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을 타고 흐르는 열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서하진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서 시작된 검은 낙인이 맥박을 따라 일렁였다. 눈앞의 공간이 파편처럼 조각나며 비틀렸다. 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 대신 눅눅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100년 전의 신월구였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비명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짙은 영기를 두른 서하진이었다. 그는 관리국에 쫓기는 도망자가 아니었다. 하얀 제복을 입고 영핵의 제단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였다.
태윤의 손목이 잘게 떨렸다. 낙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기억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의식을 베어냈다. 하진은 폭주하는 영맥을 억누르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인간들의 배신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영핵과 함께 잠들기를 택한 것이다. 그는 도시의 파멸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지워버린 최초의 관리자였다.
머릿속이 징하게 울렸다. 태윤은 억지로 눈을 뜨며 현실의 감각을 붙잡았다. 어둠 속에서 하진의 눈동자가 기괴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태윤의 턱 끝을 느리게 훑었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손등의 낙인이 쇠사슬처럼 그를 붙들어 맸다. 영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태윤은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었다. 진실을 마주한 충격에 호흡이 가늘게 떨렸다. 하진의 정체는 관리국이 만든 허구의 역사 속에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피해자가 아닌 성역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발등을 찍는 통증으로 다가왔다.
하진이 태윤의 귓가에 고개를 숙였다. 서늘한 숨결이 소름 돋게 번졌다. 태윤은 주먹을 움켜쥐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슴 속의 펜던트가 하진의 영기와 반응하며 거칠게 진동했다. 이것은 단순한 유품이 아니라 그를 깨우기 위한 신호탄이었다.
"내가 너를 깨운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선택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군."
태윤의 말에 하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대답 대신 태윤의 목덜미를 깊게 파고들었다. 낙인의 열기가 정점에 달하며 태윤의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수명을 갉아먹는 영력의 흐름이 온몸의 신경을 자극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박동이었다.
공간의 끝에서 기계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허공을 가르며 푸른색 홀로그램이 반전되었다. 백색 탑의 정점에 있어야 할 의장의 형상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감정이 거세된 기계처럼 무미건조했다. 그의 시선이 태윤의 가슴팍에 머물렀다.
홀로그램의 손가락이 태윤을 가리켰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의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건조한 파동이었다. 태윤은 본능적으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금속의 서늘함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의장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는 태윤이 가진 마지막 조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성 영핵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부품. 그것이 태윤의 부모님이 목숨을 걸고 숨겼던 펜던트의 정체였다. 도시 전체를 제물로 바쳐야만 열리는 문이 눈앞에 있었다.
하진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의장의 형상을 응시했다. 태윤은 하진의 눈에서 짙은 갈망과 혐오를 동시에 읽어냈다. 자신의 생애를 바쳐 지켰던 도시를 다시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역설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의장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고막을 때렸다. 그는 태윤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펜던트를 영핵에 끼워 넣는 순간 신월구의 모든 영혼은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태윤은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완전한 진실과 자유를 얻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어둠 속에 흩뿌려졌다.
태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진은 어느새 태윤의 등 뒤에서 그를 껴안고 있었다. 차가운 팔이 가슴을 압박하며 펜던트를 향해 뻗어왔다. 태윤은 자신의 수명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낙인은 이제 검은 불꽃이 되어 그의 팔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의장의 홀로그램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태윤의 펜던트가 진성 영핵을 가동할 마지막 부품임을 선언했다. 도시의 밤이 붉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영안들이 일제히 태윤이 있는 구역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자, 이제 너의 주인에게 마지막 열쇠를 넘겨라."
