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처박힌 결계석이 비명을 지르며 깨졌다. 사방으로 튀어 나간 보랏빛 파편이 어둠을 갈랐다. 먼지 구름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등 뒤의 차가운 벽이 척추를 타고 소름을 밀어 올렸다. 카엘의 거친 손이 세라핀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손가락 끝이 닿은 얇은 옷감 위로 열기가 번졌다. 살갗에 새겨진 검은 낙인이 보라색으로 일렁였다. 독기가 성휘와 충돌하며 가느다란 연기를 내뿜었다. 세라핀의 턱끝이 강제로 들리며 시선이 얽혔다. 카엘의 눈동자는 증오가 아닌 기이한 열기로 가득했다. 그는 사냥감을 관찰하는 포식자처럼 그녀를 훑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지하 봉인실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네 안의 영혼은 누구의 것이지.
카엘의 물음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진실의 경계를 베었다. 세라핀의 호흡이 멎으며 폐부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킨 것일까.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녀는 눈꺼풀 안쪽을 혀로 강하게 누르며 고통을 삼켰다. 장갑 안 손등의 흉터를 더듬으려 했으나 어깨가 결박된 상태였다. 카엘의 시선이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그는 답을 재촉하지 않고 거리를 좁혀왔다. 서늘한 마기가 뺨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세라핀은 도망치는 대신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남은 것은 교황의 사형집행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껍데기가 누구의 것이든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을 텐데.
카엘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치켜올라가며 멈추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세라핀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천천히 밀어냈다. 단단한 근육 너머로 불규칙한 박동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하얀 성휘가 실핏줄처럼 뻗었다. 카엘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독이 그것을 휘감았다. 상극의 힘이 만나는 지점에서 보랏빛 불꽃이 튀었다. 세라핀의 목소리가 낮고 은밀하게 바닥을 기었다.
이 성국을 함께 부수지 않겠나.
카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어깨뼈가 비명을 질렀다. 미친 짓이군. 그의 짧은 대답에는 비웃음과 경악이 섞여 있었다. 성녀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가장 불경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그녀가 뿜어내는 기운에 취해 있었다. 세라핀의 낙인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빛무리가 방 안을 채웠다. 성휘의 순수함과 마독의 잔혹함이 뒤섞인 기묘한 에너지였다. 두 사람의 마력이 공명하며 바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봉인실 내부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팽창했다. 천장의 먼지가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카엘은 홀린 듯 그녀의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손가락이 뜨거운 낙인의 중심부를 부드럽게 쓸었다.
네가 말하는 것이 공허의 불꽃인가.
세라핀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체온이 섞이는 순간 폭발적인 진동이 일었다. 발치에서 푸른색 불꽃이 꽃망울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의 축복도 마왕의 저주도 아닌 제3의 힘이었다. 대리석 바닥이 녹아내리며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쳤다. 봉인실을 지탱하던 마법 진이 형체도 없이 바스라졌다. 카엘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며 강렬한 빛을 냈다. 세라핀은 온몸의 신경이 타 들어가는 통증을 느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은 그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 그때 성소 꼭대기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세 번의 날카로운 타종이 정적을 갈기갈기 찢었다. 결계석이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비상 신호였다. 지하 계단 너머에서 수십 명의 발소리가 쏟아졌다. 갑옷이 부딪히는 금속음이 벽을 타고 가깝게 들려왔다. 성기사들의 거친 함성이 봉인실 입구까지 도달했다. 카엘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라핀의 시야에 부서진 철문 사이로 비치는 빛이 들어왔다. 선두에 선 남자의 푸른 망토가 먼지 속에서 펄럭였다. 기사단장 오리온의 검날이 푸른 불꽃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성녀를 마왕으로부터 격리하라.
오리온의 외침과 함께 성기사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세라핀은 카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솟구친 푸른 불꽃이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카엘의 낮은 웃음소리가 기사들의 함성을 집어삼켰다. 그는 세라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바닥의 푸른 불꽃이 성기사들의 발치를 집어삼키려 꿈틀댔다. 오리온은 불길 너머의 세라핀과 시선을 맞추려 애썼다. 세라핀은 그의 절박한 눈빛을 외면하며 카엘의 손을 잡았다. 봉인실의 천장이 무너지며 거대한 돌덩이들이 쏟아졌다. 비명과 굉음이 뒤섞인 아수라장 속에서 카엘이 속삭였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나의 성녀.
