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대리석 바닥 위로 구둣발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황궁의 습기를 머금은 킬리안의 망토가 무겁게 끌렸다.
집무실 문을 열자 비릿한 마력의 잔향이 코끝을 찔렀다.
정돈되어야 할 서류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중심에 작은 몸을 웅크린 흰 고양이가 보였다.
하얀 털은 군데군데 뭉쳤고 앞발에서는 핏방울이 비쳤다.
킬리안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낡은 양피지에 닿았다.
그것은 에반스 가문의 처형장에 찍힌 황실의 인장이었다.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그를 향했다.
그 눈에는 평소의 생기 대신 깊은 갈증이 고여 있었다.
목 안쪽이 뜨거워져 아이리스는 낮은 신음만 뱉었다.
킬리안은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주변을 감싸던 절대 영역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공간을 정화하던 마력이 불규칙한 파동을 그리며 흩어졌다.
아이리스가 비틀거리며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얇은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손에는 킬리안의 인장이 찍힌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이것이 당신 가문의 자비였나요.
갈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의 침묵은 아이리스에게 확신이라는 독을 주입했다.
아이리스의 손끝이 서류를 쥔 채 하얗게 질려갔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을 끝까지 믿었다고 들었어요.
눈가에 고인 열기가 뺨을 타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당신의 품이 따뜻했던 건 우리 가문의 피 때문인가요.
킬리안의 눈동자가 그 말에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오염된 마력이 그의 이성을 갉아먹듯 불길하게 요동쳤다.
절대 영역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공기를 비틀었다.
그는 아이리스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박혔다.
자신의 손에 묻은 보이지 않는 얼룩을 응시할 뿐이었다.
공작저 내부의 마력 소독 장치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붉은 경보등이 복도를 비추며 비상 상황임을 알렸다.
아이리스는 벽을 짚으며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배신감보다 더 큰 절망이 서렸다.
킬리안은 여전히 아무런 변명도 내뱉지 않았다.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무언의 호소도 소용없었다.
그의 침묵은 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견고하고 차가웠다.
아이리스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발로 짓밟았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크게 울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향해 움직였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그녀의 발치에서 부서졌다.
정화의 힘이 사라진 자리에는 서늘한 냉기만 감돌았다.
가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명령이 아닌 비명에 가까웠다.
아이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숨이 막혀요.
손바닥에 닿는 금속 손잡이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킬리안은 자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을 손으로 가렸다.
검은 오염원이 그의 혈관을 타고 급격히 번져나갔다.
그는 자신의 규칙이 무너지는 소리를 실시간으로 들었다.
아이리스가 문을 열려던 순간 강력한 수력이 앞을 막았다.
킬리안의 마력이 문 주변을 감싸며 봉쇄한 것이었다.
이것마저 당신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나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쏘아보았다.
킬리안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찬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은빛 검신이 달빛을 받아 서늘한 광채를 내뿜었다.
아이리스는 자신을 베려는 줄 알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검이 바닥에 놓이는 쇳소리였다.
킬리안은 검자루를 아이리스의 방향으로 밀었다.
그의 손이 떨리며 검은 피가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는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
드러난 왼쪽 가슴 위에는 기괴한 검은 구멍이 있었다.
그것은 에반스 가문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저주였다.
그는 아이리스의 손을 잡아 검 손잡이 위에 올렸다.
아이리스의 손끝에 그의 맥동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킬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를 단죄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방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무거웠다.
아이리스는 얼떨결에 쥐게 된 검의 무게에 손목이 꺾였다.
킬리안은 자신의 심장 위치를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켰다.
당신의 원망이 멈출 곳은 여기뿐입니다.
그는 아이리스의 손을 당겨 검끝을 자신의 가슴에 댔다.
검끝이 얇은 피부를 뚫고 핏방울을 만들어냈다.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지며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며 검을 통해 진동을 전했다.
킬리안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방 밖에서 육중한 금속 장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황실 조사관 세바스티안의 서늘한 기운이 문 너머에 닿았다.
킬리안 공작, 문을 여시오.
황제의 명이 담긴 엄중한 목소리가 문을 거칠게 때렸다.
우리는 이 안에서 금지된 마력 반응을 감지했소.
세바스티안의 외침과 동시에 문에 걸린 봉인이 요동쳤다.
아이리스는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문을 보았다.
지금 당장 고양이를 넘기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소.
