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무너진 천장 사이로 쏟아진 돌가루가 시야를 가렸다.
세라핀은 거칠게 기침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손바닥에 닿는 지면이 축축했다.
수호룡의 포효로 뒤덮였던 서고는 기괴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옆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카엘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미간을 짚고 있었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 위로 회색 분진이 내려앉았다.
세라핀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 묻어난 것은 검게 타들어 가는 마력의 잔해였다.
카엘이 대답 대신 세라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의 손이 닿은 곳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 들어왔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낙인의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세라핀은 눈꺼풀 안쪽을 혀로 꾹 눌렀다.
울음을 참을 때마다 반복하던 익숙한 습관이었다.
카엘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에 머물렀다.
검게 죽어있던 낙인이 보랏빛으로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력이 닿은 자리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카엘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손을 거두었다.
세라핀은 바닥에 떨어진 가죽 뭉치를 가리켰다.
그것은 교황의 집무실에서 챙겨온 검은 복음서였다.
붕괴의 와중에도 세라핀은 이것만큼은 놓지 않았다.
복음서의 겉면은 기괴한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만질 때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한 불쾌감이 전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조심스레 넘겼다.
책장 속에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숫자들이 가득했다.
연금술 배합표였다.
세라핀의 눈동자가 빠르게 글자 위를 훑었다.
현대 화학 기호와 유사한 도식들이 곳곳에 섞여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었다.
복음서의 중반부에는 성수의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라피스 원석과 은방울꽃 추출액이 주재료였다.
가장 밑에 적힌 마지막 재료가 시야를 파고들었다.
성녀의 생명력.
단순한 보조제가 아니었다.
교황이 매일 건네던 성수는 증폭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녀의 영혼을 육신에 박제하기 위한 접착제였다.
성수를 마실수록 자아는 마모된다.
육신은 대륙을 지탱할 천공석으로 변해갈 뿐이었다.
세라핀의 입술에서 허망한 웃음이 터졌다.
교황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건네던 은잔이 떠올랐다.
마시지 않으면 신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살아있는 조각상이 되라는 선고였다.
그녀는 장갑 안 손등의 흉터를 손톱으로 긁었다.
카엘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의 시선은 세라핀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더 참혹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기사단 에테르노의 강화 비술이었다.
페이지에는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남자의 해부도가 있었다.
심장 부근에는 붉은색 잉크로 굵은 선이 그어졌다.
마족의 심장에서 추출한 정수를 혈관에 주입할 것.
거부 반응을 억제하기 위한 축복이 동반되어야 한다.
세라핀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신의 군대는 마족의 피로 만들어진 혼종들이었다.
성국은 혐오하던 마계의 힘을 은밀히 빌려 쓰고 있었다.
서고 입구의 잔해더미가 요란하게 무너졌다.
먼지 구름을 헤치고 그림자가 나타났다.
오리온이었다.
그의 갑옷은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망토는 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검을 뽑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오리온의 시선이 세라핀의 복음서에 닿았다.
그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실을 마주한 자의 공포가 그의 얼굴을 지배했다.
그는 손을 뻗으려다 멈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세라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오리온 경, 당신도 알고 있었나요.
오리온은 대답 대신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갑옷 틈새로 검은 핏줄이 징그럽게 솟아올랐다.
복음서에 적힌 부작용의 증상과 일치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내리쳤다.
대리석 바닥이 힘없이 박살 났다.
그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엘이 세라핀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이성을 잃은 짐승은 죽이는 게 자비다.
세라핀은 카엘의 팔을 밀쳐내고 달려나갔다.
무모한 행동이었다.
폭주하는 기사의 일격은 바위도 가루로 만들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오리온의 손을 잡았다.
금속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가 손바닥을 태울 듯했다.
오리온의 시선이 겨우 세라핀에게 초점을 맞췄다.
도망치십시오.
제 안의 것이 당신을 해치려 합니다.
세라핀은 그의 차가운 금속 장갑에 자신의 뺨을 댔다.
신성력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마기를 억눌렀다.
뜨겁던 오리온의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당신이 누구의 피를 가졌든 상관없어요.
내게 건넸던 그 마음은 진짜였으니까요.
세라핀의 목소리가 서고 안에 잔잔하게 울렸다.
오리온의 눈에서 붉은빛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는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세라핀을 멍하니 보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오리온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카엘을 경계하면서도 세라핀의 손은 놓지 않았다.
카엘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으나 멈춰 섰다.
오리온은 품 안을 더듬어 더러워진 천 뭉치를 꺼냈다.
세라핀이 잃어버렸던 장갑이었다.
이것을 돌려드려야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세라핀은 의아한 표정으로 장갑을 건네받았다.
장갑의 무게가 평소보다 묵직했다.
손가락 끝을 안쪽으로 밀어 넣자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내피 사이에 숨겨져 있던 종이 뭉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라핀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정갈한 필체로 명단이 적혀 있었다.
차기 성녀 후보자 명단.
세라핀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명단에는 대여섯 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 한 명의 이름 위에 빨간색 원이 쳐져 있었다.
루인스에서 그녀가 몰래 보살피던 아이였다.
오리온이 세라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교황은 이미 당신의 대체품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세라핀의 손가락에서 종이가 힘없이 낙하했다.
카엘의 안광이 명단의 이름을 훑으며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세라핀의 어깨를 감싸 쥐며 고개를 낮추었다.
교황의 은잔이 왜 매일 아침 차려졌는지 이제 알겠군.
바닥에 떨어진 성수가 대리석을 검게 부식시키고 있었다.
세라핀은 아이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구겨 쥐었다.
손등의 흉터가 다시 화끈거리며 타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무너진 서고의 출구를 보았다.
저 너머에서 성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리온이 검을 뽑아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카엘은 세라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내 손을 잡아라.
세라핀은 카엘의 창백한 손과 오리온의 등을 번갈아 보았다.
멀리서 교황의 성스러운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처음으로 신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자신의 선택으로 누군가를 살리겠다는 맹세였다.
세라핀은 카엘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두 사람의 마력이 맞닿자 지면이 거칠게 진동했다.
서고 바닥에서 푸른 불꽃이 기둥처럼 솟구쳤다.
성소 전체에 비상 종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무장한 성기사들이 잔해를 헤치고 들이닥쳤다.
맨 앞줄에 선 기사가 세라핀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성녀를 반역자로 규정한다.
카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푸른 불꽃이 거대한 장막이 되었다.
기사들의 외침이 불길 속으로 삼켜졌다.
세라핀은 카엘의 품 안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이 당신이 원하던 진실인가요.
세라핀의 물음에 카엘은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안았다.
부유도의 공기가 차갑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라핀은 품 안에서 꺼낸 복음서를 불길 속으로 던졌다.
가죽 책자가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오리온이 몰려오는 기사들을 막아서며 포효했다.
세라핀은 카엘의 목을 감싸 쥐며 속삭였다.
다음은 교황의 차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