카엘은 세라핀을 안아 들고 무너지는 벽 너머로 몸을 날렸다.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고막을 때리며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세라핀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아 고정했다. 카엘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타고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하듯 거침없이 하강했다. 추락의 끝에서 발바닥이 딱딱한 대지에 닿으며 진동했다. 이곳은 상층부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습한 지하 터널이었다. 벽면을 따라 푸른 이끼가 기괴한 빛을 내뿜으며 자라고 있었다. 카엘은 그녀를 내려놓지 않은 채 어두운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여기는 루인스의 가장 깊은 경계선이다.
그의 목소리가 축축한 벽면에 부딪혀 기이한 잔향을 남겼다. 세라핀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썩은 냄새와 정화되지 않은 마기가 폐부를 찔러왔다. 상층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지독한 악취였다. 이곳에 버려진 자들이 겪었을 고통이 피부로 전해졌다. 세라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눈물이 고이려 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혀로 입천장을 누르며 감정을 억눌렀다. 카엘은 그녀의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세라핀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이곳의 공기가 네 성결한 폐에는 너무 독한 모양이지.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으나 그의 손길은 의외로 조심스러웠다. 카엘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성휘의 잔재가 마독과 반응했다. 세라핀은 그의 차가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다. 손등에 새겨진 흉터가 그의 살결에 닿아 화끈거리는 열을 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카엘의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보랏빛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만들어낸 공허의 불꽃이 남긴 흔적이었다. 세라핀은 그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심장 근처에 가져다 댔다.
독한 건 공기가 아니라 이 세계의 거짓이야.
카엘의 눈동자가 잠시 확장되었다가 이내 가늘게 좁아졌다. 그는 그녀의 박동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터널 저 멀리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적막을 깨고 카엘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낮은 음성을 뱉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라핀의 시야가 그의 서늘한 얼굴로 가득 찼다. 그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짙은 마독의 향기가 정신을 흐릿하게 했다. 카엘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네가 제안한 파멸의 대가는 상당히 비쌀 텐데.
세라핀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몸을 밀착시켰다. 이미 지불할 준비는 끝났다고 말하듯 그녀의 눈이 빛났다. 카엘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터널의 끝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오며 출구를 알렸다. 그곳은 마계 제르노스로 향하는 가장 은밀한 통로 중 하나였다. 세라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의 인도에 몸을 맡겼다. 성국의 영광도, 성녀의 의무도 이제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오직 눈앞의 남자와 함께 열어젖힐 새로운 지옥만이 중요했다. 카엘이 거대한 석문을 밀어젖히자 차가운 밤공기가 쏟아졌다.
저곳이 네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의 끝이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숲이 펼쳐졌다. 마계의 식물들이 보랏빛 광채를 내뿜으며 괴이하게 일렁였다. 세라핀은 처음 마주하는 풍경에 숨을 들이키며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신발이 마계의 흙을 밟는 순간 불꽃이 일었다. 성녀의 발걸음마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정화와 오염을 반복했다. 카엘은 그녀의 옆에 서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검은 망토를 둘러주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가련한 성녀를 향한 연민이 아닌, 동료를 향한 예우였다. 세라핀은 망토의 깃을 여미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가 당신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지.
카엘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숲속으로 낮게 깔리며 퍼져나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숲의 심장부를 향해 깊숙이 들어갔다.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성채의 실루엣이 달빛을 받아 드러났다. 제르노스의 주인이 머무는 칠죄의 궁전, 검은 태양의 성이었다. 성문 앞에는 기괴한 갑옷을 입은 마족들이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그들은 돌아온 왕과 그 곁의 성녀를 보며 낮은 함성을 질렀다. 세라핀은 그들의 붉은 안광 속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이 다시 한번 보라색으로 점멸했다. 카엘은 그녀를 성채 안으로 안내하며 웅장한 대문을 열었다.
나의 궁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세라핀.
