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비릿한 탄내가 코끝을 찔렀다.
부서진 대리석 조각들이 사방에서 매연을 뱉어냈다.
하늘은 더 이상 신성한 청색이 아니었다.
무너져 내린 부유도 아르카디아의 잔해가 쏟아졌다.
유성처럼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궤적이 붉었다.
등 뒤로 서늘한 밤공기가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성국 엘리시온의 기후와는 전혀 다른 혹독한 추위였다.
세라핀은 손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 사이로 거친 모래알이 사각거리며 섞여 들었다.
검은 사막.
마계 제르노스의 국경지대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 멀리 수평선 끝에서 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평생을 바쳐 기도하던 백색의 탑이 무너지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해방감이 솟구쳤다.
교황의 눈치를 보며 순결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기도문을 외우느라 헐어버린 혀끝이 따끔거렸다.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이 아닌 인간으로 숨을 들이켰다.
공기 중에 섞인 마기가 폐부를 찔렀으나 달콤했다.
그것은 독하면서도 서늘한 자유의 맛이었다.
모래를 밟는 규칙적이고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라핀은 고개를 돌려 짙은 어둠 속을 응시했다.
카엘 드 제르노스가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의 뺨에는 성소의 잔해에 긁힌 핏자국이 선명했다.
금색 눈동자가 달빛 아래서 짐승처럼 번뜩였다.
그는 세라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바닥 위로 마계의 냉기가 형체처럼 서렸다.
카엘의 시선은 세라핀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검게 타오르던 낙인이 그의 기운에 반응하며 떨렸다.
그가 입술을 열자 낮고 거친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성국은 끝났어."
그의 말대로였다.
구름 위에서 빛나던 낙원은 이제 지상의 거름이 되었다.
세라핀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낙인이 심장을 옥죄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카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너는 마왕의 반려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네가 선택한 파멸의 대가라는 말이 이어졌다.
목소리에는 소유욕보다 냉정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세라핀은 마른 헛웃음을 입안으로 삼켰다.
눈꺼풀 안쪽을 혀로 누르며 요동치는 감정을 짓눌렀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세우고 그를 마주 보았다.
반려라는 단어가 주는 안락함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타인의 손에 휘둘리는 인형이 되는 것도 사양이었다.
"카엘, 당신은 지금 착각하고 있어."
세라핀의 목소리가 바닥을 굴러가듯 낮게 깔렸다.
그녀는 장갑을 벗어 던지고 손등의 흉터를 드러냈다.
교회가 낙인을 가리기 위해 강제로 새겼던 화상이었다.
상처가 달빛을 받아 흉측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 성녀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카엘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지며 그림자가 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세라핀의 어깨를 쥐었다.
강한 완력에 어깨뼈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야."
원래의 세라핀은 죽고 당신은 세상을 멸망시켰을 터였다.
카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손등의 뼈가 도드라졌다.
그의 혼란스러운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세라핀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고정했다.
빙의라는 단어 없이도 이질감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의 부속품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녀는 카엘의 가슴팍을 밀쳐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당신의 도구도, 신의 인형도 아니야."
이 이야기의 끝을 쓰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
선언과 동시에 낙인이 발작하듯 뒤틀리며 타올랐다.
신을 부정하고 의지를 드러낸 것에 대한 형벌이었다.
전신을 난도질하는 통증에 세라핀의 무릎이 꺾였다.
비명이 터지기 직전 강한 온기가 전신을 감싸 안았다.
카엘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지는 마독이 성휘와 거칠게 충돌했다.
치익 소리와 함께 희뿌연 연기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두 힘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기묘한 진동이 일었다.
세라핀은 경련하던 몸을 늘어뜨리며 눈을 크게 떴다.
고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감각이 돌아왔다.
단순히 통증이 억제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카엘의 마력이 닿는 곳마다 낙인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찾은 듯 기운이 서로 엉켰다.
카엘의 눈동자에도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는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을 응시했다.
성휘도 마독도 아닌 생경한 제3의 힘이었다.
공허의 불꽃.
세계를 지탱하던 두 축이 무너지는 신호였다.
카엘의 시선이 세라핀의 젖은 입술로 내려앉았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세라핀 역시 그의 고동을 느끼며 숨을 멈췄다.
서로가 독이자 해독제라는 사실을 육체가 먼저 알았다.
계약 그 이상의 무언가가 두 사람을 단단히 묶었다.
"이것이 네가 말한 새로운 결말인가."
그는 세라핀의 턱끝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냉정하던 눈빛에 형언할 수 없는 열기가 감돌았다.
세라핀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팔로 감싸 안았다.
차가운 사막의 바람도 이 순간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파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성녀의 기도는 아르카디아의 추락과 함께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마왕과 써 내려갈 금지된 복음이었다.
세라핀은 카엘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맞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다 자신의 온기를 얽으며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문양이 공명하며 비명을 질렀다.
