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제단의 공기는 폐부를 찌르는 얼음 조각 같았다. 사방을 메운 검은 마력석들이 비릿한 금속취를 풍기며 빛을 삼켰다. 차가운 대리석 제단 위에 눕혀진 몸 위로 소름이 돋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이 척추를 타고 머리칼 끝까지 번졌다. 시야가 거꾸로 뒤집힌 채로 천장의 기괴한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수천 마리의 고양이가 산 채로 타오르는 정화의 불꽃. 그 중심에 선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세바스티안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흐릿하게 번진 동공 너머로 질척이는 욕망이 소용돌이쳤다.
손목을 결박한 마력 구속구가 살을 파고들었다. 비틀린 마력이 혈관을 타고 흐를 때마다 내면의 에테르 링이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혀끝이 마르고 목구멍이 꽉 막힌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세바스티안의 손가락이 눈가에 닿았다. 얇은 가죽 장갑의 서늘한 질감이 눈꺼풀 위를 스치자 소스라치는 전율이 일었다. 그는 마치 가장 아끼는 보석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눈 주변을 더듬었다. 입가에 걸린 비틀린 호선이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웠다.
성배를 완성하기 위해선 가장 순수한 기록자의 눈이 필요하단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고막을 긁어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은제 나이프가 제단의 마력을 받아 푸른 빛을 내뿜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찢으며 다가왔다. 눈을 감으려 했으나 의지는 마력의 힘 앞에 무력하게 꺾였다. 강제로 열린 시야 속으로 제단 너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화려한 금실로 장수와 평안을 수놓은 예복. 그 끝자락에 묻은 핏방울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청결함이 오히려 구역질을 유발했다.
에스테리아의 황제, 카시안 3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는 규칙적이었고 단호했다. 황제의 뒤편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사내가 보였다. 블랙 로즈 공작저의 모든 규칙을 관리하던 집사, 레나르트였다. 평소의 정중한 구부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빳빳하게 고개를 든 채 황제의 곁에서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 안쪽이 도려나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믿었던 이의 배신은 칼날보다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레나르트의 시선이 제단 위의 몸을 훑었다. 한때 공작저의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던 예우는 흔적도 없었다. 그는 마치 실험실의 표본을 보듯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이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규칙을 어겼는지 아십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공작의 결벽증을 오염시킨 존재에 대한 혐오가 짙게 깔려 있었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제가 제단 옆에 멈춰 섰다. 그는 세바스티안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이리스, 네 아버지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지. 황제의 낮은 음성이 제단 전체를 공명시켰다. 킬리안의 아버지가 네 아버지를 살리려 했던 그 밤을 기억하느냐. 뇌리를 스치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타오르는 서고와 피비린내 나는 복도.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킬리안의 아버지는 가짜 시신을 내세워 에반스 백작을 빼돌리려 했다. 황제의 손가락이 제단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규칙적인 타격음이 심장 박동을 옥죄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내게 밀고한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지. 황제의 시선이 슬며시 레나르트에게 향했다. 레나르트의 입꼬리가 더욱 깊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품 안에서 낯익은 문장이 새겨진 인장을 꺼내 보였다. 에반스 가문의 기록관만이 가질 수 있는 은빛 인장이었다.
네 아버지를 죽인 건 공작이 아니라, 네가 믿고 싶어 했던 이 제국의 평화란다.
황제의 선언이 가슴 중앙을 관통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폐가 팽창하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배신이 아니라, 제국이 세운 거대한 질서 아래 압살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레나르트는 킬리안의 곁에서 수십 년을 숨죽이며 기회를 엿보았다. 머릿속이 수천 개의 바늘로 찔리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극심한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치솟았다.
세바스티안이 나이프를 높이 들이올렸다. 제단의 마력 회로가 붉게 타오르며 공명을 시작했다. 주변의 산소가 급격히 희박해졌다. 입을 벌려 공기를 갈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미아즈마뿐이었다. 킬리안의 심장을 좀먹던 그 오염의 근원이 바로 이곳이었다. 황실은 정화를 명목으로 가장 추악한 어둠을 배양하고 있었다. 에반스 가문의 눈은 그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성배를 여는 마지막 열쇠였다.
