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숲 네벨의 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 차가웠다. 성벽 위 아버지가 넘긴 금서의 책장이 바람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종이 사이로 흘러나온 검은 마력이 뱀처럼 숲의 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코트를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맨살에 닿는 모직의 까슬한 감촉이 생경했다.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감각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발가락 사이로 스미는 흙의 냉기가 머릿속을 맑게 깨웠다.
나무 뒤편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세바스티안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안개를 헤치며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균열이 간 검은 마력석이 쥐어져 있었다. 조사관의 단정한 제복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 누더기가 된 상태였다. 그가 입가를 괴상하게 뒤틀며 마력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세바스티안의 목이 비정상적으로 굵어지기 시작했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근육을 강제로 부풀렸다. 등 뒤로 돋아난 검은 날개가 나무줄기를 쳐내며 굉음을 냈다. 눈동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타오르는 증오만이 남았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했다. 거대한 괴수가 포효하자 대기가 진동하며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심장 근처에서 박동하던 에테르 링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금서에 적힌 마지막 정화의 주문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가문의 생명력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금기였다. 주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체내의 모든 마력을 쏟아내야 했다. 다시 고양이로 돌아가거나,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아이리스는 깊은 숨을 내쉬며 가슴 속에 손을 뻗었다. 투명한 은빛 고리가 갈비뼈 사이를 뚫고 밖으로 끌려 나왔다. 영혼이 깎여 나가는 듯한 통증에 무릎이 꺾였다. 시야가 붉게 점멸하며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테르 링은 공중에서 가늘게 떨리며 주변의 오염된 공기를 밀어냈다.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지탱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킬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아이리스의 은색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절대 영역이 아이리스를 감싸며 검은 미아즈마를 차단했다. 하지만 영역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아이리스의 마력 회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만두세요. 당신의 영역이 무너지고 있잖아요."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떨렸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는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차가운 금속 단추가 뺨에 닿아 서늘한 감각을 일깨웠다. 킬리안의 턱 끝이 아이리스의 머리칼에 닿았다. 그는 낮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은 채 괴수의 돌진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내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킬리안의 짧은 대꾸와 함께 순백의 마력이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괴수의 발톱이 허공을 가르며 그의 어깨를 스쳤다. 붉은 선혈이 하얀 대리석 같은 공작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리스의 시야에 비친 피의 색깔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다. 입술을 깨물며 그녀는 다시금 고대 언어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주문이 한 음절씩 더해질 때마다 숲의 안개가 걷혔다. 세바스티안이었던 괴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긁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킬리안의 등 뒤를 노리고 허공을 갈랐다. 킬리안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리스를 더 깊숙이 품에 안았다. 그의 체온이 식어가는 아이리스의 감각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나의 영지가 그대의 눈동자 속에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곳의 기사가 되리라. 킬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등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거대한 방패를 형성했다. 괴수의 공격이 방패에 부딪혀 불꽃을 튀기며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마지막 음절을 내뱉었다. 에테르 링이 빛을 발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빛은 발밑에서부터 시작되어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갔다. 안개 숲 전체가 하얀 광휘에 휩싸여 소리 없이 진동했다. 세바스티안의 몸을 휘감고 있던 흑마법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성벽 위에서 비웃던 레나르트의 그림자 역시 빛에 닿아 스러졌다. 그들의 육신은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갔다. 오염된 대기가 정화되며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황궁의 높은 첨탑까지 정화의 물결이 도달하는 것이 보였다. 제국을 뒤덮고 있던 기괴한 변종들이 빛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아이리스는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손등에 새겨졌던 결합의 인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차갑게 식었다.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던 마력이 한계에 도달해 흩어졌다. 전신을 덮고 있던 킬리안의 코트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시야가 급격히 낮아지며 주변 사물들이 거대해졌다. 다섯 손가락 대신 짧고 복슬복슬한 앞발이 보였다. 아이리스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의 단단한 팔에 안겼다. 익숙한 항마력 향수 냄새가 코끝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몸을 덮친 극한의 피로감이 의식을 어둠 속으로 끌어내렸다. 작고 하얀 고양이가 된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킬리안은 피로 물든 코트를 걷어내고 작은 생명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고양이의 젖은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정화의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성벽 위 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낡은 금서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킬리안은 품 안의 고양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성벽을 향해 걸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맑은 이슬이 맺히며 풀꽃이 피어났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르릉 소리를 냈다. 인간으로 돌아왔던 짧은 기억이 꿈처럼 아스라하게 멀어졌다. 하지만 킬리안이 남긴 마지막 대사만큼은 귓가에 선명했다. 그는 고양이의 귀 끝에 입술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이제 돌아가자, 나의 작은 주인님."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눈동자에는 전보다 더 깊은 욕망이 서려 있었다. 멀리서 황실 근위대의 말굽 소리가 지면을 울리며 다가왔다. 세바스티안의 소멸과 정화의 파동은 결코 숨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 킬리안은 고개를 들어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숲의 입구를 막아섰다.
