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데모니움의 입구는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벌어져 있었다. 성국 엘리시온의 백색 대리석과는 대조적인 칠흑의 흑요석이 사방을 뒤덮었다. 수직으로 솟은 절벽 위로 보랏빛 안개가 유령처럼 떠다녔다. 세라핀은 마차 창틀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흉터가 차가운 공기에 반응해 미세하게 떨렸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공기는 비릿한 철분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지상의 루인스에서 맡았던 악취와는 결이 다른, 서늘하고 무거운 압박감이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카엘이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내민 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이 씌워져 있었다. 세라핀은 망설임 끝에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귀를 찢는 듯한 야유가 쏟아졌다. 길게 늘어선 마족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는 붉거나 노랗게 번뜩이며 세라핀을 훑어 내렸다. 창날이 바닥을 치는 쇳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성국의 인형을 이곳에 들이다니!"
누군가 던진 돌멩이가 세라핀의 발치에서 쪼개졌다. 카엘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세라핀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의 검은 망토를 넓게 펼쳤다.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세라핀은 눈꺼풀 안쪽을 혀로 꾹 눌러 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광장을 지나 도착한 마왕궁은 거대한 가시들이 돋아난 성채 같았다. 그곳에는 칠죄 공작이라 불리는 마계의 권력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왕좌에 앉은 카엘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도 시선은 세라핀에게 고정했다. 탐욕의 공작이라 불리는 자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저 빛의 찌꺼기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를 묻고 싶군요."
공작의 목소리는 긁히는 금속음 같았다. 그는 세라핀의 쇄골에 새겨진 낙인을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세라핀은 옷깃을 여미는 대신 오히려 턱을 치켜들었다. 손등의 흉터가 구두 안쪽에서 파고드는 냉기만큼이나 시리게 타올랐다. 카엘은 대답 대신 공작의 발밑으로 짙은 마기를 뿜어냈다.
대리석 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부식되며 연기를 내뿜었다.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다른 이들의 야유는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 성녀가 마계의 공기를 더럽히고 있다며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카엘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나는 것을 본 세라핀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포로로 잡히기 위함이 아닙니다."
낮게 깔린 세라핀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마족들의 비웃음 섞인 웅성거림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그녀는 카엘의 옆에 나란히 서서 공작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공포로 인해 손끝이 차갑게 식었지만, 동작은 평소보다 정교하고 우아하게 유지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서 무너지면 지상의 아이들도, 자신도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계의 근원인 심연의 샘이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시겠습니까?"
세라핀의 지적에 좌중이 얼어붙었다. 심연의 샘은 마계 전체의 마력을 공급하는 젖줄과 같았다. 최근 몇 년 사이 그 샘이 오염되어 마족들의 수명이 줄어들고 있었다. 카엘이 성녀를 데려온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탐욕의 공작이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의 힘은 우리에게 독이다. 정화가 아니라 파괴를 부를 뿐이지."
"해보지도 않고 단정 짓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군요."
세라핀은 품 안에서 오리온에게 받은 검은 복음서를 꺼내 들었다. 그 책의 모서리에는 그녀의 본명인 이솔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책장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를 내뿜었다. 카엘의 눈동자가 세라핀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그는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곳을 정화한다면, 당신들의 갈증은 끝날 것입니다."
세라핀은 한 걸음 더 다가가 공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습니다."
카엘의 손이 세라핀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세라핀은 팔목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맥박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그녀가 선택한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지배받는 도구가 아닌, 세계의 균형을 쥐는 변수가 되는 것. 카엘은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잡았던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일행은 궁전 지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심연의 샘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무겁고 습해졌다. 바닥에는 정화되지 못한 마기가 끈적한 액체가 되어 고여 있었다. 세라핀의 구두가 그 액체에 닿을 때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심연의 샘 앞에 도착했을 때, 세라핀은 숨을 멈추었다. 한때 맑은 보랏빛이었을 샘물은 이제 썩은 늪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그 중심에서는 거대한 바위처럼 굳어버린 수호룡이 잠들어 있었다. 용의 비늘은 윤기를 잃고 회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주변에는 죽은 마족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었다.
