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이 고막을 찔렀다. 진은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그림자가 두 토막 났다. 잿빛 대기 속에 머물던 잔상이 흩어지며 영석 가루가 되어 반짝였다. 강태윤은 검 끝에 맺힌 점성 있는 액체를 털어냈다. 낡은 전투복 소매 위로 내려앉은 입자들이 차가운 빛을 내뿜다 사그라졌다. 태윤은 펜치로 부서진 벽면의 철근을 거칠게 걷어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녹슨 금속의 감촉이 쓰라렸으나 멈추지 않았다.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는 장소는 이제 폐허에 불과했다. 무너진 콘크리트 너머로 썩은 나무 냄새와 흙먼지가 뒤섞여 올라왔다. 손끝이 딱딱한 무언가에 걸리자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팽창했다.
태윤은 숨을 죽인 채 벽 틈 사이를 파헤쳤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은 매끄러운 금속이었다. 흙먼지를 털어내며 그것을 밖으로 끌어냈다. 낡은 가죽 지갑과 그 안에 꽂힌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사진 속 부모님의 얼굴은 습기에 젖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치밀어 올라 목구멍을 압박했다. 사진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구겼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쳐들었다. 신월구의 밤하늘은 영맥의 뒤틀림 때문에 보랏빛 안개가 자욱했다. 이곳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기계음이 고요한 폐허를 찢고 들어왔다. 태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상공을 향했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정화 위원회의 감시 드론이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드론 하단부의 렌즈가 급격히 회전하며 태윤의 안면을 인식했다. 비인가 구역 무단 진입을 알리는 경고음이 고막을 긁어댔다. 태윤의 미간이 깊게 패이며 입술이 얇은 선을 그렸다. 품속의 무전기를 꺼내 전원을 켰다. 치익거리는 잡음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윤아, 거기서 당장 나와.
최도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게 떨리고 있었다. 태윤은 드론의 붉은 빛이 가슴팍을 훑는 것을 지켜보며 대답했다.
아직 찾을 게 남았어.
관리국 놈들이 등급을 깎겠다고 난리야. 영석 수집량도 미달인데 너 진짜 죽고 싶어서 그래?
태윤은 허리춤에 매달린 영석 주머니를 툭 쳤다. 주머니 안에서 서너 개의 영석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한 달 치 채무 이자를 갚기에도 부족한 양이었다. 신월구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영계 관리국은 퇴마사들을 빚의 굴레에 가두었다. 낡은 전투화로 바닥의 돌멩이를 짓이겼다. 발등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불쾌하게 발목을 휘감았다.
영석 몇 개에 내 목숨을 팔 생각은 없어, 형.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드론의 사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으로 몸을 날렸다. 드론은 집요하게 태윤의 궤적을 쫓으며 푸른색 스캔 광선을 쏘아 올렸다. 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두운 복도를 질주했다. 벽면마다 죽은 자들의 원혼이 남긴 손자국들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뒤를 쫓는 기계의 소음이 멀어질 때쯤 발밑의 감각이 달라졌다. 평소의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공허한 울림이 지하 깊은 곳까지 번져 나갔다.
멈춰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나무 판자 사이로 기묘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 손잡이를 쥐며 조심스럽게 판자를 걷어냈다.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피부에 닿는 기운이 바늘처럼 뾰족하게 살을 찔렀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한기는 단순히 기온이 낮은 탓이 아니었다. 강력한 영체가 뿜어내는 본질적인 거부감이었다.
가슴 위에 걸린 펜던트가 예고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낡은 은색 목걸이는 부모님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펜던트의 진동은 점점 강해지며 쇄골을 날카롭게 두드렸다.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정막한 지하실 복도에 울려 퍼졌다. 왼손으로 펜던트를 움켜쥐어 진동을 억눌렀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떨림은 심장 박동과 공명하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지하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을 때 거대한 철문을 마주했다. 문틈 사이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열었다.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벌어지자 그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주변을 기이한 문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남자는 1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우아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소매 끝에 새겨진 금색 자수는 오랜 세월에도 빛을 잃지 않은 채 기묘한 광택을 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위로 서리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태윤은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감긴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경계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에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칠흑 같은 어둠이 쏟아졌다.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태윤을 덮쳤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한기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폐 안의 공기가 얼어붙어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영력이 한순간에 동결되며 몸이 뒤로 꺾였다.
목걸이가 미친 듯이 발광하며 남자의 영체와 공명했다. 남자는 느리게 상체를 일으키며 태윤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닿는 곳마다 검은 서리가 피어올랐다. 마비되어가는 팔을 간신히 움직여 진은의 검을 쥐려 했다. 남자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호선을 그리며 벌어지는 것을 본 순간 힘이 빠져나갔다.
남자의 차가운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드디어 나를 깨웠네.
남자의 손가락이 심장 부근을 강하게 압박했다. 얼음 송곳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통증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남자의 눈동자 속에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펜던트의 진동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살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남자는 태윤의 멱살을 잡고 자신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남자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의 퇴마사.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시야가 급격히 점멸했다. 지하실의 천장이 무너질 듯 진동하며 거대한 영압이 공간을 압도했다. 찢어질 듯한 가슴을 움켜쥐며 남자의 옷자락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