이제 제국 전체가 그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신으로 모시게 될 터였다. 공작은 품 안에서 잠든 고양이를 보호하듯 망토 안으로 완전히 숨겼다. 근위대장 세드릭이 이끄는 선발대가 숲 입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기괴하게 변해버린 지형과 사라진 조사관의 흔적에 멈춰 섰다. 킬리안은 피 묻은 검을 바닥에 꽂으며 그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절대 영역이 다시금 견고하게 펼쳐지며 근위대의 접근을 막았다. 그 누구도 공작의 허락 없이 이 숲의 경계를 넘을 수 없었다. 고양이가 된 아이리스의 꼬리가 그의 팔목을 느릿하게 감싸 쥐었다. 세드릭이 말에서 내려 공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시선이 공작의 망토 사이로 비친 하얀 털 뭉치에 머물렀다.
"공작님, 황제 폐하께서 당신과 그 짐승을 압송하라 명하셨습니다."
킬리안의 입가에 서늘한 비웃음이 걸리며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짐승이라니,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군. 그의 말 한마디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으며 근위대원들이 뒷걸음질 쳤다. 공작은 아이리스의 머리를 가볍게 누르며 세드릭의 목에 칼날을 겨누었다.
아이리스는 잠결에 들려오는 고함 속에서도 평온을 느꼈다. 킬리안의 품 안은 그 어떤 요새보다 견고하고 따뜻했다. 그가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발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공작의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검은 구멍의 박동은 여전했다. 정화의 빛조차 그의 내면에 뿌리 내린 오염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아이리스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옷자락을 앞발로 꾹꾹 눌렀다. 숲의 안개가 다시금 그들을 감싸며 외부의 시선을 차단했다. 킬리안은 세드릭을 무시한 채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곳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가문의 비밀과 성배의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금서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그들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책장이 바람에 휘날리며 마지막 페이지의 감춰진 문구가 드러났다. 아이리스는 희미하게 빛나는 글자를 보며 꼬리를 가늘게 떨었다. 그것은 에반스 가문의 인장 뒤에 숨겨진 킬리안 가문의 저주에 관한 기록이었다. 정화의 성배가 사실은 사람의 영혼을 먹고 유지된다는 문장이 붉게 번졌다. 킬리안의 손등에 새겨진 결합의 인장이 검게 변하며 일렁였다.
공작의 품 안에서 아이리스는 작게 몸을 웅크렸다. 그의 심장 소리가 점점 더 빠르고 불규칙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킬리안은 자신의 손등을 망토 아래로 감추며 숲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무들이 그들의 뒤편에서 거대한 벽을 만들며 길을 지워버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근위대의 고함 소리가 안개 속으로 잦아들었다.
킬리안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금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기괴한 무늬를 그려냈다. 그것은 정화의 힘이 아닌, 세바스티안이 보여주었던 것과 닮은 어둠이었다.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의 턱 끝을 쳐다보았다. 공작의 입술이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며 단 하나의 단어를 내뱉었다.
"먹어치워."
그의 손등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작은 고양이를 덮쳤다. 아이리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킬리안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고양이의 이마에 닿았다. 검은 연기가 걷힌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공작은 텅 빈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그림자가 숲 전체를 뒤덮으며 하늘의 태양마저 가려버렸다. 에스테리아 제국의 하늘에 검은 달이 떠오르며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정화된 줄 알았던 숲의 꽃들이 검게 타버리며 악취를 풍겼다. 킬리안은 바닥에 떨어진 아이리스의 목걸이를 집어 들고 입을 맞췄다. 그의 등 뒤로 수천 개의 검은 날개가 돋아나 숲의 나무들을 으깨버렸다.
"이제 누구도 너를 찾아낼 수 없어."
킬리안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공간이 비틀리며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그는 주저 없이 그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숲에는 찢겨나간 금서의 조각들만이 나비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멀리서 달려오던 근위대원들의 몸이 이유 없이 터져나가며 숲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제국의 가장 고결했던 영웅이 가장 추악한 마수로 변해 사라진 순간이었다.
무너진 성벽 아래에서 작은 은색 방울 하나가 굴러다녔다. 그것은 아이리스가 고양이 시절 목에 걸고 있던 유일한 유품이었다. 방울 안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살려달라는 애원도, 도망치라는 경고도 아니었다. 그것은 킬리안의 진짜 이름을 부르는 아이리스의 마지막 부름이었다.
방울이 멈춘 곳에 검은 발 하나가 나타나 그것을 짓밟았다. 부서진 방울 조각 위로 킬리안의 구두가 지나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땅이 갈라지며 용암 같은 마력이 솟구쳤다. 제국의 멸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루미나리스 성당에서 울려 퍼졌다.
"기다려, 아이리스."
킬리안이 검을 뽑아 허공을 가르자 제국의 결계가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는 무너지는 하늘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의 품 안에는 다시금 작은 하얀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의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채 붉은 보석처럼 굳어 있었다. 공작은 인형처럼 굳어버린 짐승을 소중히 안고 불타는 황궁으로 향했다.
성문 앞에 도착한 킬리안이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수백 명의 목숨이 단숨에 낙엽처럼 쓸려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는 피의 바다를 지나 황제의 알현실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옥좌에 앉아 떨고 있던 카시안 3세가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질렀다. 킬리안은 황제의 발치에 고양이를 내려놓으며 검 끝을 그의 목에 겨누었다.
"성배를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