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에서 일렁이는 보랏빛 연기가 태윤의 망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하진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으나 피부를 타고 흐르는 진동이 그의 고통을 고스란히 전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검은 손들이 살을 파고들며 영력을 억제했다. 남자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구역질을 유발했다. 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슴팍의 펜던트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부모님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 기이한 박동을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금속 조각이 아니었다. 하진의 영체와 공명하며 펜던트 표면의 균열 사이로 은색 광채가 새어 나왔다. 남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드는 순간 태윤은 마지막 남은 영력을 펜던트에 쏟아부었다. 챙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은색 입자들이 지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억눌렸던 공기가 팽창하며 결박하던 그림자들을 갈갈이 찢어발겼다.
은빛 안개 속에서 부모님의 온기가 느껴졌다. 어릴 적 기억 속의 서재 냄새와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전신을 감쌌다. 그것은 관리국이 그토록 갈구하던 순수한 시원의 영력이었다. 태윤은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가 놓친 유리병을 낚아챘다. 병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은빛 줄기가 보랏빛 연기를 휘감아 올렸다.
흩어지던 하진의 파편들이 태윤의 가슴 안쪽으로 빠르게 응집되었다. 폐부 깊숙이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었으나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비어 있던 영혼의 구석이 단단하게 채워지는 감각이었다. 태윤의 심장 부근에서 은색과 보랏빛의 실타래가 엉키며 기괴한 문양을 그렸다. 진은의 유대, 그것은 인간의 육신과 귀신의 영핵이 영구적으로 맞물리는 금기의 결속이었다.
시야가 평소보다 수십 배는 선명하게 트였다. 벽 너머 흐르는 영맥의 흐름과 남자의 혈관 속 영력 수치가 파동으로 읽혔다. 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타들어 갔던 낙인이 은빛으로 점멸하며 하진의 의식을 공유해왔다. 하진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뇌해를 직접 울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멍청한 후배야."
태윤은 대답 대신 가슴 언저리를 꾹 눌렀다. 하진의 존재감이 심장박동과 함께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하진은 태윤의 그림자가 아니었으며 태윤 또한 평범한 퇴마사가 아니었다. 두 존재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는 누구도 정의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 소용돌이쳤다. 태윤의 눈동자가 하진의 보랏빛과 부모님의 은빛으로 기묘하게 번뜩였다.
"이제 누구도 너를 혼자 두게 하지 않아."
태윤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 낮게 깔리며 공기를 진동시켰다.
"내가 네 영혼의 닻이 될게."
남자가 뒷걸음질 치며 소매 속에서 영식 부적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태윤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부적은 채 발동되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영력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태윤은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압도적인 힘을 느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두터운 콘크리트 층 너머로 신월구의 뒤틀린 밤하늘이 보였다.
백색 탑의 영안이 태윤의 기운을 감지하고 거대하게 일렁였다. 칠성 의회의 당혹감이 대기를 타고 전해졌으나 태윤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에 깃든 하진의 체온이 차가운 분노를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태윤의 발밑에서 은색 빛줄기가 솟구치며 바닥을 거미줄처럼 가르기 시작했다.
신월구 지하에 숨겨진 거대한 영맥들이 태윤의 부름에 반응했다. 관리국이 수십 년간 억눌러온 영적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태윤은 하진의 의지와 하나가 되어 영맥의 매듭을 단숨에 풀어헤쳤다. 지반이 흔들리며 미명가의 폐허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태윤은 지면을 강하게 박차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신체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지하를 뚫고 솟구치는 태윤의 뒤로 거대한 은빛 기둥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빛이 닿는 곳마다 관리국이 쳐놓았던 기만적인 결계들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태화로의 고층 빌딩들 사이로 억눌려 있던 귀신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빛에 노출된 영맥들이 폭발하며 도시의 지형을 실시간으로 뒤틀어 놓았다. 평범한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가던 길을 멈추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평온한 밤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인간인 척 살아가던 귀신들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썩어 문드러진 피부와 원한 서린 눈동자들이 태화로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노출되었다. 신월구가 감춰온 추악한 진실이 은빛 광채 아래 적나라하게 발겨졌다. 태윤은 공중에서 백색 탑의 꼭대기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거대한 영안이 고통스러운 듯 황금빛 눈물을 흘리며 태윤을 응시했다. 태윤은 손을 뻗어 허공을 가로지르는 영맥의 가닥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타오르는 은색 불꽃이 하진의 한기와 섞여 거대한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9화에서 실패했던 완전한 융합이 부모님의 희생으로 비로소 완성된 순간이었다.
