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휘의 파편이 비산하는 제단 위로 비명이 쏟아졌다. 교황 카스틸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뒤틀렸다. 성녀의 심장을 꿰뚫어야 할 의식용 단검이 그녀의 가슴팍에 닿기도 전이었다. 세라핀의 흰 살결 위로 검게 죽어 있던 낙인이 돌연 보랏빛 섬광을 내뿜으며 요동쳤다.
은침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심장 근처를 훑었다. 제단 위에 고인 성수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교황의 비명이 고막을 찔렀다. 타버린 살점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공기가 비릿한 연기로 가득 찼다.
이게 무슨 일이지. 교황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세라핀의 몸에서 터져 나온 보랏빛 불꽃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카스틸로의 오른팔을 휘감았다. 치익, 고기가 타는 불쾌한 냄새와 함께 백색 법복이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노인은 단검을 떨어뜨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지독한 화상 자국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성소 전체를 짓누르던 결계의 파동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세라핀은 숨을 들이켜며 제단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는 대리석이 차갑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힘은 신성력도, 마력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로 쓰는 공허의 파괴력이었다.
카엘을 억누르던 신성 구속구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연기 속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그림자가 거대하게 늘어났다. 등 뒤로 솟아오른 칠흑 같은 날개가 성소의 벽화를 찢어발겼다. 카엘 드 제르노스, 마왕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안광이 붉게 타오르며 제단 위를 휩쓸었다.
세라핀.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성소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을 묶었던 사슬 파편을 털어내며 세라핀에게 다가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갔다. 살아남은 사제들은 겁에 질려 구석으로 몸을 피했고, 성기사들은 뒤늦게 검을 뽑아 들었다.
마왕을 처단하라. 성녀를 보호하기는커녕 저 이단자를 죽여라. 카스틸로의 악에 받친 명령이 떨어졌다. 성기사단장 오리온 크레스트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의 검 끝이 카엘의 심장을 겨눴다. 은색 갑옷에 반사된 보랏빛 불꽃이 기괴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오리온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그의 시선은 마왕이 아닌, 그 곁에 선 세라핀을 향하고 있었다.
세라핀은 비틀거리는 몸을 곧게 세웠다. 헝클어진 은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더 이상 자애로운 성녀의 빛이 없었다. 그녀는 장갑을 벗어 던졌다. 흉터가 가득한 손등 위로 보랏빛 불꽃이 일렁였다.
물러나, 오리온.
목소리는 낮았으나 성소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오리온의 검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세라핀의 눈에서 자신이 알던 성녀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오직 차가운 결의뿐이었다.
성녀님,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저 마물은 당신을 파멸로 이끌 겁니다. 오리온이 한 걸음 다가오며 검을 고쳐 쥐었다.
파멸은 이미 너희의 신이 내렸다. 내가 지키려 했던 이 세계가 어떤 시체들 위에 세워졌는지,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세라핀의 물음에 오리온은 답하지 못했다. 그는 성국 엘리시온의 영광 뒤에 숨겨진 하층 도시 루인스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성수로 정화되는 귀족들의 식탁 아래에서, 썩어가는 공기를 마시며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아왔다.
성기사들이 카엘을 에워싸며 좁혀 들어왔다. 카엘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검은 안개가 사나운 파도처럼 기사들을 덮치려 했다. 세라핀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오리온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길을 비켜라. 이것은 성녀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자, 세라핀 이솔로서 건네는 제안이다.
오리온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검 끝이 향한 곳은 카엘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교황청 소속 사제들과 하급 기사들이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성소에 비명처럼 울렸다.
단장.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부관의 외침에 오리온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나는 신을 지키는 기사이지, 살인마의 개가 아니다.
그의 선언과 함께 성소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오리온의 배신에 당황한 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카엘의 마력이 폭발했다. 검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뻗어 나가 기사들의 무기를 쳐내고 바닥을 뒤집어엎었다. 세라핀은 그 혼돈의 중심에서 카엘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도 뜨거운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두 사람의 마력이 섞이는 지점마다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공허의 불꽃이었다. 성소의 기둥들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대리석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쓰러진 교황 카스틸로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낡고 해진 가죽 표지의 책이었다. 그것은 성국의 경전에 기록되지 않은, 금지된 기록들이 담긴 검은 복음서였다. 책장이 펄럭이며 넘어가자 그 안에는 성녀의 계보가 아닌, 제물로 바쳐진 소녀들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세라핀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외면했다. 지금은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천장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구름 위의 도시 아르카디아를 지탱하던 결계가 완전히 소멸한 증거였다. 카엘이 세라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거대한 날개가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잡아라, 세라핀. 이제 돌아갈 곳은 없다.
