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줄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목을 가로지른 손가락 끝에서 얼음장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태윤은 꺽꺽대며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닿은 살갗이 동상에 걸린 듯 아려 왔다. 시야가 붉게 점멸하며 산소 부족을 알렸다. 비정상적으로 흰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눈동자가 태윤의 망막에 박혔다.
관리국의 개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경추가 비틀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태윤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들며 진은의 검을 고쳐 쥐었다. 검신에 새겨진 문양이 푸른 빛을 내뿜으며 공명했다. 하지만 검날은 남자의 심장이 아닌 허공을 향했다. 태윤은 이를 악물며 검자루에 영력을 쏟아부었다.
착각, 하지 마.
간신히 뱉어낸 목소리가 쇳소리를 냈다. 태윤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영력이 남자의 가슴팍으로 스며들었다. 파괴를 위한 일격이 아니었다. 흩어지려는 영체를 강제로 붙드는 응집의 힘이었다. 남자의 눈동자에 서린 기억의 안개가 일렁였다. 서늘한 손의 압박이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남자가 눈썹을 비스듬하게 휘었다. 태윤은 대답 대신 영력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명치 끝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 전신으로 퍼졌다. 수명을 깎아 타인의 영체를 고정하는 행위는 금기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태윤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의 손목에 새겨진 희미한 낙인이 빛을 발했다. 태윤의 가슴 속에 품은 펜던트가 그 빛에 반응해 요동쳤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조각을 찾은 듯한 격렬한 진동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손목과 태윤의 가슴팍을 번갈아 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서렸던 살의가 기묘한 혼란으로 뒤덮였다.
나를 살려두는 걸 후회하게 될 텐데, 꼬마 퇴마사.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목을 조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태윤은 바닥을 짚으며 거칠게 몰아쉬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남자는 흐릿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태윤이 주입한 영력 덕분에 반투명하던 영체가 실체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지하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멀리서 관리국의 정화 대원들이 내는 기계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태윤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제복 소매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 없는 살결이 기이했다.
가야 해. 곧 들이닥칠 거야.
태윤은 남자를 이끌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신월구의 밤은 매시간 지형이 뒤틀리는 미로였다. 폐허가 된 미명가의 건물 사이를 헤치며 두 사람은 그림자 속을 달렸다. 뒤를 쫓는 영자 탐지기의 신호음이 고막을 자극했다. 태윤은 자신의 영력을 흩뿌려 지나온 흔적을 지웠다.
어느새 도착한 곳은 태화로 외곽의 낡은 상가 건물이었다. 1층의 고물상은 이미 문을 닫아 사방이 적막했다. 태윤은 녹슨 셔터 아래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비빅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태윤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여기가 네 둥지인가?
남자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이며 물었다. 좁은 거실에는 기름때 묻은 부품들과 고대 문자가 적힌 서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태윤은 대답 없이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삼중으로 걸었다. 무거운 정적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긴장이 풀리자 참았던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태윤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손가락 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남자는 거실 한복판에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100년 전의 세월을 간직한 제복 자락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우아하게 물결쳤다. 남자의 시선이 벽면에 걸린 낡은 사진 한 장에 멈추었다.
갑자기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벽지 너머에서 붉은 액체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환영이었다. 남자의 존재 자체가 지닌 거대한 원한이 공간의 기억을 강제로 재생하고 있었다. 낡은 거실 벽면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든 전쟁터로 변했다. 비명과 화염, 그리고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검날의 잔상이 허공을 메웠다.
태윤은 숨을 멈춘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100년 전, 신월구를 피로 씻어냈던 정화 대전의 현장이었다. 쓰러져가는 귀신들과 그들을 베어 넘기는 퇴마사들의 제복이 보였다. 환영 속에서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쓰러진 귀신을 향해 무정하게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 위로 선명한 문양이 나타났다.
태윤의 심장이 멎을 듯 수축했다. 그것은 관리국 고위 간부들에게만 허용되는 특수 문양이었다. 동시에 태윤이 평생을 찾아 헤맨,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제복의 상징이기도 했다. 환영 속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태윤은 자신의 기억 속에 박힌 아버지의 눈매와 똑같은 시선을 마주했다.
이게, 왜 여기에.
태윤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벽면의 환영은 더욱 짙어지며 방 안의 가구들을 집어삼켰다. 서하진은 차가운 눈으로 그 참상을 지켜보다가 태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은 이제 냉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알겠어?
서하진이 태윤의 턱을 잡아 강제로 환영을 보게 했다.
태윤의 영력이 급격히 요동치며 주변의 가구들이 덜덜 떨렸다. 명치 부근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을 잠식했다. 서하진의 손가락이 닿은 턱 끝에서부터 독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환영 속의 아버지는 여전히 무자비한 검신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화가 아닌 도살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네가 믿어온 정의가 저런 거였나.
서하진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태윤은 눈을 감으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기억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참혹한 광경이 망막을 지졌다. 피에 젖은 제복을 입은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태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감각한 시선 속에 담긴 것은 살의가 아닌 공허였다.
태윤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서하진은 그런 태윤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벽을 타고 흐르던 핏빛 환영이 점점 범위를 넓혀갔다. 좁은 자취방은 이제 100년 전의 폐허와 완벽히 겹쳐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은 환청이 아니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서하진이 태윤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댔다. 차가운 숨결이 닿을 때마다 태윤의 영력이 깎여나갔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의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온 진동이 서하진의 영체와 공명하며 거센 불꽃을 일으켰다. 서하진의 눈동자가 그 빛을 받고 기이하게 번뜩였다.
방 문밖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강제로 해제하려 시도했다. 삐비빅거리는 경고음이 고요한 방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태윤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진은의 검을 더듬어 찾았다. 하지만 이미 전신의 감각이 서하진의 냉기에 마비된 상태였다. 서하진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다시 태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님들이 온 모양인데.
서하진의 손가락이 태윤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훑었다. 소름 끼치는 감촉에 태윤의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었다. 현관문의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뜯겨 나갔다. 쏟아져 들어온 밝은 손전등 불빛이 거실을 난잡하게 휘저었다.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무기를 겨누며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강태윤, 반역 혐의로 구속한다.
사내들의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경알에 반사된 차가운 빛을 띠며 윤세희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은 태윤과 그를 감싸듯 선 서하진에게 머물렀다. 세희의 눈동자가 환영을 본 듯 황금색으로 짙게 물들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단검을 고쳐 쥐었다.
저 귀신은 뭐야, 태윤 선배.
세희의 목소리에 서린 살기가 방 안의 온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서하진은 대답 대신 태윤의 어깨를 감싸 쥐며 세희를 비웃었다. 태윤은 입술을 달달 떨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서하진의 손아귀에 힘이 실리며 태윤의 상체를 뒤로 강하게 잡아끌었다.
태윤의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선명한 소리를 냈다.
목걸이에서 흘러나온 영력이 바닥의 핏빛 환영과 섞이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세희와 정화 대원들이 뒤로 밀려나며 자세를 무너뜨렸다. 그 틈을 타 서하진이 태윤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태윤의 눈동자가 그 말에 반응해 크게 확장되었다.
너희 아버지가 죽인 게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서하진이 태윤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영력을 폭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