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데모니움의 외곽 시장은 기괴한 적막으로 가득했다. 가판대 위에는 흔한 곡물이나 고기 대신 투명한 유리병들이 놓여 있었다. 병 속에서는 흐릿한 푸른 연기가 일렁이며 가느다란 파동을 그렸다. 세라핀은 발걸음을 멈추고 가장 가까운 가판대 앞에 섰다.
피부가 창백하게 질린 어린 마족이 병 하나를 소중히 움켜쥐었다. 아이의 손등에는 뼈마디가 툭 불거져 있었고 손톱 끝은 검게 타들어 가 있었다. 옆에 선 노파가 아이의 손을 거칠게 낚아채며 상인에게 병을 내밀었다. 상인은 무심한 눈길로 병 안의 연기를 살피더니 탁자 위에 검은 빵 한 조각을 던졌다.
아이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한 줌 더 빠져나가는 것을 세라핀은 놓치지 않았다. 저 병에 담긴 것은 단순한 재화가 아니었다. 마족들이 평생을 바쳐 깎아낸 제 자신의 수명과 마력이었다. 세라핀은 목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꺼풀 안쪽을 혀끝으로 강하게 눌렀다.
이곳의 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이 차갑고 축축했다. 부유도 아르카디아의 온화한 바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비참함이 발밑에서부터 차올랐다. 성국에서는 성수가 모든 것을 해결했지만 이곳은 존재 자체가 대가였다. 세라핀은 장갑 안쪽 손등의 흉터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누군가 죽어야만 유지되는 평화는 이미 성소에서 충분히 보았다. 하지만 마계의 방식은 그보다 훨씬 직설적이고 잔혹했다. 카엘이 그녀의 어깨 위로 검은 외투를 여며주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이곳은 당신이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그의 시선은 시장의 누추한 풍경을 훑으며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세라핀은 고개를 저으며 가판대 위의 유리병을 가리켰다. 저 아이는 방금 무엇을 판 것인지 묻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카엘은 대답 대신 세라핀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앞장서 걸었다.
심장의 박동 횟수와 영혼의 파편이 이곳의 유일한 화폐다.
카엘의 뒷모습은 거대한 벽처럼 단단했으나 그 그림자는 쓸쓸해 보였다. 세라핀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감각을 집중했다. 체내에 소용돌이치는 성휘는 여전히 뜨겁고도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힘은 성국에서는 결계를 유지하는 도구였지만 이곳에서는 파괴의 상징이었다.
만약 이 빛을 마족들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제할 수 있다면. 세라핀의 머릿속에서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가설이 싹을 틔웠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위에 돌을 올리고 성휘와 마력을 아주 미세한 비율로 섞어 주입하기 시작했다.
손끝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치솟았다. 세라핀은 입술을 짓이기며 신음 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투명한 돌멩이가 점차 백색의 광채를 머금으며 단단한 결정체로 변해갔다. 그것은 신성력의 순수함을 유지하면서도 마계의 대기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기묘한 형태였다.
세라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호흡이 가빠졌다. 결정이 완성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일시적으로 정화되며 맑은 향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완성된 화이트 젬을 손에 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카엘의 표정은 공포에 가까운 분노로 일그러졌다.
지금 제정신인가.
카엘이 세라핀의 손목을 낚아채며 화이트 젬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결정체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으나 카엘의 눈은 오직 세라핀의 얼굴만을 향했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라핀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직시했다.
방법을 찾았을 뿐이에요.
자신의 생명을 깎아 돌을 만드는 짓이 방법이란 말인가. 카엘의 목소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세라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성국의 성녀가 마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다는 의지였다.
세라핀은 카엘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는 누구도 자신을 깎아 먹으며 연명하지 않는 곳이에요. 당신도 포함해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시장의 적막을 뚫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카엘은 대답 대신 세라핀을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뺨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날카로운 긴장감을 자아냈다. 세라핀은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바닥에 떨어진 화이트 젬을 보았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카엘은 그녀의 어깨를 으스러질 듯 쥐며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세라핀은 이미 결심을 굳힌 뒤였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평화라면 차라리 자신의 빛으로 그 구조를 무너뜨리리라.
