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울리는 구둣발 소리는 규칙적이라 더 위협적이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는 금속의 마찰음이 지하 봉인실의 정적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세라핀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으나 허파로 스며든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기사들의 거친 숨소리가 문 너머까지 육박했을 때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덮쳤다.
카엘의 단단한 팔이 세라핀의 허리를 낚아채 제 가슴팍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훅 끼쳐오는 서늘한 마기가 전신을 옭아매더니 이내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이 두 사람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지워버렸다. 살갗에 닿는 기운은 기분 나쁠 정도로 서늘했지만 기묘하게도 그 안쪽은 고요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카엘의 체온은 그녀가 평생을 바쳐온 성소의 온기보다 훨씬 선명했다. 세라핀은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누르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은 느리고 일정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사소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듯한 오만한 박동이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횃불의 일렁이는 빛이 방 안을 헤집었다. 은색 갑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성기사들이 들이닥쳤고 그 선두에는 오리온이 서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텅 빈 봉인실의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세라핀은 그의 시선이 장막을 스칠 때마다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사들이 든 횃불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름 타는 냄새가 신성한 성소의 공기와 뒤섞여 비릿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오리온은 허리춤에 찬 검자루를 꽉 쥔 채 제단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그의 구두 굽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세라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카엘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괜찮다는 위로보다는 움직이지 말라는 서늘한 경고에 가까운 압력이었다. 하지만 그 강압적인 손길 아래에서 세라핀은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어두운 지하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는 것은 신성한 기도문이 아니라 마왕의 비늘 같은 단단한 품이었다.
오리온이 걸음을 멈춘 곳은 불과 두 걸음 앞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카엘이 펼쳐놓은 환각 마법은 빈틈이 없었으나 오리온의 감각은 짐승처럼 예민했다. 그는 코끝을 실룩이며 공기 중에 남은 미세한 마독의 잔향을 쫓았다. 세라핀은 폐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숨을 참았다.
기사 한 명이 주변을 살피다 오리온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짤막하게 이어졌다. 오리온은 대답 대신 바닥을 가득 채운 푸른 불꽃의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결계석이 파괴된 자리에는 여전히 공허의 힘이 남긴 검은 그을음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오리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장갑 끝이 마독에 닿아 검게 변색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공포가 아니라 기묘한 확신이었다. 세라핀은 그 표정을 보며 손등의 흉터를 손톱 끝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카엘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지만 그가 내뱉는 언어는 서늘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마왕의 낮은 진동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내려가 발끝까지 전해졌다. 세라핀은 그 소름 돋는 감각을 견디기 위해 카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은 더 이상 신의 영토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오직 세라핀에게만 허락된 비밀처럼 고요했다. 환각의 장막 안에서 카엘의 눈동자는 붉은 보석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성녀의 얼굴을 탐닉하듯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세라핀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를 억눌렀다.
"신이 버린 나를, 마왕이 구하다니 정말 우스운 이야기네요."
그녀의 자조 섞인 속삭임에 카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그것은 비웃음이었을까 혹은 이름 모를 동질감이었을까. 그는 세라핀의 턱끝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마력이 뒤섞이며 희미한 푸른 빛이 일렁였다.
오리온은 여전히 제단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뒤에 선 기사들이 초조한 듯 발을 굴렀지만 단장인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먼저 나갈 수 없었다. 지하의 습한 공기가 피부를 짓눌러왔다.
이윽고 오리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장갑에 묻은 검은 재를 털어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렸다. 기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라핀은 멀어지는 기사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카엘은 장막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오리온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세라핀을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더 힘을 주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차가운 벽면의 감촉이 등에 닿자 세라핀의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그 기사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카엘의 단정적인 말에 세라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카엘의 환각 마법은 완벽했고 오리온은 분명 빈 방임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카엘의 확신에 찬 눈빛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세라핀의 심박수가 다시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오리온은 계단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는 뒤따라오던 기사들을 먼저 올려보낸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봉인실 내부를 다시 한번 조망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세라핀과 카엘이 숨어 있던 어두운 구석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터였지만 그의 눈은 정확히 그곳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닥으로 다가갔다. 어둠의 장막이 걷힌 자리에 놓인 하얀 물체가 횃불 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세라핀이 도망치듯 이곳으로 내려오며 떨어뜨린 순결의 예복용 장갑이었다. 정교한 레이스가 달린 장갑 한 짝이 비참하게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오리온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갑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이질적이었다. 그는 장갑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코끝을 가져다 댔다. 성녀 특유의 은은한 백합 향기와 마왕의 지독하고 서늘한 마독 향이 한데 뒤섞여 그의 폐부를 찔렀다.
장갑을 쥐어짜는 오리온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는 그것을 품 안 깊숙이 집어넣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라핀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줄도 모른 채 그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오리온은 세라핀이 숨어 있는 어둠의 장막 쪽으로 고개를 고정했다. 그의 시선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소리 없는 언어를 내뱉었다. 마치 벽 너머에 있는 그녀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기괴한 감각이 세라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세라핀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에게 들릴까 봐 두려웠다. 카엘의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오리온은 한참 동안 그곳을 응시하다가 이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의 그림자가 지하 봉인실의 벽면을 길게 핥으며 사라졌다.
장막이 걷히고 차가운 공기가 다시 피부를 파고들었다. 세라핀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했으나 카엘이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의 시선은 오리온이 떠난 계단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왕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붉은빛은 아까보다 더 짙고 위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라핀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을 잃어버린 맨손의 낙인이 보랏빛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신의 은총을 증명해야 할 낙인은 이제 마왕의 기운과 섞여 기괴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카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성소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정화 의식을 알리는 거룩한 종소리였으나 세라핀에게는 그것이 마치 조종처럼 들렸다. 그녀는 카엘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낮게 읊조렸다.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카엘은 세라핀의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공허의 불꽃 냄새가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낮은 웃음을 흘리며 세라핀을 더 깊이 껴안았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계단 위로 사라진 오리온은 성소 중앙 홀에 도착했다. 그는 품 안에서 세라핀의 장갑을 꺼내어 다시 한번 매만졌다. 장갑 끝에 묻은 검은 얼룩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번져나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오염된 흔적을 보며 오리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뒤로 교황청의 사제들이 급히 달려왔다. 성녀의 행방을 묻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오리온은 대답 대신 장갑을 등 뒤로 감췄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점점 더 짙어져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리온은 계단 아래, 어둠이 웅크린 지하를 향해 다시 한번 시선을 던졌다. 그가 쥔 장갑에서 미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라핀이 결코 알지 못할, 그리고 카엘조차 예측하지 못한 기묘한 균열이 성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