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이 섞인 하수구가 역한 황화 수소 냄새를 풍겼다. 아이리스는 진흙이 튄 앞발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젖은 몸을 바짝 밀어 넣었다. 하얀 털은 오물로 얼룩져 이미 회색빛으로 변했다. 빈민가 더스트 존의 공기는 마력 오염원으로 가득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바늘로 찌르듯 따가웠다.
멀리서 기계적인 마찰음이 파동처럼 번져 왔다. 실버 나이트들이 들고 다니는 마력 탐지기 소리였다. 붉은 빛줄기가 격자무늬를 그리며 낡은 벽면을 훑었다. 아이리스는 무너진 담벼락 뒤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털 사이로 미세한 진동이 경련처럼 일기 시작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체내의 에테르 링이 회전했다.
발바닥이 닿은 지면의 오염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정화의 힘은 주변의 미아즈마를 밀어내며 빛났다. 동시에 아이리스의 생명력을 급격히 갉아먹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사물이 두 갈래로 겹쳐 보였다. 입안에서 비릿하고 텁텁한 쇠 맛이 감돌았다. 고대 저주 아나테마의 반동이 신경을 짓눌렀다.
골목 끝에서 구두 굽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탐지기의 경보음이 날카롭게 고막을 찔러 왔다. 아이리스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정화 마력의 폭주는 기어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지나온 길을 따라 공기가 투명하게 씻겼다. 추격자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벽을 짚은 앞발이 맥없이 미끄러지며 꺾였다. 비명 대신 젖은 숨소리가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갔다. 같은 시각 수도 루미나리스의 대로는 결계에 막혔다. 킬리안은 백색 대리석 계단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의식을 잃은 시종장이 쓰러져 있었다. 황실 근위대 수백 명이 그를 겹겹이 포위했다.
공작의 뒤편에는 블랙 로즈의 사병들이 대기했다. 그들은 푸른 불꽃을 피워 올리며 검을 뽑았다. 제국법 제12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역의 현장이었다. 황실 수석 기사가 빗속을 뚫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킬리안을 똑바로 가리켰다. 제국의 방패가 오염된 짐승을 감싸느냐는 외침이었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가죽 장갑을 고쳐 끼었다. 그의 반경 10미터 이내의 공기가 차갑게 굳었다. 절대 영역이 전개되자 빗방울이 허공에서 멈췄다. 근위대원들의 탐지기가 일제히 과부하를 일으켰다. 찢어지는 기계음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서늘한 금빛으로 번뜩였다.
그는 한 걸음 내디디며 검끝을 바닥에 그었다. 대리석 바닥이 종잇장처럼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가문의 이름은 버려도 약속은 버리지 않는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전장에 박혔다. 돌아갈 길을 스스로 끊어버린 자의 단호한 선언이었다. 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공작의 영역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영역에 닿은 검날들은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빈민가의 막다른 골목에서 아이리스는 쓰러졌다. 정화의 빛이 갈수록 거세지며 몸을 집어삼켰다. 꼬리 끝부터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빗물이 눈가에 고여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더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뒤를 쫓던 붉은 빛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아이리스는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기운은 전혀 달랐다. 죽은 줄 알았던 세바스티안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의 팔다리는 기괴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피부는 흑마법의 영향으로 검게 갈라져 있었다. 상처 틈새로 끈적한 액체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깨진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는 꺾인 목을 기괴하게 바로 세우며 웃었다. 세바스티안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거칠게 낚아챘다. 손등에 새겨진 마법진이 핏빛으로 점멸했다.
아이리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들렸다. 세바스티안의 입가가 비정상적으로 넓게 찢어졌다. 그는 품 안에서 검은 마력석을 꺼내 들었다. 마력석을 아이리스의 이마에 강제로 가져다 댔다. 차디찬 냉기가 뇌를 관통하는 충격이 전해졌다. 의식이 암전되며 몸의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세바스티안은 아이리스를 옆구리에 끼고 움직였다. 그는 공간을 비틀어 그림자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정화된 공기만 남았다. 킬리안이 펼쳐놓은 절대 영역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영역의 끝자락이 무너지며 공작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인 잃은 빛이 탁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세바스티안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킬리안은 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혈흔이 빗물과 섞였다. 그는 자신의 영역이 닿지 않는 곳을 응시했다. 공작의 손등에 새겨진 결합의 인장이 흐려졌다. 그것은 계약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비구름 사이로 번개가 내리치며 대기를 갈랐다. 킬리안의 발치에 고인 빗물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땅에 떨어진 하얀 털 뭉치를 집어 들었다. 오물에 젖어 뭉친 그것은 아이리스의 것이었다. 손바닥 위에서 작게 떨리는 털을 보며 그는 침묵했다. 정화파 수장의 오연함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의 등 뒤로 황실 근위대의 2차 공세가 시작됐다. 킬리안은 고개를 숙인 채 검자루를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는 자신을 에워싼 기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금빛 눈동자에는 이성 대신 서늘한 살기가 맺혔다. 절대 영역의 범위가 순식간에 두 배로 팽창했다.
