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안개가 발목을 감아왔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감각이 서늘했다. 영석 중화제가 살포되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금속성 파찰음이 사방에서 낮게 울려 퍼졌다. 강태윤은 입가를 틀어막으며 몸을 낮췄다. 손등에 새겨진 검은 낙인이 기분 나쁘게 박동했다. 영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감각에 현기증이 일었다. 제0구역 입구는 이미 백색 제복들로 가득했다. 정화군의 방패가 반사하는 빛이 날카로웠다. 퇴마사들의 성가시는 영압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퇴로가 차단된 공간은 거대한 무덤처럼 변했다.
태윤의 곁에서 윤세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태블릿이 붉은 경고등을 내뿜었다. 8화에서 빼돌렸던 기밀 자료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정화군의 진형 배치와 영력 주파수가 분석되어 있었다. 세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녀는 데이터의 취약점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정면의 부대를 확인한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포위망의 선두에 선 남자가 투구를 벗었다. 세희의 호흡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그는 세희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성역 센터의 전설이라 불리던 한승철 단장이었다. 남자의 눈빛은 기계처럼 무미건조했다. 세희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떨어뜨릴 뻔했다. 스승의 시선이 제자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꽂혔다. 방패를 든 병사들이 한 걸음씩 간격을 좁혔다. 중화제 가스가 시야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태윤은 차가운 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 노력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렸다.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스승님, 당신이 가르친 정의는 이런 학살이 아니었습니다. 세희의 목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찢었다.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한승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이 일제히 영식 술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그려지는 문양들이 푸른 빛을 발산했다. 가스와 섞인 영력이 폭발적인 압박감을 형성했다. 세희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의라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폭력이 비현실적이었다.
태윤은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옷감 너머로 펜던트의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부모님의 유품이자 이 지옥을 끝낼 유일한 열쇠였다. 펜던트는 하진의 기운에 반응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 근처가 칼로 베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진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하진의 영체가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그의 한기가 태윤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소멸의 전조가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갉아먹었다.
정화군의 압박은 자비가 없었다. 방패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세희는 정신을 놓은 듯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태윤은 이를 악물며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것이 관리국의 뜻대로 흘러간다. 부모님의 죽음도 하진의 희생도 물거품이 된다. 태윤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제0구역 심층부로 향했다. 진성 영핵이 뿜어내는 기괴한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도시의 심장부이자 모든 악의 근원이 저 너머에 있었다.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자 거대한 영핵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만 명의 사념이 응축된 광물은 기괴하게 박동했다. 핏줄처럼 엉킨 영맥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영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불길한 보랏빛이었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은빛 광채가 영핵의 어둠과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이것만 꽂으면 이 지옥 같은 연쇄를 끊을 수 있다. 관리국의 권력 기반인 영맥을 영구히 동결시킬 수 있었다.
태윤의 발걸음이 영핵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등 뒤에서는 정화군의 함성과 술법의 파동이 몰아쳤다. 세희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뒤처져 있었다. 태윤은 숨을 들이켜며 펜던트를 높이 치켜들었다. 금속 끝부분이 영핵의 표면에 닿으려던 찰나였다. 차가운 손길이 태윤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얼음보다 차가운 감각에 태윤의 팔이 경직되었다. 고개를 돌리자 형체가 반쯤 투명해진 하진이 서 있었다.
하진의 눈동자에는 전례 없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이 검붉게 타올랐다. 태윤의 영력을 흡수하며 억지로 형태를 유지하는 상태였다. 하진은 태윤의 손에서 펜던트를 부드럽게 빼앗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고도 서글픈 미소가 번졌다. 태윤은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날뛰며 경고를 보냈다. 하진의 영체가 안개처럼 흩어지며 영핵을 감싸 안았다.
그거 쓰지 마. 하진의 목소리가 뇌리에 직접 울려 퍼졌다. 태윤은 목소리를 내려 했으나 목이 메어 오지 않았다. 하진의 손가락이 태윤의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체온이 없는 감촉이었지만 무엇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하진은 영핵의 중심부를 향해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그의 영체가 영핵의 보랏빛 광채와 섞여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진동이 지하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벽면의 영맥들이 비명을 지르듯 뒤틀리며 파열했다.
내가 직접 끝낼게. 하진의 선언과 함께 그의 몸이 빛무리로 화했다. 태윤은 손을 뻗었지만 허공만을 움켜쥐었을 뿐이다. 하진의 영핵이 태윤의 가슴 속에서 격렬하게 공명했다. 수명을 깎아내며 이어온 계약이 강제로 해지되는 통증이 엄습했다. 하진의 형체가 빛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며 영핵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백색의 섬광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태윤은 멀어지는 하진의 이름을 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야가 백색으로 점멸하며 소음이 멀어졌다. 고막을 찢던 경보음도 정화군의 거친 발소리도 사라졌다. 오직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는 공허함만 남았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먼지를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지나치게 차가워 소름이 돋았다. 하진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부서진 은색 펜던트뿐이었다. 유품의 조각들이 차가운 바닥에 흩어져 제 빛을 잃었다. 태윤은 그것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가늘게 떨리는 숨결이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손가락 끝이 펜던트 조각에 닿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낯익은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구두 굽이 바닥을 일정하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태윤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관리국의 고위 간부들만 신는 특제 군화의 소리였다. 소리는 태윤의 바로 뒤에서 멈춰 섰다. 차가운 영압이 태윤의 정수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전부 계획대로군요, 강태윤 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태윤은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백색 제복을 입은 남자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칠성 의회를 상징하는 문양이 빛났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펜던트 조각을 발로 짓밟았다.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태윤의 심장을 긁어내렸다. 태윤의 눈동자가 분노와 절망으로 뒤섞여 붉게 충혈되었다.
하진이는 어떻게 된 거지. 태윤의 목소리가 억눌린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남자는 대답 대신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보랏빛으로 소용돌이치는 연기가 갇혀 있었다. 하진의 영체와 동일한 파동의 빛이 유리벽에 부딪혔다. 태윤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며 가슴이 조여왔다. 남자는 유리병을 태윤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투명한 용기 안에서 하진의 파편이 고통스럽게 요동쳤다.
영핵의 파괴는 곧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남자의 눈동자가 소름 돋는 보랏빛으로 변했다. 그는 유리병을 태윤의 가슴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차가운 유리벽을 통해 하진의 비명이 전해지는 듯했다. 태윤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림자가 입을 막았다. 바닥에서 솟아난 검은 손들이 태윤의 사지를 결박했다. 남자는 몸을 숙여 태윤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태윤의 동공이 극한의 공포로 인해 잘게 떨렸다.
"이제 네가 하진이의 역할을 대신해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