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광채가 시야를 난잡하게 헤집었다. 가슴팍을 파고든 펜던트가 살점을 태우는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폐허 아래 깊숙이 잠겨 있던 거대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갈라졌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발밑의 지면이 진동하며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신월구의 지도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관리국이 은폐해온 금단의 영역, 제0구역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굽혔다. 가슴 한가운데 박힌 금속 조각이 맥박에 맞춰 진동했다. 피부 아래로 흐르는 영력이 들끓어 올라 혈관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시야가 붉게 점멸하며 주변의 풍경을 비틀어 놓았다. 옆에 서 있던 하진의 형체가 안개처럼 흐릿하게 일렁였다. 차가운 한기가 손목을 타고 넘어와 타오르는 열기를 억눌렀다.
하진이 태윤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아 지탱했다. 창백한 손가락이 옷동을 파고들며 잘게 떨리고 있었다. 굳게 닫혔던 문 너머에서 썩은 내동댕이쳐진 영혼들의 악취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죽음의 냄새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고여 부패한 사념과 증오가 뒤섞인 압력에 가까웠다. 태윤의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비릿한 금속 맛이 감돌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벽면마다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은은한 보랏빛을 내뿜었다.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아났다. 영맥이 뒤틀린 탓인지 공간 전체가 일정한 주기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하진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겁게 바닥을 짓눌렀다. 그의 등 뒤로 흐르던 투명한 영기가 점차 탁한 회색으로 변해갔다.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천장에서 떨어진 영액이 바닥에 닿으며 치익 소리를 냈다. 태윤은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어 고통을 견뎌냈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나온 은빛 빛줄기가 길잡이처럼 어둠을 갈랐다. 하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지며 입술이 검게 타들어 갔다. 그는 자신의 팔을 감싸 쥐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광활한 지하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닥에는 수천 개의 영핵 조각들이 쓰레기처럼 쌓여 산을 이루었다. 빛을 잃고 깨진 보석들은 죽은 자들의 눈동자처럼 공허하게 빛났다. 관리국이 폐기한 실패작들이 이곳에서 서로 엉겨 붙어 거대한 괴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검은 먼지들이 하진의 피부에 닿자마자 불꽃을 튀겼다.
하진의 어깨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투명하던 그의 피부 아래로 검은 핏줄 같은 낙인이 돋아났다. 제0구역의 오염된 영력이 그의 본질을 잠식하려 들고 있었다. 태윤은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영력을 나누어 주려 했다. 그러나 하진은 거칠게 손을 뿌리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지 마, 태윤아."
하진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긁히며 갈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짙은 흑색으로 물들며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주변의 폐기된 영핵들이 하진의 기운에 반응하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의 비명이 환청처럼 들려와 태윤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가슴속 펜던트가 그 비명에 화답하듯 더욱 밝게 타올랐다.
벽면에 붙어 있던 영계 관리국의 휘장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이곳은 정화라는 명목 아래 자행된 학살의 결과물이었다. 수많은 퇴마사와 귀신들이 이 차가운 지하에서 실험체로 소모되었다. 하진의 발치에서 검은 액체가 솟구쳐 올라 그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태윤은 비틀거리며 하진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얼음 덩어리를 만지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얼렸다. 자신의 수명을 깎아내는 영력이 하진의 몸속으로 강제로 흘러 들어갔다. 하진의 가슴팍에 새겨진 낙인이 붉게 점멸하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의 기운이 충돌하며 주변의 공기가 폭발하듯 팽창했다.
하진이 태윤의 멱살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눈가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려 태윤의 뺨을 적셨다. 그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안면 근육이 경련하며 일그러졌다. 손끝이 닿은 태윤의 살결마다 검은 반점이 피어오르며 타올랐다. 하진의 숨결에서 지독한 황의 냄새와 피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이곳은 낙원이 아니라, 우리가 버린 괴물들의 무덤이야."
하진의 고백은 단죄처럼 태윤의 심장에 박혔다. 그는 자신의 몸을 잠식하는 어둠을 보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관리국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진실이 발밑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태윤은 하진의 떨리는 어깨를 더욱 강하게 붙들며 이를 악물었다. 가슴의 통증은 이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뎌졌다.
광장 중앙의 영핵 더미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솟구쳤다. 수만 개의 파편이 뭉쳐지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점성이 강한 검은 점액질이 뼈대를 이루고 그 위로 영기가 덧씌워졌다. 공기를 가르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천장을 뒤흔들며 먼지를 떨어뜨렸다. 태윤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진은의 검을 고쳐 쥐었다.
괴물은 거대한 지네처럼 꿈틀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의 몸체 여기저기에는 아직 소멸하지 않은 인간들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그들은 고통에 찬 표정으로 입을 벌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하진은 그 모습을 보며 구역질을 참으려는 듯 입을 틀어쥐었다. 괴물의 그림자가 두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검은 액체가 바닥을 타고 빠르게 번져와 태윤의 발등을 덮었다. 끈적이는 감촉이 장화를 뚫고 피부를 파고들려 꿈틀댔다. 괴물의 가장 윗부분에 달린 거대한 머리가 천천히 회전했다. 그것은 뼈가 어긋나는 소리를 내며 태윤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태윤의 심장이 한순간 얼어붙는 듯한 압박감에 멈춰 섰다.
괴물의 얼굴 면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재조합되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익숙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윤이 매일 밤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미소와 아버지의 단호한 눈매가 괴물의 살점 위로 선명하게 새겨졌다. 태윤의 손에서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쇳소리를 냈다.
"태윤아, 우리 아들."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 낸 소름 끼치는 음성이 사방에서 울렸다. 괴물은 비대해진 손을 뻗어 태윤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손가락 끝에서는 썩은 고름이 흘러나와 바닥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하진이 비명을 지르며 태윤의 앞을 막아섰지만 괴물의 꼬리가 그를 벽으로 날려버렸다. 태윤은 멍한 눈으로 눈앞의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괴물의 입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벌어지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그 안쪽에는 수천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한 괴물은 눈물을 흘리며 태윤을 향해 기어 왔다. 펜던트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태윤의 가슴을 뚫고 나올 기세로 요동쳤다. 태윤은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을 부딪혔다.
"어째서 이제야 온 거니."
괴물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엄한 어조로 바뀌었다. 거대한 앞발이 태윤의 어깨를 짓누르자 뼈가 비명을 지르며 삐걱거렸다. 하진이 멀리서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검은 낙인이 그의 전신을 묶어 바닥에 고정했다. 태윤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괴물의 검은 액체와 섞여 발등으로 떨어졌다. 괴물은 기괴하게 웃으며 태윤의 목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리를 여기서 꺼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