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여자는 낯선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순백의 비단이 살가죽을 옥죄듯 감싸 내려왔다.
진주가 박힌 코르셋은 갈비뼈를 눌러 숨통을 조였다.
하얗게 분을 바른 얼굴은 생기 없는 석고상 같았다.
세라핀은 화장대 위에 놓인 연분홍색 연고를 펐다.
목덜미와 쇄골에 남은 푸르스름한 흔적 위로 덧칠했다.
마왕의 침실에서 돌아온 흔적은 이내 자취를 감췄다.
가릴 수 없는 것은 피부 아래에 도사리고 있었다.
장갑을 벗은 왼손 등 위로 은색 문양이 뒤틀렸다.
카엘과 접촉할 때마다 낙인은 성휘보다 강한 빛을 냈다.
피부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위액이 역류하는 감각에 그녀는 급히 장갑을 끼웠다.
금사로 수놓아진 가죽이 부정한 흔적을 덮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백합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성국에서 백합은 순결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세라핀에게는 죽은 자를 위한 조화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성수병 속에는 달콤한 독기가 서렸다.
그녀는 병을 들어 화분 바닥에 남김없이 쏟았다.
검게 타들어 가는 이파리가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시녀들이 다가와 면사포를 머리 위에 고정했다.
얇은 천 너머의 세상은 온통 뿌연 안개 속이었다.
방을 나서자 복도 양옆으로 성기사들이 정렬했다.
갑옷이 부딪히는 서늘한 금속음이 고막을 긁었다.
중심에는 성기사단장 오리온 크레스트가 서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차가운 눈으로 세라핀을 훑었다.
품 안에는 그녀가 떨어뜨렸던 장갑이 들어있을 터였다.
오리온의 시선이 그녀의 왼손 끝에 끈덕지게 머물렀다.
세라핀은 장갑 낀 손을 소매 안으로 깊게 밀어 넣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성소 중앙 홀로 향하는 길은 아득할 정도로 멀었다.
벽면에 새겨진 역대 성녀들이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천 장 너머로 들려오는 환호가 지진처럼 바닥을 울렸다.
백야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공기를 찢어발겼다.
교황 카스틸로는 제단 꼭대기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황금 지팡이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였다.
세라핀은 계단을 오르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어 통증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신도들의 시선이 수천 개의 화살처럼 몸에 박혔다.
그들은 성녀의 축복을 갈구하며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
누구도 살결 아래 마왕의 낙인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제단 위에 서자 부유도 전체가 발아래로 펼쳐졌다.
하늘은 맑았으나 공기는 비정상적으로 무거웠다.
세라핀은 신도들을 향해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성휘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가슴 중앙이 무거웠다.
신성력은 이미 마독과 뒤섞여 기괴하게 변질되었다.
억지로 자아낸 빛은 희미한 보랏빛을 띠며 일렁였다.
교황의 지팡이가 대리석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둔탁한 파열음이 광장의 소음을 단칼에 베어냈다.
군중의 환호가 일순간 잦아들고 서늘한 정적이 왔다.
카스틸로의 눈동자가 세라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자애로운 미소가 비릿하게 뒤틀렸다.
성스러운 백야의 축제에 앞서 신의 명을 전하노라.
교황의 목소리가 마법을 빌려 광장 전체로 퍼졌다.
성녀가 부정한 기운에 노출되었다는 신탁이 내려졌다.
세라핀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예정된 식순에는 존재하지 않던 잔혹한 선포였다.
교황의 손짓에 맞춰 성기사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들은 거칠게 세라핀의 팔을 붙잡아 중앙으로 끌었다.
차가운 금속 고리가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고정했다.
사람들의 당혹스러운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성혈 정화 의식을 지금 이 자리에서 거행하겠다.
교황의 선언에 세라핀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정화 의식은 신체의 피를 갈아치우는 고문이었다.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광기였다.
그녀는 도망치려 했으나 사지는 이미 묶여 있었다.
오리온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미동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연민보다 차가운 확신이 서려 있었다.
이 축제는 장례식이 되겠지만 혼자 죽지는 않으리라.
세라핀은 이를 악물며 카스틸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교황은 대답 대신 날카로운 성검을 꺼내 들었다.
검신에 새겨진 신성 문자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단 아래 바닥이 거칠게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불길한 진동이 치고 올라왔다.
무거운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성소 전체를 울렸다.
사제들이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뒤로 물러났다.
갈라진 틈 사이로 검은 연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연기 속에서 처참한 형색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엘 드 제르노스가 피 냄새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의 온몸은 채찍질 자국으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사지에는 신성을 억제하는 사슬이 살점을 파고들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 위로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세라핀을 바라보며 처참하게 웃었다.
마왕의 등장은 광장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신도들은 겁에 질려 서로를 짓밟으며 달아나기 바빴다.
교황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부정한 존재를 멸하고 성녀를 구원할 기회로다.
카스틸로의 외침과 동시에 성검이 심장을 향했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광적인 탐욕과 비틀린 신념이었다.
세라핀의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었다.
은색 낙인이 장갑을 뚫고 나올 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핏빛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잎들이 마른 낙엽처럼 떨어졌다.
황금빛 잎사귀들은 땅에 닿기 전에 검게 바스러졌다.
대기를 정화하던 기운이 냉각되며 서리가 내렸다.
머리 위 허공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굉음이 터졌다.
아르카디아를 지탱해 온 결계에 거대한 균열이 갔다.
푸른 하늘 위로 거미줄 같은 금이 사방으로 뻗었다.
