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맥없이 흘러내렸다. 생명이라곤 허락되지 않은 땅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메마른 대지를 뚫고 올라온 새싹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세라핀은 홀린 듯 손을 뻗어 그 작은 잎사귀를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생경한 온기에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죽음의 땅에서 피어난 기적은 아름답기보다 기괴했다.
등 뒤에서 거친 파열음이 고요를 찢었다. 대기를 가르는 금속음과 함께 무거운 물체가 지면을 긁었다. 세라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욱한 먼지 구멍 사이로 익숙한 은색 갑옷이 보였다. 성기사단의 문장은 흙먼지에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투구 틈새로 흘러나온 핏방울이 검은 모래 위로 툭툭 떨어졌다.
오리온이었다. 추락의 충격으로 뒤틀린 갑옷을 끌며 그가 일어섰다. 꺽꺽거리는 숨소리가 폐부를 긁는 소리처럼 위태로웠다. 부러진 검날을 지팡이 삼아 버티는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을 냈다. 세라핀을 향한 집착인지, 아니면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발악인지 알 수 없었다.
카엘이 세라핀의 어깨를 감싸 쥐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짙은 마기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으며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카엘의 시선은 오리온의 목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명백한 살의였다. 그의 손가락 끝에 검은 번개가 가늘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만두세요. 세라핀이 카엘의 차가운 팔을 붙잡았다. 손바닥 아래로 단단한 근육의 떨림이 전해졌다. 카엘의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가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는 대답 대신 손에 힘을 주어 세라핀을 자신의 뒤로 밀어냈다.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의 모래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죽여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카엘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는 오리온의 부서진 갑옷 사이로 비치는 성휘를 혐오스럽다는 듯 노려보았다. 성국의 사냥개는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시체나 다름없었다. 카엘의 발치에서 검은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오리온의 발등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 기사는 성소에서 나를 도왔어요. 세라핀의 목소리가 떨림 없이 울렸다. 그녀는 카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오리온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카엘의 마기가 그녀의 옷자락을 사납게 할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9화의 그 난장판 속에서 오리온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카엘의 해방도 없었을 터였다.
카엘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세라핀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닿은 곳의 검은 낙인이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변하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세라핀은 신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고통은 선명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냐. 카엘이 조소 섞인 숨을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세라핀의 쇄골에 새겨진 낙인을 훑고 지나갔다. 신성력과 마독이 뒤섞인 불완전한 균형이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카엘은 오리온을 향해 뻗었던 그림자를 거두어들이지 않은 채 세라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동료로 삼을 거예요. 세라핀은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성국의 기사단장을 마왕의 수하로 부리는 것만큼 완벽한 모욕은 없었다. 교황이 그토록 신뢰하던 칼이 제 주인의 목을 겨누게 될 순간을 떠올렸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복수였다.
오리온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피 섞인 침을 뱉어낸 그가 세라핀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경외심인지, 아니면 무너진 신념에 대한 절망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부러진 검을 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는 성녀의 발치에 떨어진 푸른 새싹을 멍하니 응시했다.
기사님. 세라핀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카엘의 구속에서 벗어나 오리온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 모래가 신발 밑창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리온의 고개가 힘겹게 들렸다. 투구 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눈빛만은 기묘하게 맑았다.
그 검을 이제 교황이 아닌 저를 위해 휘두르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세라핀은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이 푸른빛을 머금으며 맥동했다. 공허의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리온의 동공이 세라핀의 손등을 따라 크게 흔들렸다.
오리온의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내뱉으려는 단어가 무엇인지 세라핀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부러진 검을 거두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항복의 의미이자 맹세의 시작이었다. 은색 갑옷의 파편이 모래 위로 흩어지며 무거운 소리를 냈다.
카엘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등 뒤로 솟구쳤던 마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주변에는 차가운 살의가 안개처럼 머물러 있었다. 그는 세라핀의 행동이 가져올 파장을 흥미롭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장난감을 다루는 아이를 지켜보는 어른의 시선이었다.
오리온이 상체를 숙여 세라핀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렸다. 기사로서 바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였다. 그의 호흡이 점차 안정되면서 갑옷 안쪽에서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성휘와는 다른, 어둡고 눅눅한 기운이었다. 세라핀은 의아함을 느끼며 그의 가슴팍으로 시선을 옮겼다.
부서진 흉갑 틈새로 검은 가죽 뭉치가 보였다. 오리온이 몸을 숙일 때마다 그것은 품 안에서 밀려 나와 모래 위로 미끄러졌다. 세라핀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은 가죽의 질감이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웠다. 그것은 9화에서 교황이 떨어뜨렸던 검은 복음서였다.
서늘한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세라핀은 숨을 멈춘 채 낡은 가죽 표지를 어루만졌다. 성국에서 금기시하는 저주받은 서적이라 들었다. 왜 이것이 오리온의 품에 있는지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녀는 홀린 듯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렸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로 잉크 자국이 선명했다. 세라핀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곳에는 이 세계의 공용어도, 고대어도 아닌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사용하던 언어였다.
[이솔]
또박또박 적힌 자신의 본명이 한글로 종이 위를 수놓고 있었다. 세라핀은 손가락 끝으로 그 글자를 천천히 훑었다. 심장 박동이 고막을 때리는 소리가 들릴 듯 선명했다. 이 이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 책이 왜 오리온에게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오리온의 뒷덜미로 향했다.
오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라핀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핏방울이 맺힌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세라핀은 손에 쥔 복음서를 꽉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고요한 사막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오리온이 내뱉은 말은 세라핀의 모든 전제를 무너뜨렸다. 카엘의 그림자가 다시 길게 뻗어 오리온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나 세라핀은 그를 제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복음서의 다음 장에 적힌 문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아는 이 세계의 결말이 아닌, 전혀 다른 미래가 기록되어 있었다.
오리온의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마독에 오염된 것이 아니었다. 책에서 흘러나온 검은 잉크가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 하나 없이 세라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영혼 안쪽까지 들여다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카엘이 성큼 다가와 세라핀의 손에서 책을 뺏어 들었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세라핀은 저항하지 않았다. 카엘은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낙서로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세라핀에게 그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진실이었다.
오리온이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뻗어 세라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장갑 끝에 묻은 핏자국이 하얀 사제복을 붉게 물들였다. 세라핀은 차마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의 뇌리에 이 세계에 빙의하던 첫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당신의 성경입니까?"
세라핀의 물음에 오리온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 보였다. 복음서의 잠금장치와 일치하는 문양이었다. 그는 열쇠를 세라핀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사막의 차가운 바람이 세 사람 사이를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세라핀은 손바닥 위의 열쇠를 꽉 쥐었다. 금속의 차가운 촉감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카엘의 서늘한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이 신인지, 아니면 눈앞의 기사인지조차 불분명해졌다.
오리온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는 세라핀의 귀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작게 속삭였다. 카엘의 그림자가 그의 목을 조여오는 순간에도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다음 장을 넘겨보시겠습니까, 이솔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