"정말 할 수 있겠나?"
카엘의 목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공명했다. 세라핀은 대답 대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쇄골에서 시작된 낙인이 어느새 팔꿈치 근처까지 내려와 있었다.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낙인이 심연의 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와 반응하며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샘의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가운 수면 위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물에 닿기 직전, 세라핀은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신성력이라 불리던 빛의 힘과, 카엘에게서 받은 마독이 몸 안에서 기묘하게 뒤섞였다. 두 힘이 충돌하며 전신에 불이 붙은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녀는 입술을 짓이기며 비명을 삼켰다.
손가락 끝이 검은 물속으로 잠겼다. 2화에서 카엘의 손이 닿았을 때처럼, 피부가 순식간에 하얗게 변하며 정화의 빛이 번져나갔다. 빛은 세라핀의 손을 기점으로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썩어 문드러지던 샘물이 투명한 보랏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거대한 동굴 내부가 눈부신 광휘로 가득 찼다.
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불순물들이 증발하며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그것은 성국에서 맡았던 인위적인 향료가 아닌, 숲의 흙내음과 닮은 생명력의 냄새였다. 카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세라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신성력도, 마력도 아닌 완전한 제3의 힘이었다.
"아……."
세라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샘 전체로 번져나간 빛이 수호룡의 몸을 감쌌다. 굳어 있던 회색 비늘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며 은하수 같은 빛깔이 드러났다. 거대한 날개가 움츠러들었다가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동굴 전체가 거대한 심장 박동 소리로 진동했다.
잠들어 있던 수호룡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것은 생명체가 가질 수 없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눈동자였다. 세라핀은 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용의 황금빛 눈동자 속에 기묘한 환영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판데모니움의 풍경이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유리 건물이 가득했다. 매끄러운 아스팔트 위로 불빛을 내뿜는 쇠상자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전광판 속의 글자들은 세라핀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글이었다. 그녀가 살던 현대 서울의 밤거리가 수호룡의 눈동자 속에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세라핀의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듯한 통증을 내뱉었다. 그녀는 홀린 듯 용의 눈동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수호룡이 고개를 낮추며 세라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뜨거운 콧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용의 낮은 울음소리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네가 온 곳인가?"
카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는 세라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용의 눈동자 속 환영이 더욱 짙어지며 서울의 소음이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세라핀은 자신의 정체가 이토록 허망하게 드러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용의 콧등을 어루만졌다.
수호룡의 동공이 세라핀의 움직임에 맞춰 수축했다.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서울의 야경이 일렁이다가, 이내 한 사람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현대 복장을 한 세라핀 본인의 모습이었다. 환영 속의 그녀는 손에 낡은 성경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세라핀은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젖은 손바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수호룡은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앞발을 내디뎠다. 거대한 발톱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카엘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뒤로 끌어당겼다.
용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 사이로 푸른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괴의 불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거대한 회귀의 힘이었다. 세라핀은 카엘의 가슴팍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수호룡의 시선이 그녀를 꿰뚫을 듯 고정되었다.
"대답해라, 이방인."
수호룡의 목소리가 뇌를 직접 울렸다. 세라핀은 대답 대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엘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용의 눈동자 속 서울 풍경이 파편처럼 조각나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환영의 조각 하나가 세라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서 따끔한 통증과 함께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피가 바닥에 닿는 순간, 심연의 샘 전체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카엘은 세라핀을 안아 들고 뒤로 도약했다. 수호룡은 거대한 포효와 함께 천장을 향해 머리를 들이받았다.
"세라핀!"
카엘의 외침이 무색하게, 동굴 천장이 무너지며 쏟아져 내렸다. 세라핀은 자욱한 먼지 속에서 수호룡의 황금빛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용의 거대한 앞발이 그녀를 향해 덮쳐왔다. 세라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