거대한 연회장에는 이미 수많은 마족 귀족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성녀의 등장에 술렁이며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카엘은 그들의 시선을 단번에 제압하며 상좌로 걸어 올라갔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 세라핀을 그 곁에 세워두었다. 세라핀은 연회장을 가득 채운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다시금 하얀 성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그 신성한 빛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카엘은 만족스러운 듯 턱을 괴고 그녀의 옆모습을 감상했다.
이들이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게 느껴지나.
세라핀은 고개를 돌려 카엘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죽음보다 더한 모욕을 이미 성국에서 겪었다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카엘의 왕좌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대리석 손잡이가 그녀의 성력에 닿아 가늘게 갈라지며 금이 갔다. 카엘은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에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났다. 그는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커다란 손을 겹쳐 올렸다. 두 사람의 마력이 다시 한번 공명하며 성채 전체가 흔들렸다. 연회장의 샹들리에가 요동치며 그림자들이 춤추듯 벽을 탔다.
너의 그 오만함이 이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 기대되는군.
카엘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충성을 맹세하듯 고개를 숙였다. 세라핀은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성화 속 성녀의 자애로움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파멸을 예고하는 마녀의 웃음과 더 닮아 있었다. 연회장의 마족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기묘한 결합을 지켜보았다. 그때 성채 밖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진동이 전해졌다. 성기사단의 추격대가 마계의 국경 결계를 돌파한 모양이었다. 카엘은 문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검 자루를 쥐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성국의 사냥개들이.
세라핀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자신의 성력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아우라가 연회장을 압도했다. 마족들조차 그 거대한 힘의 압박에 숨을 몰아쉬며 뒤로 밀려났다. 카엘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성채 정문을 향해 걸었다. 정문이 열리자 수천 명의 성기사들이 횃불을 들고 대치 중이었다. 그 선두에는 분노로 눈이 뒤집힌 오리온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세라핀이 마왕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보고 절규했다.
세라핀, 당장 그 더러운 마물에게서 떨어져라.
오리온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으나 세라핀은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카엘의 허리를 더 세게 껴안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카엘은 그녀의 반응에 흡족한 듯 오리온을 향해 조롱을 던졌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번개가 줄기줄기 뻗어 나가 대지를 갈랐다. 성기사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으나 오리온만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력을 검에 집중시키며 세라핀을 향해 돌진해왔다. 카엘은 그녀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자신의 마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지키려던 것은 성녀인가, 아니면 네 자존심인가.
카엘의 검과 오리온의 검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광풍이 일었다. 충격파로 인해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가며 비산했다. 세라핀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차분하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을 향한 간구가 아닌, 결계를 파괴하기 위한 저주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고대어들이 공중에 문자로 형상화되었다. 보랏빛 문자들이 성기사들의 갑옷을 파고들며 성휘를 부식시켰다. 오리온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검을 떨어뜨렸다.
어떻게 성녀의 입에서 이런 부정한 언어가.
오리온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며 그는 세라핀을 원망스럽게 보았다. 세라핀은 그에게 다가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공허의 불꽃이 작게 피어올라 춤을 췄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불꽃을 오리온의 가슴팍에 밀어 넣었다. 오리온의 신성력이 불꽃에 먹혀 들어가며 그의 육체가 재로 변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카엘은 검을 거두고 세라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이제 너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카엘의 속삭임과 함께 세라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유도 아르카디아의 밑바닥이 붉은 번개에 맞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기도가 끊기자 대륙의 결계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유성처럼 지상을 향해 쏟아지며 비명을 질렀다. 성국 엘리시온의 몰락이 눈앞에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세라핀은 카엘의 손을 잡고 무너지는 세계의 끝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마지막 눈물이 마침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름답지 않나, 우리가 무너뜨린 저 가식의 조각들이.
세라핀의 물음에 카엘은 대답 대신 그녀의 이마에 깊게 입을 맞췄다. 지상으로 떨어진 부유도의 파편들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연기를 냈다. 태양빛이 가려진 자리에 마계의 보랏빛 달이 떠올라 대지를 비췄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어둠의 광채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세라핀은 카엘의 가슴에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으며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손등에 새겨졌던 낙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푸른 불꽃의 문양이 돋아났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다, 카엘.