태윤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관리국의 요격 술법들을 가볍게 튕겨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압만으로도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하진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스쳤고 태윤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도시 전체가 귀신들의 비명과 인간들의 경악으로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환영의 다리는 이미 붕괴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태윤은 가속도를 붙여 백색 탑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했다.
태윤이 휘두른 은빛 검기가 백색 탑의 외벽을 가르고 영안의 중심부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폭압이 대기를 가르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을 토해냈다. 무너지는 탑의 잔해 사이로 칠성 의회의 노인들이 핏발 선 눈으로 태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색 사슬들이 태윤의 사지를 묶으려 허공을 가로질렀다. 태윤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하진의 냉기를 검신에 휘감았다.
차가운 서리가 사슬을 타고 번지며 순식간에 황금빛을 바래게 만들었다. 부서진 사슬 조각들이 보석처럼 흩어지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태윤은 펜던트가 자리한 가슴 중앙을 한 번 더 움켜쥐었다. 그곳에는 이제 하진의 영핵이 태윤의 심장과 같은 박자로 고동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후배님."
하진의 목소리가 고막이 아닌 골격을 타고 부드럽게 울렸다. 태윤은 그 진동에 대답하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검을 고쳐 쥐었다. 자신의 수명이 깎여나가는 감각이 선명했으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타들어 가는 생명력이 아드레날린이 되어 신경계를 날카롭게 깨웠다.
백색 탑의 심장부인 '영맥 제어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개의 영석이 거대한 기계 장치에 박혀 비명을 지르듯 빛나고 있었다. 그곳은 신월구의 모든 불행이 시작된 근원지이자 부모님의 영혼이 저당 잡힌 감옥이었다. 태윤의 눈동자에 맺힌 보랏빛 광채가 증오로 인해 더욱 짙어졌다.
수호 퇴마사들이 태윤의 앞을 가로막으며 영식 술법을 전개했다. 방패 모양의 결계가 겹겹이 쌓이며 태윤의 진로를 차단하려 애썼다. 태윤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검을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은색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결계들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퇴마사들이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고 제어실의 육중한 철문이 맥없이 구부러졌다. 태윤은 연기를 헤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앙에 떠 있는 거대한 영핵 배양기가 기괴한 기계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일그러진 표정의 영혼들이 액체 속에 잠겨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태윤은 배양기 앞에 멈춰 서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고 안쪽의 영혼들이 태윤의 온기를 갈구하듯 벽을 긁었다. 그중에는 태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부모님의 얼굴도 섞여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으나 태윤은 감정을 억누르며 검 끝을 배양기 중앙에 박아 넣었다.
"전부 끝낼 거야."
태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으나 하진의 손길이 어깨를 감싸는 감각에 금세 안정을 찾았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은색 영력이 배양기 내부로 급격히 유입되었다. 영석들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폭발하며 내부의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경보음이 울려 퍼지며 백색 탑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태윤은 쏟아지는 파편들 속에서 부모님의 영혼이 빛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 태윤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오랜 응어리가 비로소 녹아내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무너지는 천장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칠성 의회의 수장인 '백야'가 직접 강림하며 압도적인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손에는 태윤의 검과 닮았지만 훨씬 불길한 흑색 검이 들려 있었다.
백야의 검이 태윤의 가슴을 향해 소리 없이 쇄도했다. 태윤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막아냈으나 엄청난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발바닥이 지면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번졌다. 하진의 기운이 급격히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네놈의 영혼까지 삼켜주마."