카엘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바닥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성소의 잔해와 비명 지르는 사제들이 발밑으로 멀어졌다. 부서진 천장 너머로 차가운 밤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은빛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흩날렸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세라핀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지상, 빛조차 닿지 않던 비탄의 계곡에서 거대한 검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마기의 폭주가 아니었다. 대지 자체가 뒤틀리며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성국의 결계가 사라진 틈을 타, 천 년 동안 억눌려 왔던 세계의 근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세라핀은 카엘의 어깨 너머로 그 장엄하고도 끔찍한 재앙을 바라보았다. 지상의 숲이 검게 타들어가고,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는 광경이 망막에 새겨졌다. 그것은 예언에 없던, 진정한 종말의 시작이었다.
보이나, 우리가 연 문이다.
카엘의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들려왔다. 세라핀은 그의 날개짓에 몸을 맡긴 채 손등의 흉터를 꾹 눌렀다. 고통은 선명했고 현실은 잔혹했다. 부유도 상층부의 화려한 궁전들이 하나둘 무너지며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성녀를 잃은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르카디아의 엔진이 멈추고 거대한 대륙의 파편이 허공을 갈랐다. 세라핀은 비명을 삼키며 카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들의 등 뒤로 성소가 완전히 폭발하며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저 아래에 사람들이 있어. 세라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의 발로 서야 할 거다. 카엘이 날개를 펼치며 더 높은 곳으로 활공했다.
추락하는 부유도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지상에서 올라온 마물들이 성국의 기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비명과 금속음이 뒤섞인 소음이 구름 위까지 닿았다. 세라핀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제 그녀가 알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멈췄다. 대신 대지를 가르는 거대한 파열음이 세상을 지배했다. 카엘은 지상을 향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마계 제르노스의 심장부였다.
하지만 그들의 비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거대한 빛의 창이 카엘의 왼쪽 날개를 꿰뚫었다.
크윽.
카엘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다. 세라핀은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빛의 창이 박힌 자리에서 성휘의 불꽃이 타오르며 마력을 갉아먹었다. 추락의 속도가 빨라졌다.
누구냐. 카엘이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성소의 잔해 위, 황금빛 갑옷을 입은 남자가 공중에 떠 있었다. 제국 베르사유의 황제, 루드비히였다. 그의 손에는 성녀의 힘을 강제로 추출해 만든 인공 성물이 들려 있었다.
이단자들에게 신의 심판을.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그가 다시 한번 빛의 창을 치켜들었다. 세라핀은 카엘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보랏빛 불꽃이 다시금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방어가 아니었다. 파괴를 위한 맹렬한 기세였다.
내가 막을게. 세라핀이 카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죽고 싶은 거냐. 카엘의 물음에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니, 살고 싶은 거야. 세라핀은 카엘의 품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이 중력을 따라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등 뒤에서 카엘의 경악 섞인 외침이 들렸지만 세라핀은 멈추지 않았다. 추락하는 도중 그녀의 전신에서 보랏빛 광채가 폭발했다. 그것은 성녀의 희생이 아닌, 성녀라는 굴레를 부수는 해방의 빛이었다.
루드비히가 던진 빛의 창이 세라핀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세라핀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창을 향해 손을 뻗어 날카로운 끝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전신을 훑었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이 힘은 더 이상 당신들의 것이 아니야.
세라핀의 외침과 함께 빛의 창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산산조각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며 황제의 방어막을 타격했다. 루드비히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카엘이 급강하하여 떨어지는 세라핀을 낚아챘다. 그는 부서진 날개를 퍼덕이며 그녀를 품에 안고 검은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뒤이어 거대한 폭발음이 하늘을 뒤덮었다.
세라핀은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카엘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뛰는 그 박동이 그녀의 유일한 이정표였다. 그들은 구름을 뚫고 지상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온통 검은 이끼와 기괴한 식물들로 가득했다. 비탄의 계곡 바닥이었다. 카엘은 피를 흘리며 나무 밑동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의 왼쪽 날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괜찮아? 세라핀이 비틀거리며 다가가 그의 상처를 살폈다.
네 걱정이나 해라. 카엘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세라핀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보랏빛 액체를 그의 상처에 문질렀다. 공허의 힘이 닿자 타들어 가던 성휘의 흔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카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정화가 아니야. 소멸이지. 카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맞아. 우린 이제 신의 은총도, 마왕의 저주도 필요 없어. 세라핀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붉은 안광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계의 괴생명체들이 성녀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것이었다. 카엘은 부러진 검을 짚고 일어서려 했으나 다시 주저앉았다.
도망쳐라, 세라핀. 여기선 내 힘도 온전치 않다.
세라핀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몰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등의 흉터가 다시금 보랏빛으로 달아올랐다.
오지 마.
그녀의 짧은 명령과 함께 보랏빛 파동이 숲 전체를 휩쓸었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재로 변해 사라졌다. 숲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세라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카엘을 돌아보았다.
카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떨림이 세라핀의 가슴까지 전달되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지.
세라핀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글쎄. 신이 버린 성녀, 아니면 마왕을 살린 재앙일까.
그녀의 말에 카엘이 실소하며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겼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제부터 네가 가는 길이 내 영토다.
카엘이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