세라핀은 카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시장의 상인들에게 화이트 젬을 건넸다. 처음에는 의구심을 품던 마족들이 결정체의 효능을 확인하자 시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화이트 젬 한 알이면 유리병 수십 개에 달하는 생명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소문은 그림자보다 빠르게 퍼져 나갔고 판데모니움의 외곽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며칠 뒤 세라핀은 다시 시장을 찾았다. 아이들의 얼굴에 핏기가 돌고 노파의 구부정했던 허리가 조금씩 펴지는 것을 보았다. 성휘를 결정화할 때마다 명치끝이 비틀리는 통증이 찾아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낙인이 보랏빛으로 짙어질수록 화이트 젬의 광채는 더욱 영롱해졌다.
시장의 중앙 광장에는 이제 화이트 젬을 거래하는 전용 가판대가 생겨났다. 마족들은 세라핀을 향해 경외와 두려움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 카엘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그녀의 뒤를 지켰으나 그 눈빛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세라핀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상인에게 마지막 결정을 건넸다.
그 순간 공기가 기묘하게 뒤틀리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장 구석구석을 채우던 활기가 순식간에 공포로 얼어붙었다. 세라핀은 본능적으로 카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주변을 살폈다. 건물 지붕 위로 은색 갑옷을 입은 무장 집단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성국 뤼미에르의 자객들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성기사와는 다른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맨 앞에 선 자객이 손목에 장착된 소형 석궁을 들어 올렸다.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고요한 시장에 날카롭게 울렸다. 화살촉 끝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세라핀은 그 액체의 냄새를 맡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일찍이 고해성사실에서 오리온의 장갑을 썩게 만들었던 그 독극물이었다. 마독과 성휘를 동시에 부식시키는 치명적인 금기의 독이 화살촉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자객들은 시장의 마족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쏘아 올렸다.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화이트 젬을 쥐고 있던 상인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화살이 박힌 자리마다 보랏빛 불꽃이 튀며 살점이 타들어 갔다. 세라핀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아이를 향해 달려가려 했으나 카엘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뒤로 끌어당겼다.
물러나라고 했을 텐데.
카엘의 목소리에는 자책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거대한 마력을 끌어모으며 자객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자객들의 화살은 카엘의 마력 장벽을 비웃듯 가볍게 뚫고 들어왔다. 그들의 무기는 마력을 무력화하는 특수한 합금으로 제작된 것이 분명했다.
세라핀은 충격으로 굳어진 채 자객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들의 동작은 마치 기계처럼 정확했고 자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성국은 이 세계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려 들었다.
가장 선두에 선 자객이 투구를 벗어 던졌다. 드러난 얼굴은 세라핀도 잘 아는 성국의 고위 사제였다.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뜩였고 입술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세라핀이 만든 화이트 젬 하나를 발로 짓밟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부정한 힘으로 마물을 살찌우다니, 이단자의 끝은 참혹할 것이다.
사제의 선언과 동시에 수십 명의 자객이 일제히 시장 한복판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의 검 끝에는 시장의 상인들이 흘린 피가 묻어 있었다. 세라핀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기괴하게 뒤틀리며 고동치기 시작했다.
카엘이 바닥에 떨어진 자객의 화살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는 화살촉에 묻은 독의 성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이 독은 마계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성국의 성휘도 아니었다. 그것은 두 힘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파괴적인 잔재를 인위적으로 농축한 괴물 같은 독이었다.
세라핀은 사제의 뒤편 어둠 속에서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입매를 가린 채 상황을 지켜보는 남자. 오리온 크레스트였다. 그는 세라핀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리온의 발치에는 세라핀이 잃어버렸던 장갑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천천히 밟아 뭉개며 자객들에게 손짓했다. 자객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시장은 순식간에 피와 불길로 뒤덮였다. 세라핀은 카엘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오리온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오리온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작은 금속 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통이 열리자 시장 전체에 달콤하면서도 구역질 나는 향기가 퍼져 나갔다. 세라핀의 낙인이 전례 없는 통증과 함께 보랏빛 광채를 내뿜으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비명이 가득한 시장의 끝에서 오리온은 입모양으로만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의 기도는 여기서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