영역에 닿은 기사들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킬리안은 바닥에 떨어진 세바스티안의 안경 파편을 밟았다. 유리 조각이 가루가 되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사병을 불렀다. 당장 더스트 존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라는 명령이었다. 누구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라.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사병들이 어둠으로 흩어졌다. 킬리안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어 보았다.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던 아이리스의 마력이 끊겼다. 그것은 단순히 멀어진 것이 아니라 차단된 감각이었다. 흑마법의 기운이 공작저의 정원까지 뻗쳐 오고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황실 조사관이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고양이의 행방이었다. 킬리안은 자신의 검에 서린 푸른 마력을 해방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대리석 계단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자욱한 먼지 구름을 뚫고 빈민가로 달렸다. 한 번도 규칙을 어긴 적 없던 남자의 걸음이었다.
더스트 존의 입구는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실버 나이트들은 갑작스러운 공작의 난입에 당황했다. 킬리안은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의 방패를 걷어찼다. 금속이 휘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그는 아이리스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장소에 도착했다. 바닥에는 흑마법 특유의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벽면에 남은 손톱자국이 아이리스의 저항을 증명했다. 킬리안은 그 자국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보았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결벽증 때문에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불결한 흔적조차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낡은 리본을 발견했다.
아이리스가 인간 시절 목에 두르고 있던 장식이었다. 리본은 진흙에 절어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킬리안은 더러운 천 조각을 주저 없이 품에 넣었다. 그의 옷에 검은 진흙이 묻었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세바스티안이 남긴 마력의 잔재를 추적했다. 공간의 틈새가 아주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는 검을 허공에 찔러 넣어 공간을 강제로 벌렸다. 파열음과 함께 검은 구멍이 눈앞에서 입을 벌렸다. 킬리안은 망설임 없이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뒤따라온 기사들이 경악하며 그를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공작의 모습은 이미 허공에서 사라진 뒤였다. 어둠 너머의 공간은 차갑고 습한 지하 감옥이었다.
아이리스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쇠사슬에 묶여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다시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신음했다. 눈앞에는 세바스티안이 커다란 가마솥 앞에 서 있었다. 가마솥 안에서는 정체 모를 검은 액체가 끓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기괴한 몸짓으로 약초를 던져 넣었다.
이것이 너를 완성할 마지막 재료가 될 것이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는 쇠 긁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그는 아이리스에게 다가와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고양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즐겼다. 아이리스는 이빨을 드러내며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몸에 박힌 마력 억제석이 힘을 뺏어갔다.
세바스티안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단검을 꺼냈다. 단검의 날에는 보랏빛 독기가 서려 독하게 빛났다. 그는 아이리스의 가슴팍에 칼끝을 천천히 가져다 댔다. 심장 소리가 칼날을 타고 전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아이리스는 공포 대신 서늘한 분노를 눈에 담았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그때 지하 감옥의 철문이 굉음과 함께 날아갔다. 먼지 구름 속에서 길게 뻗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킬리안이 검을 비스듬히 든 채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옷은 빗물과 피로 엉망이 되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를 감싼 절대 영역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세바스티안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돌려 웃었다.
공작님도 결국 이 불결한 곳까지 발을 들이셨군요. 세바스티안의 도발에 킬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검이 세바스티안의 목을 노렸다. 세바스티안은 아이리스를 방패 삼아 뒤로 몸을 날렸다. 킬리안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벽을 깊게 베어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충돌했다.
킬리안은 아이리스의 젖은 털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사유물에 손을 댄 대가는 죽음뿐이었다. 그는 검자루를 쥔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지하 감옥 전체가 공작의 압도적인 마력에 진동했다. 세바스티안은 아이리스의 목에 단검을 바짝 밀착시켰다. 조금만 힘을 주면 작은 생명이 끊어질 상황이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오면 이 짐승의 목을 따겠다. 세바스티안의 위협에 킬리안이 발걸음을 멈추고 섰다. 그의 눈동자가 짙은 금색으로 타오르며 대기를 태웠다. 그는 검을 내리는 대신 왼손을 천천히 뻗어 보였다. 손바닥 위로 정화의 성배가 은은한 빛을 내며 나타났다. 세바스티안의 눈에 탐욕스러운 빛이 서렸다.
성배를 넘기면 이 고양이는 살려주마. 세바스티안의 제안에 킬리안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 그는 성배를 바닥으로 가볍게 던져 굴려 보냈다. 성배가 금속음을 내며 세바스티안의 발치에 멈춰 섰다. 세바스티안이 성배를 집으려 몸을 숙이는 찰나였다. 아이리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손등을 할퀴었다.
세바스티안이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놓친 순간이었다. 킬리안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그의 코앞에서 나타났다.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세바스티안의 어깨를 깊게 벴다. 검은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벽을 적셨다. 킬리안은 아이리스의 목덜미를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따뜻한 체온이 차가운 갑옷 너머로 전해졌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품에 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세바스티안은 잘린 어깨를 움켜쥐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성배를 향해 피 묻은 손을 뻗었다. 성배의 빛이 붉게 변하며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지하 감옥의 벽면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보호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검은 촉수들이 두 사람을 덮쳤다. 킬리안은 영역을 전개해 촉수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성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은 끝이 없었다. 세바스티안의 몸이 어둠과 합쳐지며 거대한 괴물로 변했다. 그는 천장을 부수며 지상으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킬리안은 아이리스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꽉 잡아라, 놓치면 죽는다.
킬리안은 무너지는 잔해를 딛고 지상을 향해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