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그의 눈에는 광기와 슬픔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당신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단지 시스템을 돌리기 위한 연료일 뿐이죠."
오리온이 바닥을 차고 도약했다. 푸른 불꽃을 머금은 검날이 세라핀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카엘이 마력의 장벽을 펼쳤지만, 오리온의 검은 그것을 종이처럼 찢어발기며 직진했다. 세라핀은 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가방 속에서 기묘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징-, 하는 진동음과 함께 태블릿 PC의 화면이 저절로 켜졌다. 어두운 동굴 속을 밝히는 푸른 빛이 세라핀과 오리온 사이를 가로막았다. 화면 위에는 붉은색 글자가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비인가 거주자의 데이터 삭제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오리온의 검이 세라핀의 심장 앞 1인치 지점에서 멈춰 섰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의 팔이 공중에서 분해되고 있었다. 마치 디지털 데이터가 깨지듯, 그의 신체가 육면체의 입자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악!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오리온의 비명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그의 몸이 절반쯤 사라졌을 때, 동굴 천장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생명체의 눈이 아니었다. 수만 개의 톱니바퀴와 회로로 구성된, 기계적인 신의 눈이었다.
카엘은 세라핀을 품에 안고 바닥에 엎드렸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무너져 내렸다. 뿌리도, 돌벽도, 심지어 공기조차도 격자무늬의 선으로 변해 해체되고 있었다. 세라핀은 가방 속에서 굴러 떨어진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갈겨쓴 문장이 하나 있었다.
[진짜 성녀는 루인스의 쓰레기 더미에서 태어난다. 세라핀은 가짜다.]
세라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부터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카엘을 보았다. 그의 얼굴 역시 노이즈가 낀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이것은 멸망이 아니었다. 이 세계 자체의 '삭제'였다.
"카엘! 내 손 잡아요!"
세라핀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카엘의 옷자락을 통과해 허공을 휘저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수천 킬로미터처럼 멀어졌다.
그때, 가방 속에서 한 권의 책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복음서도, 설정집도 아니었다. 세라핀이 루인스의 아이들을 위해 그렸던 조잡한 그림책이었다. 그림책이 빛을 내뿜으며 오리온의 흩어지는 입자들을 빨아들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세라핀의 목소리가 끊겼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오직 하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현대식 휴대폰의 벨소리만이 고요한 심연 속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 세계의 누구도 알 수 없는, 하지만 세라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의 가요 멜로디였다.
암흑 속에서 휴대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발신인의 이름이 떠올랐다.
[엄마]
세라핀은 떨리는 손을 뻗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것은 신의 계시도, 마왕의 포효도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래서 더 잔혹한 목소리였다.
"솔아, 언제 오니? 저녁 다 차려놨는데."
세라핀은 대답 대신 가방을 꽉 껴안았다. 눈앞에 카엘의 슬픈 얼굴과 오리온의 광기 어린 눈빛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너머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인스의 진짜 성녀가 쓰레기 더미 위에서 눈을 뜨는 환영이 보였다.
모든 데이터가 소거되기 직전, 세라핀의 귓가에 차가운 기계음이 다시 한번 울렸다.
[시스템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대상: 세라핀 이솔. 역할: 최종 보스.]
세라핀은 자신의 심장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멈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력원으로 교체되는 진동이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 보인 것은 동굴도, 마계도 아니었다. 수많은 모니터가 사방을 메우고 있는 하얀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죽은 줄 알았던 교황 카스틸로가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태블릿 PC를 체크했다.
"16회차 실험 종료. 데이터 저장 중입니다."
그는 세라핀을 보며 무미건조하게 미소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솔 씨. 다음 회차에서는 조금 더 자극적으로 부탁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