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공기가 지나치게 달콤했다. 신월구 미명가 특유의 썩은 내나 비릿한 영석 타는 냄새는 흔적도 없었다. 태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고층 빌딩들은 매끄러운 유리를 뽐내며 태양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뒤틀린 영맥 때문에 매시간 변하던 지형은 온데간데없었다. 견고한 아스팔트 위로 사람들이 부딪힐 듯 지나쳐 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망령의 그림자도, 관리국의 통제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100년 전, 대재앙이 일어나기 전의 신월구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기묘한 부유감이 전신을 훑었다. 분명 물리적인 감각이 느껴지는데도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은 영력이 아닌 전기로 빛을 내고 있었다. 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퇴마를 하며 박힌 굳은살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위로 흐르는 영력의 흐름이 평소보다 훨씬 가늘었다. 마치 구멍 난 항아리에서 물이 새어 나가듯, 정체 모를 허공이 자신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늘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며 비아냥거리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태윤의 시선이 머문 곳은 탁 트인 광장의 노천카페였다. 그곳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단정한 셔츠 차림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태윤의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거세게 때렸다. 기억 속 사진보다 훨씬 젊고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누군가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은 이는 서하진이었다. 지금의 창백하고 서늘한 유령이 아니었다. 뺨에는 붉은 혈색이 돌았고, 눈동자는 생기로 가득했다. 하진은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태윤은 그 광경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면서도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 그리고 자신이 지키려 했던 그 귀신과 함께 웃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이 가슴을 조여 왔다.
목구멍 안쪽이 뜨거운 덩어리에 막힌 듯 답답했다. 태윤은 카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영력이 소모될수록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타 들어갔다.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울렸다. 이곳은 환영이다. 머물수록 영혼이 깎여 나갈 장소였다. 하지만 눈앞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태윤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이성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머, 거기 학생. 길이라도 잃었어?"
아버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태윤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태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저 길 잃은 청년을 걱정하는 타인의 시선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하진이 턱을 괴며 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담긴 호기심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태윤의 살죽을 찔렀다. 하진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기운이 아주 독특하네. 꼭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시대를 잃어버린 사람 같아."
하진의 말에 태윤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환영 속의 하진은 태윤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태윤은 아버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테이블 모서리를 짚은 손바닥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인자한 표정으로 태윤을 살피고 있었다. 태윤은 억눌렀던 질문을 쏟아내듯 뱉었다.
"한 번만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어. 나를 사랑해서 떠난 건지, 아니면 실험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맑은 눈동자에 태윤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아버지는 마치 처음 보는 생명체를 관찰하듯 태윤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셔츠 안쪽에 숨겨진 은빛 펜던트였다. 아버지는 천천히 손을 뻗어 태윤의 펜던트를 향해 손가락끝을 세웠다.
"그게 있으면 안 될 텐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 다정한 중저음이 아닌, 수천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기괴한 소음이었다. 주변의 풍경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창하던 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며 검은 액체가 쏟아졌다. 사람들의 얼굴이 뭉개지고 건물들이 촛농처럼 흘러내렸다. 태윤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발이 바닥에 눌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나타난 서하진이 태윤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환영 속의 생기 넘치는 하진이 아니었다. 태윤이 알고 있는, 서늘하고 냉소적인 귀신 선배의 모습이었다. 하진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채 태윤을 다급하게 밀쳐냈다.
"정신 차려, 강태윤. 이건 네 아버지가 아니야. 기억을 먹고 자라는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진의 목길이 태윤의 영혼을 흔들었지만, 태윤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환영 속에서 아버지만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아니, 아버지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카페 테라스를 덮고 태윤의 발밑까지 뻗어 나왔다. 아버지는 기괴하게 꺾인 목을 바로 세우며 태윤의 펜던트를 가리켰다.
"그것이 문을 여는 열쇠다."
아버지가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뇌리에 직접 박혔다. 동시에 태윤의 가슴 위에 닿아 있던 펜던트가 터질 듯한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셔츠 너머로 살점이 익어가는 냄새가 올라왔다. 단순한 유품이라 믿었던 은색 금속이 붉게 달아오르며 태윤의 영력을 폭식하듯 빨아들였다. 펜던트 중심부에 박힌 작은 보석이 눈동자처럼 번뜩이며 주변의 환영을 부수기 시작했다.
태윤의 전신이 경련했다.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심장 근처의 피부가 타 들어가는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진이 태윤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광채가 그를 거칠게 튕겨냈다. 광채는 파동이 되어 100년 전의 신월구를 산산조각 냈다. 아름답던 거리와 아버지는 파편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암흑 속에서 오직 펜던트만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태윤은 뜨겁게 달궈진 펜던트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살이 눌어붙는 감각이 선명했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 큰 공포가 그를 덮쳤다. 펜던트 안에서 수만 명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영계를 여는 통로이자,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었다.
태윤의 시야가 다시 붉게 점멸했다. 멀리서 관리국의 상징인 거대한 영안이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늘 위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고동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태윤은 펜던트를 쥔 채 바닥을 굴렀다. 하진이 멀리서 손을 뻗으며 무언가 외치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열기 속으로 소멸했다. 펜던트의 열기는 이제 태윤의 영핵을 직접 겨냥하고 있었다.
"열쇠를 돌려라, 나의 아들아."
아버지가 아닌 무언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핥았다. 태윤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펜던트가 피부를 뚫고 심장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은빛 광채가 태윤의 눈을 가렸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펜던트 표면에 새겨진 관리국의 비밀 문장이 핏빛으로 변하는 장면이었다. 태윤은 비명을 지르며 펜던트를 뜯어내려 했다.
"안 돼, 건드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