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거래
침묵이 5초를 넘겼다.
에어컨이 공기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서울의 오후가 기울었다. 빌딩의 그림자가 아스팔트 위로 비스듬히 누워 있고, 37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격자 위의 점들이었다. 질서 정연한 풍경. 도현은 그 질서를 보지 않았다. 책상에 기대어 선 채, 4미터 건너편의 이준을 보고 있었다.
"이준. 넌 알고 있었어?"
조금 전, 이준의 호흡이 한 박자 늦었던 순간에서 시작된 질문이 아직 공중에 떠 있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문 경첩 반대쪽. 항상 그 위치. 오른손이 허벅지 바깥쪽에 밀착된 자세. 무기 접근 자세를 유지한 채 표정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얼굴.
6초. 7초.
도현은 초를 세는 자신을 멈추지 않았다. 세는 것이 무너지지 않는 방법이라는 건 폐공장에서 배운 기술이었다. 물방울을 세다가, 비상등을 세다가, 이준의 호흡을 세다가――지금은 이 남자의 침묵을 세고 있었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같다. 무언가를 세는 한, 도현은 무너지지 않는다.
8초째, 이준이 움직였다.
손이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 USB. 엄지와 검지 사이에 쥔 채, 한 팔을 내밀었다. 4미터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제안. 말 대신 물건을 내미는 것이 이 남자의 방식이었다. 종이컵을 내밀 때도, 니퍼를 들고 케이블 타이를 자를 때도. 도구가 먼저, 말은 나중.
"도련님이 원하시는 것이 대답입니까, 증거입니까."
낮은 목소리.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선택을 강요하는 구조였다. 대답을 원하면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신뢰해야 하고, 증거를 원하면 이 남자의 손에서 나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이준을 경유해야 한다.
도현의 시선이 USB에 고정되었다. 작고, 검고, 무게가 없어 보이는 물건. 그런데 이준의 손가락에 걸린 긴장은 가볍지 않았다. 4초 만에 두 사람을 제압했던 그 손이, 지금은 플라스틱 하나를 무기처럼 쥐고 있었다.
"뭐야 그건."
"오영민의 사내 메신저 백업 일부입니다. 암호화 로그 3건."
"언제부터 갖고 있었어."
"D+2입니다."
도현은 계산했다. 먼저 계산했다. 이준이 오영민의 메신저를 확보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블랙팀 내부 정보에 독립적으로 접근할 경로를 갖고 있거나, 이미 오래전부터 오영민을 감시하고 있었거나. 어느 쪽이든 이 남자는 도현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구출도, 병원 확보도, 증거 수집도. 항상 반 걸음 앞에.
"그러면 병원에서 노트 적고 있을 때, 넌 이미 증거를 모으고 있었다는 거잖아."
도현의 목소리에 감정을 실지 않으려 했다. 실렸다. 끝이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 스스로 인지했다. 납치 이틀 후. 도현이 아직 병원 침대에서 비상등의 깜빡임을 세고 있을 때. 노트에 네 개의 이름을 적고, 물음표를 그리고 있을 때. 이준의 손목을 꿈속에서 붙잡고 있을 때. 이 남자는 이미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보고 체계를 말씀해 주시면――"
"보고 체계가 문제가 아니야."
도현이 잘랐다. 이준의 입이 닫혔다.
분노가 올라왔다. 빠르게. 왜 말하지 않았느냐는 문장이 혀 끝에 닿았다가 삼켜졌다. 분노를 쓰는 타이밍은 도현이 정한다. 지금 쓰면 이 남자에게 감정의 크기를 보여주는 꼴이 된다. 감정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은 협상에서 지는 첫 번째 방법이다.
2걸음 나아갔다. 4미터가 2미터가 되었다. USB를 받았다. 이준의 손가락 끝이 도현의 손바닥을 스쳤다. 맥박이 뛰는 손가락. 인지하지 않으려 했다. 손바닥 안쪽이 기억했다. 폐공장에서 케이블 타이를 잘라줄 때도 이 손이었다.
"증거."
이준의 질문에 대한 도현의 대답이었다. 짧고, 의도적이었다.
"감정은 나중에 처리해."
거짓말이었다. 나중은 오지 않는다. 감정을 '나중에'로 미루는 폴더에는 이미 72시간 분량이 쌓여 있었다. 폐공장의 공포, 아버지의 부재, 이준의 체온에 대한 의존. 그 위에 오늘의 분노가 올라앉았다. 폴더가 터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의 형태가 필요했다. 보류의 형식이 있어야 계산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책상으로 돌아갔다. 노트북을 열었다. USB를 꽂기 전에 멈추었다.
"조건이 있어."
이준의 시선이 미세하게 올라왔다. 내리깔고 있던 눈이 도현의 턱선 높이까지.
