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폐부를 찔렀다. 축축한 냉기가 기도에 달라붙어 끈적하게 늘어졌다. 카이는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발밑에서 바스라지는 것은 흙이 아니었다. 부서진 현과 뒤엉킨 건반 조각들이었다. 그것들은 날카로운 소리 대신 둔탁한 감각만을 발끝에 전달했다. 절벽 너머의 세계는 지도에 기록된 적 없는 공백이었다. 침묵이 고막을 압박했다.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강제로 진공상태를 만든 것처럼 귀 안쪽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심장 박동조차 들리지 않는 기이한 정적이 전신을 휘감았다. 카이는 입을 벌려 숨을 몰아쉬었다. 허파로 들어오는 공기에는 어떤 진동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차갑게 식은 쇳조각을 만져보았다. 세라의 낡은 튜닝 포크였다. 손끝에 닿는 금속의 질감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려 했으나 마찰음조차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전에 소멸했다. 그때였다. 굳어 있던 튜닝 포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은 아주 미약했다. 하지만 분명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다. 카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개 속을 응시했다. 은색으로 빛나는 포크의 끝이 북서쪽의 어둠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묵의 대지는 생명체의 흔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보았지만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소리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의 증명조차 불가능했다. 카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세라."
작게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목 안쪽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솟아오른 것 같은 극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비명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소리를 내는 행위 자체가 육체의 생명력을 연료로 태우는 금기였다. 카이는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었다. 입술 사이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은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이곳에서 언어는 독이었고 대화는 자살 행위였다. 카이는 거친 숨을 고르며 튜닝 포크를 꽉 쥐었다. 떨림은 점점 강해져 손목 뼈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튜닝 포크가 가리키는 곳으로 발을 옮길수록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사방에 널브러진 악기들의 시체가 보였다. 현이 끊어진 바이올린과 건반이 통째로 뽑혀 나간 피아노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메트로놈 시티에서 배출된 쓰레기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기괴하게 뒤틀린 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악기 틈새로 인간의 뼈를 닮은 하얀 나뭇가지들이 돋아나 있었다. 카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팔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은 살갗의 감촉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손톱 끝이 미세하게 갈색으로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서둘러 소매를 당겨 팔목을 가렸다.
한참을 걷자 거대한 구덩이가 나타났다. 소리의 무덤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였다. 구덩이의 중심부에는 도시의 메트로놈 엔진보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오르골이었다. 기어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유령 같은 장치였다. 카이는 구덩이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발이 닿는 곳마다 유리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투명한 원통형 용기들이 오르골의 태엽 주위에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카이는 가장 가까운 유리관 앞으로 다가갔다. 그 안에는 액체 속에 잠긴 인간이 있었다. 피부는 이미 매끄러운 목재의 질감으로 변해 있었다. 관절 마디마디에는 금속 나사가 박혀 있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오르골의 선율을 만들기 위한 부품으로 박제된 채 영원히 진동하고 있었다. 유리관 하단에 새겨진 글자가 카이의 눈에 박혔다. '실험체 01'. 카이는 홀린 듯 옆 칸으로 이동했다. '실험체 02', 그리고 '실험체 03'. 번호가 높아질수록 박제된 인간들의 형체는 더욱 정교하게 악기와 융합되어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숨이 막혀왔다. 눈앞의 유리관 속에 갇힌 남녀의 얼굴이 낯익었다. 세라가 소중히 간직하던 낡은 사진 속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정교하게 깎인 실린더가 박혀 있었다. 손가락은 건반의 부품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세라, 네가 가리키는 곳에 정말 네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야? 카이는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떨리는 손을 유리관에 갖다 댔다. 차가운 유리의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유리 너머 세라의 부모를 닮은 형체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낙인이 붉게 점멸하며 주변의 소리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카이는 자신의 몸에서 공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튜닝 포크가 스스로 진동하며 유리관의 표면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침묵의 대지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카이는 부서지는 유리 파편 사이로 손을 뻗었다. 부서진 유리관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굳어버린 선율의 파편들이었다. 그것들이 카이의 발등을 덮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오르골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비명 같은 마찰음을 내며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카이는 중심을 잃고 무덤의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졌다.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오르골 실린더가 일제히 회전하며 불협화음을 쏟아냈다. 그 소름 끼치는 소동 속에서 카이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무덤의 가장 깊은 곳에는 '실험체 04'라고 적힌 빈 유리관이 입을 벌린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의 크기는 카이의 체격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바닥에서 솟아오른 금속 현들이 그의 발목을 옥죄었다.
"이게 네가 말한 구원이었나, 세라."
카이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품 안의 단검을 꺼내 현을 내려쳤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단검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계 장치의 진동이 그의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전해졌다. 거대한 태엽이 그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카이의 시야 너머로 세라의 무뚝뚝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이 무덤이 산 자를 삼켜 악기로 만드는 공장이라는 사실을.
유리관 내부에서 끈적한 액체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카이의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차올랐다. 액체에 닿은 살갗이 화끈거리며 굳어갔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튜닝 포크를 구덩이 위쪽으로 던졌다. 금속 막대는 허공을 가르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뒤쪽에서 육중한 금속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밀폐된 투명한 감옥 안에서 카이는 숨을 멈췄다. 유리관 표면에 그의 이름이 실시간으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는 주먹으로 유리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조차 나지 않는 절망적인 공간이었다. 밖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우아한 구두 소리였다.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그림자는 카이가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유리관 앞에 멈춰 서서 무표정하게 카이를 내려다보았다. 세라의 손에는 카이가 던졌던 튜닝 포크가 쥐여 있었다. 그녀는 포크를 유리벽에 가볍게 갖다 대며 입을 열었다.
"조율이 시작될 거야, 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