결계 조각들이 불타는 운석처럼 지상을 향해 쏟아졌다.
세라핀의 시야가 붉은빛과 백색 광휘로 번쩍였다.
교황의 칼날이 그녀의 옷깃을 스치며 살갗을 베었다.
잘린 비단 사이로 검은 피가 한 방울 튀어 나갔다.
바닥에 닿은 피는 대리석을 순식간에 부식시켰다.
카엘의 눈동자에 깃든 마기가 사슬을 휘감았다.
그는 꺾인 무릎을 일으키며 세라핀에게 손을 뻗었다.
무너져 내리는 성소의 잔해 사이로 비명이 묻혔다.
교황이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고 목을 겨눴다.
세라핀은 비명 대신 내면에 잠든 공허를 불러냈다.
결계가 파괴되는 소리는 세계의 종말과도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며 부유도가 지상을 향해 기울어졌다.
교황의 손이 경직된 듯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세라핀의 가슴을 뚫어야 할 성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보랏빛 불꽃을 냈다.
불꽃은 교황의 성검을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번졌다.
카스틸로가 비명을 지르며 타오르는 검을 내던졌다.
성소 바닥에 닿은 불꽃은 꺼지지 않고 대리석을 삼켰다.
세라핀의 팔을 묶었던 금속 구속구가 맥없이 녹았다.
자유로워진 손을 뻗어 그녀는 공중의 불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열기는 고통보다 해방감을 주었다.
카엘의 사슬 역시 푸른 불꽃에 닿아 가루가 되었다.
그가 휘청이며 다가와 세라핀의 어깨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마력이 맞물리자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성소 지하실에서부터 거대한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제3의 힘이 광장을 휩쓸었다.
교황은 일그러진 얼굴로 성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이단이다, 저 악마와 계집을 당장 죽여라.
오리온 크레스트가 검을 뽑으며 군중 사이를 갈랐다.
그의 눈은 여전히 세라핀의 왼손 낙인을 쫓고 있었다.
세라핀은 카엘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을 혀로 누르며 그녀는 낮게 읊조렸다.
이그드라실의 마지막 잎새가 그녀의 발치에 떨어졌다.
무너지는 제단 뒤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도, 마족의 형상도 아니었다.
성국이 천 년간 숨겨온 금기된 복음의 실체였다.
오리온이 세라핀의 코앞까지 다가와 검을 내리쳤다.
카엘이 남은 힘을 쥐어짜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검날이 카엘의 어깨를 깊게 베어내며 선혈이 튀었다.
하지만 그는 신음조차 내뱉지 않고 오리온을 노려봤다.
세라핀의 손등에서 뿜어져 나온 보랏빛 연기가 짙어졌다.
연기는 성소 전체를 뒤덮으며 시야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교황의 보물창고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곳에서 굴러 나온 것은 성녀의 유해가 아니었다.
마석 라피스로 가공된 수천 개의 마족 심장이었다.
비탄의 계곡에서 죽어간 자들의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세라핀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진실을 마주했다.
성국이 누려온 번영은 마계의 고혈을 짠 대가였다.
카엘이 그녀의 귓가에 낮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입술이 귀 끝에 닿으며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이게 당신이 지키려던 세계의 진짜 얼굴이야."
세라핀은 대답 대신 카엘의 피 묻은 손을 마주 잡았다.
낙인이 새겨진 살과 살이 맞닿자 섬광이 폭발했다.
성소의 천장이 완전히 붕괴하며 하늘이 통째로 열렸다.
부유도 아르카디아는 더 이상 하늘에 머물 수 없었다.
거대한 섬 자체가 지상의 비탄의 계곡으로 추락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낙하 감각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멀어지는 교황의 비명과 오리온의 경악 어린 시선.
세라핀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카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등에서 피어난 공허의 불꽃이 날개가 되었다.
결계가 사라진 지상의 마기가 부유도를 향해 몰아쳤다.
천 년의 거짓이 무너지는 소리가 대륙을 뒤흔들었다.
바닥에 닿기 직전, 카엘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안았다.
"죽지 마, 세라핀."
그의 목소리를 끝으로 거대한 충격이 전신을 덮쳤다.
자욱한 먼지와 검은 연기가 사방을 집어삼켰다.
추락한 아르카디아의 잔해 위로 붉은 비가 내렸다.
세라핀은 피 냄새 섞인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손등의 낙인은 이제 검은색도 은색도 아니었다.
투명하게 비치는 살결 아래로 푸른 혈관이 박동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제단 조각을 짚었다.
멀리서 무장한 성기사들의 발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살아남은 사제들이 저주를 퍼부으며 그녀를 에워쌌다.
그들 뒤로 먼지를 털어내며 오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세라핀의 찢어진 면사포가 들려 있었다.
오리온은 잘린 면사포를 바닥에 짓이기며 입을 열었다.
"성녀는 죽었다, 이곳에는 이단만이 남았을 뿐."
세라핀은 입가에 고인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녀의 시선이 오리온의 등 뒤, 어둠 속에 멈췄다.
그곳에서 카엘이 그림자를 두른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리키며 기괴하게 미소 지었다.
성녀의 손등에 있던 낙인이 그의 심장 위로 옮겨가 있었다.
오리온이 경악하며 검을 고쳐 잡았을 때였다.
추락한 부유도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았다.
기둥 안에서 천 년 전 사라졌던 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축복이 아닌, 명백한 파멸의 선고였다.
세라핀은 카엘의 손을 잡고 빛의 심연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