"하나. 모든 행동을 보고해. 둘. 독단 금지. 셋. 내 명령 체계 안에서만 움직여."
세 가지 규칙. 공모의 틀. 도현이 설계한 것이다. 이 틀 안에서 이준은 도구이고, 도현은 설계자다. 합방의 30센티처럼. 도현이 정한 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합의이지 의존이 아니다. 적어도 도현의 머릿속에서는.
"수용 범위를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도현의 눈이 좁아졌다. 예상 밖이었다. 이 남자가 규칙에 조건을 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3걸음 뒤에 선 채, 고개를 숙인 자세로, 그러나 질문을 던진 것이다.
"말해 봐."
"독립 행동이 불가피한 경우, 사후 보고를 허용해 주십시오. 도련님의 안전이 즉각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전 승인을 받으면 대응이 늦습니다."
논리적이었다. 경호원의 논리였다. 도현은 3초 동안 그 문장의 구조를 분해했다. '독립 행동'이라는 단어. 이 남자가 규칙 바깥의 공간을 미리 확보하는 것일 수 있었다. 혹은, 진짜로 도현을 지키려는 실무적 요청일 수 있었다.
"허용 범위는 내가 정해. 사후 보고는 6시간 이내."
이준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반문이 더 없었다. 수정 요청 하나를 관철시킨 뒤 깨끗하게 물러서는 방식. 이 남자는 전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 조각만 가져간다.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그 일관성이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불안했다.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규칙 바깥에서 자기 규칙을 운영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규칙 안에서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거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USB를 꽂았다.
암호화 파일 3건. 확장자가 낯설었다. 이준이 가져온 복호화 키로 1건만 열 수 있었다. 나머지 2건은 별도의 키가 필요했다.
"이 2건은?"
"제가 확보하지 못한 키입니다. 경로가 다릅니다."
1건을 열었다. 메신저 로그. 오영민 발신. 수신자는 번호만 남아 있고 이름은 없었다.
"D-Day 루트 확인. 성수역 이면도로. 2시 이후."
타임스탬프: D-3.
도현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추었다. 화면의 글자가 데스크 램프 빛 아래에서 선명했다. 성수역 이면도로. 오후 2시. 그것은 도현이 갤러리 '무진'에서 나와 걷던 바로 그 경로였다. 경호를 빼달라고 요청하고, 혼자 걷던 그 길. 월 2회, 화요일, 경호 배제 확률이 높은 루트.
내 잠행 루트가 3일 전에 외부로 나갔다.
누군가가 도현의 패턴을 분석하고, 가장 취약한 순간을 골라, 루트를 넘겼다. 그 누군가는 도현의 잠행 패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갤러리 방문 주기를 아는 사람. 경호 배제 요청을 처리하는 사람.
"이 루트를 아는 사람의 범위가 어디까지야."
"전담 경호원, 보안 담당, 비서실 경호 관리 라인. 최대 5명입니다."
"5명." 도현은 그 숫자를 노트에 적었다. "좁혀야 해."
나머지 파일 2건의 속성을 확인했다. 열 수는 없지만 파일 헤더의 메타데이터는 읽을 수 있었다. 두 번째 파일의 수신자 필드에 이니셜이 남아 있었다.
C.D.
도현은 화면을 3초간 보았다.
차도진.
형의 이니셜이 배신의 수신함에 들어 있었다. 알파벳 네 획. 그 네 획이 도현의 가슴 안쪽에 선을 그었다. 노트에 적기 전에 손이 멈추었다. 적으면 사실이 된다. 사실이 되면 되돌릴 수 없다. 형이 관여했다는 가능성이 잉크 위에 올라서는 순간, 도현의 세계에서 '형'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뀐다.
적었다. 왼손으로. 글씨가 기울어져 있었다. 감정이 손에 새고 있었다. 인지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 이준의 호흡이 들렸다. 에어컨 소리 위에 얹힌 호흡.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하게 들렸다. 이 남자의 호흡은 어둠에서도, 빛에서도, 배신의 증거 앞에서도 같은 간격이다.
"이준."
"예."
"C.D.가 누군지 알아?"
2초. 이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가 미세하게 숙여졌다. 대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대답의 무게를 재고 있는 침묵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추측은 보고 대상이 아닙니다."
도현은 의자를 돌려 이준을 보았다. 이 남자는 알고 있다.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도현이 스스로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도현이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이 남자는 선택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감정은 나중에 처리한다고 했다.
노트를 펼쳤다. 날짜, 수신자, 내용. 오영민→C.D. D-3. 성수역 이면도로. 적는 것이 세는 것의 다른 형태였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계산.
C.D.라는 두 글자가 노트 위에서 도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그 이니셜의 주인이, 이미 도현을 올려다보는 것 이상의 카드를 쥐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