세바스티안의 눈앞으로 칼끝이 내려앉았다. 금속의 서늘한 기운이 눈동자 표면에 닿는 순간, 전신이 경직됐다. 모든 감각이 칼끝에 집중되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본능적인 공포를 거부했다. 레나르트는 그 광경을 즐기듯 뒷짐을 지고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곧 위대한 정화의 시대가 다시 열릴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광신도처럼 들떠 있었다.
그때였다. 거대한 폭발음이 황궁 지하를 통째로 흔들었다.
천장에서 먼지와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견고하던 마력 결계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안의 손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황제의 미간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대리석이 박살 나는 굉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어떤 예법도, 규칙도 담기지 않은 파괴적인 위력이었다. 결벽증 공작이 결코 허용하지 않을 무질서한 소음이 제단을 향해 쇄도했다.
무거운 철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날아갔다. 먼지 구름 사이로 푸른 안개처럼 번지는 마력이 보였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었다. 평소보다 수십 배는 더 강력하게 응축된 정화의 힘이 공간을 압도했다. 그의 걸음마다 바닥에 깔린 검은 마력석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단 한 점의 오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주변 10미터 이내는 진공 상태처럼 투명하게 정화되어 있었다.
검을 고쳐 쥔 킬리안의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평소의 냉정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추 하나까지 완벽하게 채워져 있어야 할 그의 예복은 여기저기 찢기고 피가 묻어 있었다. 자신의 규칙을 스스로 박살 낸 남자의 모습은 그 어떤 마수보다 위압적이었다. 킬리안의 시선이 제단 위에 결박된 몸에 닿았다.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바스티안이 당황하며 나이프를 더 깊게 눌렀다. 오지 마라, 공작.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 여자의 눈을 파내겠다. 그의 비명이 제단 안을 울렸다. 하지만 킬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제단의 붉은 마력과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마찰음이 고막을 마비시켰다.
그 순간, 체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에테르 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킬리안의 마력이 다가올수록 내면의 정화 마력이 공명하듯 반응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저주의 기운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손목을 옥죄던 구속구가 고열에 녹아내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신을 감싸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 중앙에서 폭발했다. 그것은 분노였고, 슬픔이었으며, 동시에 깨어난 진실이었다.
눈동자 속에서 순백색의 불꽃이 일었다. 시야를 가로막던 모든 어둠이 단숨에 걷혔다. 제단 위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들이 아이리스의 마력에 반응해 거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화의 근원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세바스티안이 쥐고 있던 나이프가 순백의 광휘에 닿자마자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세바스티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황제와 레나르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단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 백색 마력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스의 몸이 제단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눈부신 빛을 머금고 허공으로 흩날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마력 밀도가 지하 공간의 물리 법칙을 뒤틀어버렸다.
견고하던 대리석 제단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중심부에서 시작된 붕괴는 순식간에 제단 전체로 번져나갔다. 황실이 수백 년간 공들여 쌓아온 금기된 제단이 아이리스의 시선 하나에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킬리안이 도약했다. 그는 붕괴하는 공간의 파편을 딛고 단숨에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순백의 눈동자 속에 킬리안의 일그러진 얼굴이 담겼다. 그는 닿지 않을 것 같은 거리를 마력으로 메우며 손을 뻗었다. 아이리스의 손끝이 그의 거친 장갑 끝에 닿으려는 찰나, 제단 밑바닥에서 거대한 검은 구멍이 입을 벌렸다. 성배가 깨지며 쏟아져 나온 태초의 오염이 빛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킬리안은 자신의 영역을 최대로 전개하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외침이 붕괴하는 굉음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내 손을 잡아, 아이리스.
아이리스는 자신의 마력을 킬리안의 손으로 집중시켰다. 두 사람의 마력이 맞닿는 순간, 황궁 지하는 눈을 뜰 수 없는 백색 섬광에 휩싸였다. 붕괴는 제단을 넘어 황궁의 지반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레나르트의 비명과 황제의 서늘한 명령이 무너지는 돌더미 속에 묻혔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품으로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세바스티안의 눈을 보았다.
그의 동공 속에 비친 것은 구원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파멸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