의장의 명령과 동시에 하진의 손이 태윤의 손 위에 겹쳐졌다. 펜던트의 잠금장치가 딸깍 소리를 내며 풀렸다. 태윤은 자신의 심장이 멈추는 듯한 환각 속에서 하진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곳에는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무구한 파멸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태윤은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진의 영력이 혈관을 타고 들어와 그의 의지를 잠식했다. 의장의 웃음소리가 기계적인 노이즈를 뚫고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선택의 여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진이 태윤의 손을 이끌어 영핵의 중심부로 가져갔다.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광채가 어둠을 찢어발겼다. 도시 전체의 영맥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태윤은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하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결말입니까."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태윤의 손목을 꺾어 펜던트를 영핵의 틈새로 밀어 넣었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고막을 울렸다. 발밑의 지면이 무너지며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태윤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하진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윤은 허우적거리며 어둠 속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멀리 백색 탑의 꼭대기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영안의 시선이 태윤의 심장을 꿰뚫었다. 정화 위원회의 강제 집행 신호였다. 도시 곳곳에서 퇴마사들의 영식 술법이 전개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진의 기억이 담긴 안개가 흩어지며 현실의 벽이 다시 견고해졌다. 태윤은 바닥으로 추락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하진은 빛의 중심에 서서 태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형체가 점점 투명하게 변해갔다. 태윤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영맥의 과부하가 그의 성대를 얼려버린 탓이었다.
하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태윤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작별도 용서도 아닌 지독한 저주였다. 빛이 사그라지며 방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태윤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손등의 낙인이 희미하게 점멸했다. 수명이 깎여나간 자리에 지독한 허기만이 남았다. 태윤은 펜던트가 사라진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부모님이 남긴 마지막 유품은 이제 도시의 파멸을 부르는 열쇠가 되었다. 복도 끝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윤세희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발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불규칙했다. 태윤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진은의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색 제복을 입은 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세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태윤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태윤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영기가 그녀의 영안에 포착된 것이다. 대원들이 일제히 영식 총의 총구를 태윤에게 겨누었다.
"강태윤 요원,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십시오."
세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태윤의 눈을 응시했다. 태윤은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하진의 깃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만지는 순간 재가 되어 흩어졌다.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관리국의 추적자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창밖으로는 이미 붉은 결계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태윤은 자신의 영핵이 한계치까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하진이 남긴 힘이 그의 혈관을 타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더 이상 인간의 영력이 아니었다.
태윤은 고개를 들어 세희를 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기괴하게 뒤틀려 보였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반전되며 소음이 차단되었다.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태윤은 천천히 검 자루를 고쳐 쥐었다.
"오지 마."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간을 진동시켰다. 세희가 멈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태윤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대원들의 발목을 낚아챘다. 비명과 함께 영식 총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태윤은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건물 외벽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생경했다. 중력을 무시한 움직임은 서하진의 것과 닮아 있었다. 태윤은 자신의 수명이 초 단위로 타들어 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체감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백색 탑의 영안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미명가의 골목으로 접어들자 익숙한 담배 연기 냄새가 났다. 최도현이 낡은 트럭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입에 물린 궐련형 영석이 붉게 타올랐다. 도현은 태윤의 몰골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채 차 문을 열었다.
"결국 그 괴물 놈이랑 사고를 쳤구만."
도현의 목소리에는 자책감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는 태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트럭이 굉음을 내며 폐허가 된 골목을 질주했다. 뒤편에서는 관리국의 추격 차량들이 영력 엔진 소리를 내뿜으며 따라붙었다.
태윤은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백색 탑을 보았다. 그곳에 하진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하진은 이미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낙인이 찍힌 손등에서 서늘한 냉기가 다시 한번 피어올랐다. 태윤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하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도시의 지형이 실시간으로 뒤틀렸다. 건물이 솟아오르고 길이 끊기며 지도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영맥의 과부하가 신월구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도현은 운전대를 꽉 쥐며 욕설을 내뱉었다. 트럭의 계기판이 불꽃을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태윤아, 정신 차려!"
도현의 외침이 멀게 느껴졌다. 태윤은 자신의 의식이 거대한 우물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우물 바닥에는 수만 개의 기억 앰플이 깨진 채 널려 있었다. 그중 하나가 태윤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것은 부모님이 죽던 날의 기록이었다.
화면 속에서 아버지는 펜던트를 태윤의 목에 걸어주며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뒤에서 눈물을 훔치며 짐을 챙겼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 서 있는 하얀 제복의 사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태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하진이었다.
태윤의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 과부하 된 영력이 배출되는 현상에 가까웠다. 진실은 언제나 잔혹한 법이었다.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유품이 사실은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낙인이었다.