백야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리며 제어실 공간을 압박했다. 태윤은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하진의 영핵을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수명이 깎여나가는 속도가 빨라졌고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윤의 눈에는 굴복의 빛이 아닌 서슬 퍼런 투지가 서려 있었다.
태윤은 자신의 심장을 찌르듯 검 자루를 가슴에 밀착시켰다. 인간의 육신을 제물로 삼아 하진의 본질을 완전히 개방하는 최후의 술법이었다. 하진이 태윤의 의식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외쳤으나 태윤은 멈추지 않았다.
"같이 가자, 선배."
태윤의 전신에서 은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불꽃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백야의 흑색 검기가 그 불꽃에 닿는 순간 허무하게 소멸했다. 태윤은 빛의 속도로 백야를 향해 도약하며 검을 내리쳤다. 두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신월구 전체가 하얀 섬광에 휩싸였다.
섬광이 잦아든 자리에는 파괴된 제어실의 잔해만이 뒹굴고 있었다. 백야는 가슴에 깊은 자상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태윤 역시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 있었으나 그의 몸은 군데군데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영력 소모가 한계를 넘어 존재 자체가 소멸의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이대로 죽게 두지 않아."
하진의 영체가 태윤의 등 뒤에서 형상화되며 그를 단단히 붙들었다. 하진은 자신의 영핵을 태윤의 심장 속으로 더욱 깊게 밀어 넣으며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기 시작했다. 태윤의 투명해지던 신체가 다시 밀도를 되찾았으나 하진의 모습은 안개처럼 흐려졌다.
태윤은 급히 고개를 돌려 하진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손가락은 허공을 갈랐다. 하진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태윤의 뺨을 살짝 스치듯 만졌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온기가 태윤의 심장을 시리게 만들었다.
"멍청하긴, 끝까지 말 안 듣지."
하진의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흩어지며 사라져갔다. 태윤은 절규하듯 하진의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것은 무너지는 탑의 잔해 소리뿐이었다. 백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검을 치켜들며 태윤을 향해 걸어왔다.
태윤은 하진이 남긴 마지막 영력의 조각을 쥐어짜며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보랏빛은 사라지고 오직 차가운 은빛만이 감돌았다. 하진의 희생으로 되찾은 생명은 이제 오로지 복수를 위한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백야의 흑색 검이 태윤의 어깨를 베어냈으나 태윤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검을 백야의 목에 겨누며 마지막 남은 힘을 검신에 집중했다. 은색 빛이 태윤의 팔을 타고 흘러 검 끝에서 날카로운 송곳처럼 뻗어 나갔다.
"네가 만든 이 지옥을 직접 봐."
태윤의 일격이 백야의 가슴 중앙에 박힌 영핵을 정확히 관통했다. 백야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육신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칠성 의회의 정점이 무너지자 신월구를 지탱하던 거대한 결계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태윤은 무너지는 백색 탑의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시의 네온사인들이 하나둘 꺼지고 그 자리를 귀신들의 해방된 영혼들이 채우고 있었다. 지옥 같던 신월구에 처음으로 진정한 새벽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태윤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가슴 위의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박동은 멈췄고 은색 광채도 사라진 평범한 금속 조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진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윤은 차갑게 식어버린 펜던트를 손안에 꼭 쥐었다.
"기다려, 내가 찾으러 갈 테니까."
태윤은 피 섞인 마른침을 뱉어내며 무너지는 건물 난간을 붙들었다. 멀리서 윤세희와 최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진의 기운이 흩어진 허공만을 응시하며 흐릿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어둠이 걷히는 신월구의 하늘 위로 하진의 환영이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태윤은 그 실루엣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 끝에는 오직 새벽 공기의 서늘함만이 닿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너진 탑의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시 아래쪽에서 거대한 영맥의 폭주가 다시 시작되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관리국의 숨겨진 병기들이 깨어나는 소리였으나 태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진이 남긴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둠이 가시지 않은 미명가로 향했다.
태윤은 발밑을 지나는 그림자 속에서 익숙한 한기를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