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릿한 점액질이 바닥을 적셨다.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로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괴물의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태윤은 손에 쥔 진은의 검을 놓칠 뻔했다.
검신이 바닥을 긁으며 불쾌한 금속음을 냈다. 괴물의 거대한 앞발이 천천히 다가왔다. 날카로운 발톱 끝에 낡은 가죽 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아끼던 자수 주머니였다. 매듭 끝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도와다오.
괴물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뇌를 긁는 듯한 파동이 고막을 울렸다. 태윤의 시야가 일렁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위장에서 쓴물이 올라와 식도를 태웠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며 감각이 마비되었다.
태윤아, 제발.
이번에는 명확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괴물은 공격하는 대신 주머니를 내밀었다. 가죽 주머니 안에서 영석의 은은한 광채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퇴마사들이 평생을 바쳐 모으는 자원이다. 하지만 그 기운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방대했다.
태윤의 가슴 속에 숨겨진 펜던트가 요동쳤다. 목 주변의 살점이 뜯겨나갈 듯한 진동이었다. 부모님의 유품은 괴물이 들고 있는 주머니와 공명했다. 은빛 광채가 어두운 제0구역의 공기를 갈랐다.
벽 너머에서 하진의 신음이 들렸다. 그는 검은 낙인에 묶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하진의 안색은 이미 영체가 투명해질 만큼 창백했다. 태윤은 검을 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베어야 한다.
퇴마사의 본능이 귓가에 경고음을 울렸다. 눈앞의 존재는 부모님이 아닌 악령의 덩어리다. 사념이 뭉쳐 만들어진 가짜 환영일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동자에 고인 눈물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괴물의 눈물은 뜨거웠다. 그것은 차가운 영체의 액체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온기가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태윤의 호흡이 가늘어지며 폐부가 조여들었다.
"거짓말이야."
태윤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갈라졌다. 검 끝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처졌다. 괴물은 고개를 비틀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주머니를 든 앞발이 태윤의 무릎 위에 놓였다. 묵직한 압박감이 다리뼈를 짓눌렀다.
검이 너무 무거워.
태윤은 속으로 몇 번이나 주문을 외웠다. 영식을 전개하고 령핵을 타격해야 한다. 하지만 손가락은 제멋대로 경련하며 검자루를 밀어냈다. 부모의 흔적을 제 손으로 찢어발길 용기가 없었다.
괴물의 얼굴 뒤로 아버지의 형상이 겹쳤다. 무뚝뚝하게 태윤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 손길. 그 기억이 독니가 되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관리국이 숨겨온 진실이 이 괴수 안에 있었다.
하진이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낙인이 붉게 타올랐다. 하진의 시선은 태윤의 흔들리는 등을 향했다. 그는 비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비켜, 강태윤."
하진의 목소리에 서늘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태윤의 손에서 진은의 검을 앗아갔다. 검자루에 남은 태윤의 온기가 하진의 손바닥을 태웠다. 하진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안 돼.
태윤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괴물의 눈동자가 하진을 향해 겁에 질린 빛을 띠었다. 주머니를 쥐고 있던 앞발이 허공을 휘저었다. 하진의 눈에는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건 네가 감당할 짐이 아니야."
하진의 냉소적인 어조가 공간을 얼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꽂았다. 괴물의 목소리가 기괴한 비명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모님의 얼굴이 조각나며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태윤은 눈을 감지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심장 한구석이 도려나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진의 검날은 괴물의 흉부를 정확히 관통했다. 연기 속에서 은색 가죽 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괴물의 육체가 먼지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하진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괴물의 심장부를 팠다. 손끝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괴물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구슬이 굴렀다. 그것은 일반적인 영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였다. 신월구 전체의 영맥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느껴졌다. 영계 관리국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진성 영핵이었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영핵을 집어 들었다. 영핵 안에는 부모님의 마지막 기억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태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길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이게 네가 찾던 부모님의 전부야."