트럭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 섰다.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영적 장벽이었다. 정화 위원회의 최정예 요원들이 방패를 앞세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윤세희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태윤을 즉결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담긴 황금색 문서가 들려 있었다.
태윤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세희는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펼쳐 보였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태윤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진은의 검을 뽑아 들었다.
"길 비켜."
태윤의 말에 세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안경 너머로 비친 눈동자에는 원망과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대원들이 일제히 영식 술법의 시동을 걸었다. 허공에 푸른 문양들이 떠오르며 태윤을 압박했다. 태윤은 낙인이 새겨진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안개가 태윤의 몸을 감싸 안았다. 하진의 환영이 태윤의 등 뒤에서 나타나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두 존재의 영력이 하나로 융합되며 폭발적인 파동이 발생했다. 장벽이 유리처럼 깨져 나가며 대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세희만이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의 제복이 찢어지고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다. 그녀는 맨눈으로 태윤의 괴물 같은 모습을 응시했다. 태윤은 그녀를 지나쳐 백색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태윤 씨, 제발 멈춰요!"
세희의 비명이 등 뒤에서 들렸다. 태윤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심장 박동이 느려질 때마다 영력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의 목적뿐이었다.
백색 탑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하늘에서 붉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귀신들의 원혼이 응축된 눈물이었다. 태윤은 탑의 거대한 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강철 문이 종잇장처럼 베어 나가며 내부의 서늘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탑의 로비에는 수천 개의 기억 앰플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신월구 시민들의 기억이었다. 관리국은 평화를 담보로 사람들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태윤은 그 광경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중앙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서하진이 걸어 나왔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선명한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태윤의 수명을 빨아들여 자신의 존재를 고착시킨 것이다. 하진은 다정한 연인처럼 태윤의 뺨을 어루만졌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의 열쇠."
하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태윤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검 끝을 하진의 심장 위치에 갖다 대었다. 하진은 비웃듯 검날을 손으로 잡아 멈춰 세웠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려 태윤의 옷을 적셨다.
태윤은 하진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영핵의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도시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의 신호였다. 탑 외부에서는 퇴마사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는 포성이 들려왔다. 태윤은 마지막 남은 영력을 쥐어짜 내 검을 밀어 넣었다.
하진이 태윤의 목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차가운 숨결이 고막을 파고들어 뇌를 마비시켰다. 태윤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손등의 낙인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붉게 타오르다 소멸했다.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진의 웃음소리가 탑 전체에 울려 퍼졌다. 태윤은 자신의 심장이 멈추는 감각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멀리서 도현의 고함과 세희의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 태윤은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백색 탑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부모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태윤은 손을 뻗어 허공을 잡으려 했으나 손가락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하진의 차가운 손이 다시 한번 태윤의 손을 맞잡았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손길이었다.
도시의 모든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신월구는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겼다. 오직 백색 탑의 정점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광채만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태윤은 마지막 숨을 내뱉으며 하진의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제 다 끝났어."
하진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태윤은 대답 대신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거대한 폭발음이 신월구의 밤을 찢어발겼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을 감싼 영력의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태윤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보았다. 그것은 신월구에 100년 만에 찾아오는 진짜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빛이 닿는 곳에 태윤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하진과 함께 무너지는 탑의 잔해 속으로 가라앉았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난 뒤 탑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구덩이만이 남았다. 그 안에서 은색 펜던트 하나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세희가 비틀거리며 구덩이 근처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펜던트 안에는 태윤의 이름이 아닌 서하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세희는 펜던트를 가슴에 품고 오열했다. 도현은 먼 곳을 응시하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연기가 아침 공기 속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이봐, 강태윤."
도현이 나지막하게 태윤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폐허가 된 도시 위로 까마귀 떼가 불길한 날갯짓을 하며 모여들었다. 신월구의 역사는 오늘부로 완전히 새로 쓰일 준비를 마쳤다.
구덩이 깊은 곳에서 태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진의 차가운 체온이 그의 혈관을 타고 순환하며 멈췄던 심장을 다시 두드렸다. 태윤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서하진이 있었다.
"다시 시작이야."
하진이 태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태윤은 그의 목을 감아쥐며 거칠게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