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구름이 폐부 깊숙이 박혔다.
무너진 제단 너머로 비릿한 금속음이 들렸다.
아이리스는 앞발을 딛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킬리안의 망토가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장갑 위로 붉은 액체가 배어 나와 바닥을 적셨다.
부러진 석재 조각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킬리안의 시선이 천천히 아이리스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초점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차가운 손이 아이리스의 젖은 털을 감싸 안았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그는 아이리스를 가슴팍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검은 코트 너머로 불규칙한 고동이 전해졌다.
킬리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게 갈라졌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결의가 날카롭게 맺혔다.
그의 어깨너머로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백색 대리석 복도에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나르트가 황실 마법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푸른빛을 내뿜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배신자의 눈등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공작저의 충직한 집사는 더 이상 없었다.
그는 킬리안의 몰락을 즐기듯 입술을 비틀었다.
마법사들의 에테르 링이 공명하며 빛을 냈다.
지하 감옥의 공기가 순식간에 희박해졌다.
킬리안이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절대 영역이 미세하게 파동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목덜미 근처에서 털을 세웠다.
코끝을 찌르는 마력 오염원이 사방에 가득했다.
킬리안의 얼굴색이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의 피부 위로 검은 반점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절대 영역은 오염을 밀어내는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독기를 스스로 흡수하는 저주였다.
그는 제국의 정결을 위해 자신을 깎아내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가슴 안쪽이 송곳에 찔린 듯 저렸다.
그의 결벽증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오염이 한계치에 다다르자 킬리안이 휘청였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레나르트가 지팡이를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마력의 화살들이 일제히 킬리안을 겨냥했다.
아이리스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작은 몸 안에서 잠들어 있던 마력이 깨어났다.
에반스 가문의 비기가 혈관을 타고 요동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백의 빛으로 타올랐다.
고양이의 형상이 흐릿해지며 빛무리로 변했다.
킬리안의 품 안에서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오염된 가슴 위에 놓였다.
정화의 마력이 킬리안의 어둠을 감싸 안았다.
그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더러워져도 괜찮아요.
내가 당신의 모든 어둠을 핥아줄 고양이가 될 테니까.
킬리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두 사람의 마력이 맞닿아 거대한 소용돌이를 쳤다.
검은 장미 덩굴이 백색 마력 위를 뒤덮었다.
레나르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법사들의 결계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지하에서 시작된 진동이 황궁 전체를 흔들었다.
아이리스의 등 뒤로 거대한 환영이 솟아올랐다.
달빛을 머금은 순백의 늑대가 포효를 내질렀다.
킬리안의 검 끝에서 흑장미가 만개하며 뻗어갔다.
두 가문의 힘은 서로를 파괴하는 극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염된 세상을 끝낼 유일한 완성형이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미나리스의 하늘 위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늑대와 장미가 얽혀 제국을 뒤덮었다.
수도 전체가 숨을 죽인 채 그 빛을 응시했다.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니었다.
그는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마법사들을 베어 넘겼다.
레나르트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마력이 소진되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황실 근위대원들이 저 멀리서 몰려오고 있었다.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맹세가 심장을 울렸다.
아이리스는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부서진 제단의 잔해들이 공중에 둥둥 떠올랐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새로운 결계가 형성되었다.
에반스 가문의 인장이 하늘 위에서 명멸했다.
황궁의 종소리가 비상 상황을 알리며 울렸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안은 채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들의 발밑에서 검은 불꽃과 백색 안개가 섞였다.
추격자들의 마력이 그들의 영역에 닿자마자 소멸했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마력이 킬리안과 하나가 됨을 느꼈다.
그의 심장 박동이 자신의 것과 일치하게 뛰었다.
킬리안의 피부를 덮었던 반점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 카시안이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리며 번뜩였다.
아이리스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가문의 멸문을 지시했던 그 얼굴을 기억했다.
킬리안의 검기가 황궁의 첨탑을 향해 쏘아졌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석재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비명과 환호가 뒤섞인 혼란이 광장을 메웠다.
아이리스의 마력이 마지막 불꽃을 내뿜었다.
백색 늑대의 형상이 황궁 정문을 산산이 부쉈다.
킬리안은 그대로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황궁 기사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 달려들었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품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손등에 희미했던 인장이 짙게 각인되었다.
결합의 인장이 완성되며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킬리안이 그녀를 보호하듯 망토로 감싸 안았다.
그가 든 검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길을 냈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목을 끌어안으며 숨을 골랐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시작임을 알았다.
수도 루미나리스의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황실의 거대한 비공정이 나타났다.
비공정의 포문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열렸다.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의 차가운 입술에서 결연한 의지가 전해졌다.
아이리스는 다시 한번 마력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들의 발밑으로 거대한 공간 균열이 입을 벌렸다.
비공정에서 발사된 마력포가 대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킬리안은 균열 속으로 주저 없이 발을 내디뎠다.
아이리스는 그 순간 황제의 일그러진 안색을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승리의 확신이 담긴 미소가 어렸다.
공간이 뒤틀리며 두 사람의 형체가 흐려졌다.
폭발의 굉음이 그들이 머물던 자리를 집어삼켰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 카시안은 난간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그의 발밑으로 킬리안의 부러진 검 조각이 떨어졌다.
검 조각에는 에반스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황실의 비밀 지하 서고가 통째로 불타올랐다.
기록관 가문의 마지막 복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어둠 속에서 킬리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이 그의 오염된 심장을 계속해서 씻어냈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금빛으로 빛났다.
그는 자신을 옥죄던 결벽증의 굴레를 스스로 끊어냈다.
두 사람을 실은 마력의 파동이 제국 경계를 넘었다.
황궁 정원에는 검은 장미가 가득 피어올랐다.
장미의 가시마다 황실의 죄악이 피처럼 맺혔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심장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그녀는 고양이의 본능처럼 그의 옷깃을 핥았다.
킬리안의 낮은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공명했다.
공간 이동의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숲이었다.
안개 숲 네벨의 깊은 곳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아이리스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인간의 다리를 느꼈다.
저주가 풀리는 감각이 전신을 짜릿하게 훑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를 보았다.
킬리안은 서둘러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를 덮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고대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 위에는 죽은 줄 알았던 아이리스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황실 금서고에서 사라진 금서가 들려 있었다.
아이리스의 숨이 순간적으로 턱 하고 막혀 왔다.
아버지가 금서를 펼치자 숲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