하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차갑게 파고들었다. 태윤은 영핵 너머로 붉게 충혈된 하진의 눈을 보았다. 멀리 백색 탑의 영안이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의 지도가 뒤틀리는 진동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하진은 영핵을 쥔 태윤의 손을 덮어 쥐었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계약의 낙인이 검게 점멸했다. 태윤의 가슴 속 펜던트가 깨질 듯이 울부짖었다. 하진은 태윤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이제 선택해, 강태윤."
태윤은 대답 대신 하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손아귀에 힘을 줄수록 하진의 영체는 흐릿하게 흩어졌다. 영핵에서 흘러나온 은빛 줄기가 태윤의 핏줄을 타고 역류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화의 기운이 아니었다. 인간의 육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망령의 집합체였다. 태윤의 목 근처 피부가 검게 변하며 갈라졌다. 하진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는 태윤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계약의 낙인이 두 사람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태윤의 수명이 영핵의 에너지를 받아내기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 하진의 흐릿하던 형상이 다시 선명해졌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멈춰."
하진이 태윤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태윤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하진을 올려다보았다. 입술 사이로 검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는 하진의 뺨에 차가운 손을 가져다 댔다.
"선배는 사라지지 마."
태윤의 낮은 속삭임이 무너지는 폐허 속에 울렸다. 하진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태윤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하지만 태윤은 오히려 영핵을 하진의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영핵의 빛이 하진의 흉부로 스며들었다. 하진의 몸을 감싸던 한기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제0구역의 대기가 얼어붙으며 콘크리트 벽에 성에가 꼈다. 태윤은 급격히 빠져나가는 생명력에 고개를 떨궜다.
멀리서 구둣발 소리가 질서정연하게 들려왔다. 성역 센터의 정화 위원단이 구역을 포위하고 있었다. 가장 앞장선 것은 안경을 고쳐 쓴 윤세희였다. 그녀의 손에는 관리국의 즉결 처형령이 들려 있었다.
"강태윤 요원, 즉시 영체와 분리하십시오."
세희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날카롭게 꽂혔다. 퇴마사들의 영식 술법이 허공에 거대한 원을 그렸다. 하진은 태윤을 품에 안은 채 주위를 경계했다. 그의 눈동자가 귀신의 본능으로 인해 붉게 타올랐다.
하진은 태윤의 귓가에 차가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태윤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것은 위로가 아닌, 포식자의 점유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하진은 세희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 아이는 이제 내 거야."
하진이 태윤의 목덜미를 깊게 깨물었다. 계약의 낙인이 살점을 뚫고 뼈에 새겨지는 소리가 났다. 태윤은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으며 하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주변의 중력이 뒤틀리며 공간이 왜곡되었다.
세희의 명령과 함께 수십 개의 영식 화살이 쏟아졌다. 하진은 태윤을 안은 채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며 두 사람의 신형을 집어삼켰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그들은 침잠했다.
태윤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영핵을 놓지 않았다. 부모님의 비명과 하진의 숨소리가 뒤섞여 귓가를 맴돌았다. 백색 탑의 영안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부릅떠졌다. 도시의 밤이 거대한 눈동자로 변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하진은 태윤의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핥아 올렸다. 그의 혀끝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온기에 태윤은 몸을 떨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의 시작이었다. 하진은 태윤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겹쳐 쥐었다.
"지옥까지 함께 가줄게, 태윤아."
하진은 태윤의 입술에 자신의 차가운 입술을 겹쳤다. 영핵의 마지막 광채가 두 사람을 감싸며 폭발했다. 세희의 비명 소리가 멀어지며 모든 감각이 암전되었다. 태윤은 자신을 옥죄는 하진의 팔에 마지막 힘을 다해 매달렸다.
암흑 속에서 태윤의 펜던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인의 생명력이 끊기기 직전의 마지막 경고등이었다. 하진은 태윤의 잦아드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제 그 누구도 너를 정화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