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 문틈으로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세바스티안의 탐지기가 뿜어내는 붉은 안광이 어둠을 갈랐다. 킬리안의 무릎 위에서 아이리스는 몸을 바짝 웅크렸다. 털 끝이 삐죽하게 솟으며 목 뒷부분이 서늘해졌다.
공작님, 황실의 명령입니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마차 벽을 날카롭게 긁었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고양이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작은 고동이 손목까지 전해졌다. 그는 창밖을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입술을 뗐다.
내 사유지에서 황실법을 논하는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공기를 짓눌렀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마차 내부를 기점으로 팽창했다. 붉은 탐지기의 빛이 영역의 경계에 닿아 맥없이 흩어졌다. 세바스티안의 구두 굽이 자갈 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사관의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킬리안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무릎 위의 고양이를 보았다. 보석 같은 벽안이 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짐승의 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투명한 지성이었다.
이것은 짐승이 아니라 오염원입니다.
세바스티안이 다시금 마차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킬리안의 손가락이 검 손잡이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금속음이 고요한 새벽녘의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 퍼졌다. 세바스티안의 손등 위로 푸른 마력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더 다가오면 침입자로 간주하겠다.
킬리안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논리적인 경고이자 거부할 수 없는 선고였다. 마차 밖의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고쳐 쥐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손가락 사이로 제 앞발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발바닥에 닿는 맥박만큼은 뜨겁게 요동쳤다. 세바스티안은 분노를 삭이는 듯한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며 자갈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루미나리스의 성문을 지날 때까지 킬리안은 침묵을 지켰다. 블랙 로즈 공작저에 들어서자 백색 대리석의 향취가 코를 찔렀다. 인공 기후 제어 장치가 뿜어내는 정화된 공기는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마차가 멈추고 킬리안이 아이리스를 안아 든 채 내렸다.
순백의 복도는 구두 소리를 집어삼킬 듯 고요했다. 레나르트가 고개를 숙이며 킬리안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공작의 발걸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보폭을 유지했다. 서재 문이 열리자 코끝을 자극하는 진한 서향이 밀려왔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책상 위 대리석 판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장갑을 벗어 던지고 은제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서재 안의 긴장을 대변했다. 수건으로 손을 닦은 그가 아이리스의 앞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이제 대답을 들어야겠군.
그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기록 장치를 꺼내 놓았다. 에반스 백작의 문장이 새겨진 장치는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킬리안의 손끝이 장치의 표면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아이리스는 앞발을 뻗어 그 장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장치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공중에 푸른 홀로그램을 그렸다. 에반스 백작의 야윈 얼굴이 허공에서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킬리안, 자네에게 이 기록이 닿기를 바라네. 백작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정화 전쟁의 진실은 뒤집혔네.
아이리스의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숨이 가빠졌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 속보다 훨씬 더 처절했다. 기록 속의 백작은 품 안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가문의 비보이자 저주를 풀 유일한 열쇠였다.
내 딸을 부탁하네. 그녀가 기록의 주인일세.
영상은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서재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숨을 조였다. 킬리안은 미간을 짚은 채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유영하다 아이리스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에반스 백작은 자네를 내게 팔았군.
그의 입술 끝이 냉소적으로 호선을 그리며 비틀렸다. 킬리안은 책상 아래 비밀 칸에서 은으로 된 성배를 꺼냈다. 성녀의 눈물이 담긴 성배는 푸른 빛을 내뿜으며 공명했다. 아이리스의 몸속에 깃든 아나테마의 마력이 그 빛에 반응했다.
저주받은 짐승으로 내 곁에서 숨어 살겠나.
킬리안이 성배를 아이리스의 코앞까지 천천히 밀어붙였다. 성배의 서늘한 기운이 콧등을 스치자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아니면 인간으로 돌아와 반역자의 낙인을 짊어지겠나. 그의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턱밑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선택은 자네의 몫이다.
성배 안의 액체가 소용돌이치며 눈부신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는 앞발을 내밀어 은제 성배의 테두리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킬리안의 눈동자 속에서 기묘한 기대감이 번뜩이며 요동쳤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마력을 끌어모아 성배 안으로 쏟아부었다. 에테르 링이 비명을 지르며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서재의 모든 유리창이 마력의 파동에 못 이겨 잘게 떨렸다. 킬리안은 밀려나는 공기 속에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이리스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짐승의 가죽이 찢어지고 뼈가 재구성되는 통증이 전신을 훑었다. 목구멍을 타고 인간의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으나 이를 악물었다. 빛이 잦아들며 대리석 바닥 위로 은빛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시트 한 장 걸치지 못한 알몸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아이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킬리안은 자리에 앉은 채로 그녀의 전신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의 절대 영역이 해제되며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채웠다.
이것이 자네의 대답인가.
킬리안이 자신의 제복 상의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던졌다. 묵직한 옷감이 살결에 닿자 비로소 현실감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아이리스는 옷깃을 여미며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결코 흔들리지 않는 명징한 의지였다.
기록은 살아남는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그녀의 손가락이 킬리안의 구두 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킬리안은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으며 맥박이 빨라졌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뒤로 잡아당겼다.
그 기록 때문에 자네는 오늘 죽을 수도 있었다.
공작의 손길은 거칠었으나 시선은 타오를 듯 뜨거웠다. 아이리스는 아픔을 참으며 그의 목덜미를 손톱으로 깊게 긁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타버릴 듯한 밀도로 가득 차올랐다. 창밖에서는 세바스티안의 군대가 저택을 포위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부수는 굉음이 복도를 타고 서재 앞까지 도달했다. 레나르트의 다급한 외침이 문 너머에서 파편처럼 흩어졌다. 킬리안은 아이리스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이 다가서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를 주인으로 삼은 대가는 혹독할 거다.
아이리스는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개어 눌렀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차가운 마력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서재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황실 근위대원들이 들이닥쳤다. 킬리안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검을 뽑아 문 앞을 막아섰다.
누구든 이 선을 넘는 자는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킬리안의 검 끝에서 푸른 뇌전이 튀어 올라 바닥을 갈랐다. 근위대원들이 주춤하며 거리를 벌리자 세바스티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황제의 직인이 찍힌 체포 영장이 들려 있었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등 뒤에서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조사관님, 제 가문의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서재 안의 모든 소음을 단번에 잠재웠다. 그녀는 킬리안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성배를 높이 치켜들었다. 성배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근위대원들의 눈을 멀게 할 듯 터졌다. 세바스티안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리며 뒷걸음질 쳤다.
성배가 선택한 것은 공작이 아니라 나니까요.
아이리스의 선언과 함께 성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서재의 대리석 바닥에 깊게 박혔다. 킬리안의 입가에 기괴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아주 천천히 번졌다. 그는 검을 고쳐 쥐며 세바스티안의 심장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