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금속음과 탄내가 뒤섞였다.
무너진 백색 탑의 잔해 사이로 거친 영맥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강태윤은 가슴팍에 매달린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금속 조각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흐릿한 은빛 광채가 갈라진 틈새를 메웠다.
옆에 선 서하진의 형체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투명했다.
하진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낙인이 맥동했다.
그럴 때마다 태윤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수명을 깎아내는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올라왔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공기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 같았다.
태윤은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억지로 참았다.
펜던트를 하늘을 향해 높게 치켜들었다.
부모님의 유산이자 진성 영핵의 열쇠가 진동했다.
공중으로 솟구친 은빛 줄기가 먹구름을 뚫었다.
신월구 전체를 휘감는 거대한 진동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뒤틀렸던 영맥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도시가 비명을 질렀다.
비산하는 영핵의 파편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것은 더 이상 귀신을 사냥하기 위한 흉기가 아니었다.
도시를 영구적으로 지탱할 순수한 에너지원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태윤의 시야 너머로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인간과 영체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던 이들이 멈춰 서서 하늘을 보았다.
검은 안개가 걷히고 영맥의 흐름이 고요해졌다.
"결국 끝내려는구나."
하진이 태윤의 어깨에 천천히 고개를 기댔다.
차가운 한기가 옷을 뚫고 살갗에 닿았다.
평소라면 밀어냈을 손길을 태윤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손끝에 남은 온기를 모아 하진의 희미한 손을 잡았다.
닿은 곳부터 소름이 돋았으나 놓지 않았다.
무너진 중앙 홀 끝에서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관리국 의장이 피 칠갑이 된 채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어 검게 타버린 상태였다.
의장이 품 안에서 꺼낸 검은 영석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주변의 공기가 압축되며 고막을 압박했다.
"이 도시를 통째로 지옥으로 가져가겠다."
의장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기괴하게 울렸다.
그가 자폭을 위해 영력을 폭주시키려는 찰나였다.
발밑에 짙은 안개가 깔리며 의장의 장화를 덮었다.
윤세희가 안개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두 눈은 기이한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세희가 손을 뻗자 진실의 안개가 의장을 가두었다.
의장의 비명은 안개 벽에 부딪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안개 속에서 그가 저질러온 악행들이 환영으로 되살아났다.
자신이 정화했던 수천의 영혼들이 의장의 몸을 옥죄었다.
목을 죄는 영혼들의 손길에 의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결국 의장의 형체는 자신의 죄업에 짓눌려 먼지처럼 흩어졌다.
세희는 안경을 고쳐 쓰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태윤을 향했다.
이내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 눈동자가 바닥을 훑었다.
세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옅은 담배 연기 냄새가 났다.
태윤은 긴장이 풀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 속에 울렸다.
서하진이 그의 곁에 앉아 태윤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가락이 닿는 자리마다 시린 감각이 남았다.
"이제 너도 자유야, 태윤아."
하진의 목소리에 담긴 냉소는 온데간데없었다.
태윤은 대답 대신 하진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심장이 뛰지 않는 가슴이었으나 그 어느 곳보다 따뜻했다.
두 사람은 폐허가 된 탑을 뒤로하고 진혼의 숲으로 향했다.
숲의 나무들이 은빛 영력을 머금고 낮게 속삭였다.
신월구의 밤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밤이 되어도 지형이 뒤틀리지 않았고 지도는 고정되었다.
영계 관리국이 독점하던 영석은 이제 공공의 자산이 되었다.
퇴마사들은 더 이상 사냥꾼이 아닌 경계의 관리자로 남았다.
미명가의 낡은 집 앞 계단에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길을 잃고 울고 있는 꼬마 귀신에게 다가갔다.
작은 손이 허공을 더듬다 차가운 영체의 손을 잡았다.
꼬마 귀신이 울음을 그치고 아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태윤은 낡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 쌓인 거실에는 최도현이 던져둔 장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대신 깔끔한 셔츠를 입은 도현이 보였다.
그는 입에 문 영석 담배를 끄며 태윤을 훑었다.
"살아서 돌아왔으면 됐어."
도현이 건넨 머그잔에서 쓴 한약 냄새가 올라왔다.
태윤은 잔을 받아들고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신월구의 야경은 평화로웠다.
태화로의 고층 빌딩들이 내뿜는 빛이 거실까지 들어왔다.
하진은 창가에 기대어 그 빛을 손바닥으로 받아냈다.
투명했던 그의 형체가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해져 있었다.
태윤의 가슴 위에서 펜던트가 다시 반응했다.
은은하고 따스한 빛이 가슴팍을 타고 부드럽게 퍼졌다.
펜던트에 새겨진 부모님의 이름 옆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금속의 차가운 질감 너머로 새로운 글자가 돋아났다.
서하진이라는 이름이 부모님의 이름 옆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것은 관리국의 낙인이 아닌, 영혼의 각인이었다.
태윤은 곁으로 다가온 하진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창백한 하진의 피부에 태윤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하진의 눈동자가 태윤의 시선과 정면으로 맞물렸다.
서로의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하진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태윤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이게 정말 네가 원하던 결말이야?"
하진의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태윤은 대답 대신 하진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하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진은 태윤의 떨리는 손을 덮어 누르며 웃었다.
그의 서늘한 입술이 태윤의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나를 살린 대가는 생각보다 비쌀 텐데."
태윤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창밖의 영맥이 다시금 푸른 빛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도시의 평화는 얻었으나, 태윤의 수명은 이미 절반이 깎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쥐는 하진의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하진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보랏빛 불꽃이 일렁였다.
그것은 관리국 의장이 가졌던 파멸의 안개와 닮아 있었다.
태윤은 하진의 가슴팍에 귀를 기울였다.
멈춰 있어야 할 그의 심장 부근에서 미세한 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하진의 것이 아닌, 태윤의 생명력이 전이된 증거였다.
태윤은 주머니에서 마지막 에너지 바를 꺼내 하진의 입가에 댔다.
하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태윤의 손가락까지 함께 베어 물었다.
작은 통증과 함께 붉은 핏방울이 하진의 입술에 맺혔다.
하진은 그 피를 핥아 올리며 만족스러운 듯 목을 울렸다.
태윤의 시야가 다시 한번 흐릿하게 뒤틀렸다.
"가자,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