세라핀은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겹치며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성소 꼭대기의 종소리가 멈추고 대륙에는 기괴한 정적이 찾아왔다. 추락한 부유도의 잔해 위로 마물들이 기어 올라가 깃발을 꽂았다. 카엘은 세라핀을 안아 들고 자신의 침소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팔뚝을 간지럽히며 보랏빛 잔상을 남겼다. 침실의 문이 닫히자 외부의 소음은 완벽하게 차단되어 사라졌다. 카엘은 그녀를 부드러운 시트 위에 눕히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세라핀은 그의 손길을 받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나를 배신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카엘은 그녀의 협박 섞인 농담에 낮게 웃으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마왕의 문장이 세라핀의 성휘와 공명하며 빛났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속삭였다.
배신하기엔 너라는 독에 너무 깊게 중독되어 버렸거든.
카엘은 그녀의 옷깃을 헤치고 드러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세라핀은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으며 강하게 끌어당겼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보랏빛 불꽃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집어삼켰다. 밖에서는 무너진 성국의 유민들이 지르는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 침실 안은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은밀한 성소였다. 세라핀은 자신의 영혼이 마독에 물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쾌락을 삼켰다.
더 깊게, 나를 더럽혀줘.
그녀의 도발적인 요구에 카엘의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며 짐승처럼 빛났다. 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쥐고 자신의 세계로 그녀를 끌어내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면에 하나로 엉겨 붙으며 길게 늘어졌다. 밤은 깊어갔고, 마계의 숲은 새로운 주인의 탄생을 축하하듯 울부짖었다. 세라핀은 의식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그의 심장 박동만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그것만이 이 무너진 세계에서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카엘은 세라핀의 귓볼을 깨물며 낮게 읊조렸다.
너는 이제 신의 성녀가 아니라, 나의 파멸이다.
세라핀은 대답 대신 그의 등을 손톱으로 깊게 긁으며 몸을 떨었다.
방 한쪽 구석, 세라핀이 떨어뜨린 성녀의 관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금이 간 보석 사이로 마지막 성휘가 빠져나와 공중에서 흩어졌다. 성국의 역사는 그렇게 한 페이지가 찢겨 나가며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엘은 잠든 세라핀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창밖의 붉은 달을 응시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교황 카스틸로의 머리가 담긴 은쟁반도, 성국의 보물도 아니었다.
내일 아침, 너는 네가 그토록 그리고 싶어 하던 루인스의 아이들을 보게 될 거다.
카엘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 뒤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세라핀이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수천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마계의 독기로부터 보호받는 푸른 보호막 안에서 꽃을 던지고 있었다. 세라핀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테라스로 달려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계의 황량한 대기를 뚫고 성채 안까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뒤에서 다가와 자신을 안아주는 카엘의 온기를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으로 눈꺼풀을 누르지 않고 눈물을 흘려보낸 순간이었다.
이게 당신이 말한 진실의 끝인가요.
카엘은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아이들의 행렬을 함께 지켜보았다.
아니, 이건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갈 새로운 역사의 첫 문장이지.
카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세라핀은 그의 손을 꽉 쥐며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 성녀의 미소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평온한 미소였다. 대륙의 모든 신전이 무너지고 신들이 떠나갔지만,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단 한 명의 마왕이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그렇게 무너진 세계의 잔해 위에서 가장 찬란한 아침을 맞이했다.
세라핀은 카엘의 손등에 난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우리를 사냥하러 올 다음 적은 누구일까요.
카엘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성채 너머 지평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누가 오든 상관없어, 너와 내가 함께라면 그곳이 바로 신의 심판대가 될 테니까.
카엘은 그녀의 손을 이끌고 성채 깊숙한 곳, 전략 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마계의 장군들과 생존한 하층민 대표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핀은 탁자 위에 펼쳐진 대륙 지도를 내려다보며 붉은 깃발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성국의 마지막 요새인 백색의 탑 위에 깃발을 꽂았다.
그곳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죠.
세라핀의 단호한 선언에 회의실 안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카엘은 그녀의 결단력 있는 모습에 매료된 듯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전쟁의 서막은 이미 올랐고, 두 사람은 그 전쟁의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성녀와 마왕의 결합이라는 금기된 전설은 이제 전 대륙을 뒤흔드는 현실이 되었다.
카엘이 세라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며 낮게 읊조렸다.
"준비됐나, 나의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