세라핀의 목덜미에서 눈부신 백색 광휘가 뿜어졌다.
빛은 동심원을 그리며 어두운 사막을 파도처럼 덮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파편들이 빛에 닿아 먼지로 화했다.
발밑의 검은 모래가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메마른 땅을 뚫고 선명한 푸른 새싹들이 돋아났다.
죽음의 땅에 생명의 기적이 강제로 이식되고 있었다.
광휘는 점점 거세지며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세라핀은 눈부심에 고개를 돌리다 숨을 들이켰다.
추락한 부유도의 잔해 사이로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은색 갑옷이 처참하게 부서진 남자가 서 있었다.
성기사단장 오리온이 핏물 섞인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응시했다.
검은 사막을 뒤덮은 푸른 물결이 그의 발등을 적셨다.
오리온의 손에서 힘없이 검이 떨어져 모래에 박혔다.
그는 무너지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입술이 경련하며 세라핀의 이름을 부르려 달싹였다.
세라핀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카엘의 손을 쥐었다.
"이것이 당신이 지키려던 세계의 끝이야, 오리온."
오리온의 눈동자가 세라핀의 손등으로 향했다.
장갑이 벗겨진 채 카엘과 깍지를 낀 그 손이었다.
성녀의 손등에 새겨진 흉터가 푸른 빛을 받아 빛났다.
오리온은 떨리는 손을 뻗어 모래 바닥을 긁어내렸다.
그의 손톱 밑으로 검은 모래와 푸른 싹이 뒤섞였다.
세라핀은 카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자애로운 성녀의 미소가 아닌 잔혹한 선언이었다.
카엘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오리온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금안에는 패배자를 향한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오리온의 고개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성녀님, 제발……."
그의 애원 섞인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세라핀은 그 소리를 뒤로한 채 카엘과 발을 옮겼다.
푸른 싹이 돋아난 자리에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마계의 독기와 성녀의 신성력이 빚어낸 괴이한 풍경이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아르카디아의 파편이 비처럼 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걷는 길 위로는 단 하나의 돌도 떨어지지 않았다.
공허의 불꽃이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어 그들을 감쌌다.
세라핀은 카엘의 어깨에 실린 무게감을 기꺼이 즐겼다.
지옥 같은 사막이 이제는 그들의 낙원이 될 터였다.
카엘이 걸음을 멈추고 세라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가 목덜미에 닿았다.
보랏빛으로 변한 낙인이 그의 지문 아래서 맥동했다.
그는 세라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낮게 울리는 진동이 세라핀의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이제 돌아갈 곳은 없다, 세라핀."
그녀는 카엘의 옷자락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곳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도, 성녀로 길러진 곳도 집은 아니었다.
오직 이 황폐하고 거친 남자의 품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세라핀은 그의 목을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카엘의 팔이 그녀의 등을 부서뜨릴 듯 강하게 압박했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하나로 겹쳐 사막에 울려 퍼졌다.
오리온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절규했다.
그의 비명은 무너지는 성소의 굉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세라핀은 눈을 감고 카엘의 체온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코끝에 감도는 마독의 냄새가 이제는 향기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카엘의 입술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는 것을 느꼈다.
낙인이 새겨진 자리에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정화의 의식이 아닌 소유의 낙인이었다.
세라핀은 희열에 젖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두 사람을 감싼 푸른 불꽃이 거대한 기둥이 되어 솟구쳤다.
밤하늘의 구름을 찢고 우주까지 닿을 듯한 기세였다.
그 불꽃 아래서 성녀와 마왕은 서로를 집어삼킬 듯 탐했다.
멀리서 성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살아남은 자들이 성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오리온은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검을 다시 쥐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구원이 아닌 재앙이었다.
푸른 꽃밭 한가운데서 마왕과 입을 맞추는 성녀의 모습.
그것은 천 년을 이어온 성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광경이었다.
오리온의 눈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마지막 남은 성휘를 끌어올렸다.
"성녀님을 놓아줘라, 이 더러운 마물아!"
오리온의 외침이 사막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카엘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눈동자만 돌려 그를 보았다.
금색 눈동자에 서린 조소와 멸시가 오리온을 관통했다.
세라핀은 카엘의 품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 입을 열었다.
"오리온, 당신의 신은 이미 죽었어."
그녀의 말과 동시에 카엘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불꽃은 화살처럼 날아가 오리온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오리온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의 은색 갑옷이 푸른 불꽃에 녹아내리며 검게 변했다.
세라핀은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방해꾼은 사라졌고 오직 두 사람만의 시간이 남았다.
카엘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올리며 마계의 심장부로 향했다.
성국의 몰락은 이제 시작이었고 그들의 전설 또한 시작이었다.
세라핀은 카엘의 품에 안긴 채 멀어지는 성국을 보았다.
불타는 아르카디아가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며 추락했다.
그녀는 카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데려가 줘, 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