문틈 사이로 붉은 탐지 마법의 빛이 가늘게 새어 들어왔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외부의 압력에 비명을 지르며 깎여나갔다.
킬리안은 아이리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의 체온은 평소와 달리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를 죽이고 저 문을 열어 진실을 밝히십시오.
그의 속삭임이 아이리스의 귓가를 간지럽히듯 파고들었다.
아니면 나와 함께 이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습니까.
아이리스는 검끝이 그의 심장 근처를 파고드는 감각을 느꼈다.
문밖에서는 세바스티안의 검이 문고리를 파괴하는 소리가 났다.
콰직, 하는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정적을 조각냈다.
아이리스는 결심한 듯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에반스 가문의 문장이 푸르게 점멸했다.
킬리안의 가슴에 닿은 검날이 눈부신 백광을 내뿜었다.
세바스티안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가슴을 찌르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마력이 킬리안의 검은 구멍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공작저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마력 폭발이 일어났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광휘가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세바스티안의 경악 어린 외침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빛이 잦아든 자리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길게 늘어졌다.
킬리안의 가슴에 있던 검은 구멍이 은빛 흉터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낯선 온기에 눈을 떴다.
아이리스는 힘이 빠진 듯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손등에는 킬리안의 가문 문장이 겹쳐 새겨져 있었다.
두 가문의 인장이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한 결계를 형성했다.
이것이 당신이 원하던 답인가요.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단호했다.
킬리안은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일어섰다.
문앞에 멈춰 선 세바스티안의 검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세바스티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의 손등을 보았다.
결합의 인장이라니, 이것은 반역자의 핏줄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며 탐지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안아 들고 세바스티안에게 다가갔다.
그의 절대 영역이 이전보다 훨씬 거대하고 정교하게 펼쳐졌다.
조사관, 내 정식 약혼녀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했을 텐데.
킬리안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와 압도적인 위엄이 서렸다.
세바스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어깨 너머로 황궁의 밤하늘을 보았다.
아버지가 남긴 기록 장치가 그녀의 품 안에서 진동했다.
그 속에는 제국이 100년 동안 숨겨온 추악한 진실이 있었다.
그녀는 킬리안의 목을 감싸 쥐며 그의 귀에 입술을 댔다.
이제 당신이 내 사유물이 될 차례예요.
킬리안의 입가에 옅은, 그러나 명확한 호선이 그려졌다.
그는 세바스티안을 지나쳐 복도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복도를 지키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바닥을 쳤다.
그 장엄한 소리가 제국의 고요한 밤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다.
공작저의 거대한 성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자신의 침소에 눕히고 문을 잠갔다.
그는 다시 장갑을 끼고 평소의 결벽증적인 자세로 돌아왔다.
방금 당신이 한 행동은 제국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는 탁자 위의 정화 향수를 자신의 손등에 뿌렸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손에 들린 기록 장치가 홀로그램 영상을 띄웠다.
영상 속에는 킬리안의 아버지가 아이리스의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 있었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진흙처럼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이것이 당신이 지키려던 가문의 명예인가요.
아이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기록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피 비린내 나는 음성이 이어졌다.
킬리안은 자신의 손에 묻은 보이지 않는 피를 닦아냈다.
그의 절대 영역이 비명을 지르며 제멋대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이리스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킬리안은 떨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그녀의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
아이리스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잔인하게 속삭였다.
이제 당신은 내 허락 없이는 죽지도 못해.
킬리안의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와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그것은 결벽증인 그가 평생 허용하지 않았던 오염이었다.
그는 자신의 규칙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직감했다.
방 안의 모든 전등이 일시에 꺼지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직 아이리스의 눈동자만이 고양이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킬리안은 그녀의 그림자 속에 갇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운명의 밧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이리스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충돌했다.
킬리안은 그녀의 눈 속에서 자신의 파멸을 읽어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아이리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막았다.
기록 장치의 영상이 끝나고 방 안에는 지독한 정적이 감돌았다.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아이리스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평생 나의 죄책감으로 살아야 할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손길은 기묘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킬리안은 그녀의 허리를 안고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음 날 새벽, 황실 근위대가 공작저를 완전히 포위했다.
세바스티안은 황제의 직인이 찍힌 체포 영장을 높이 들었다.
킬리안 블랙 로즈, 반역자와 내통한 죄로 그대를 체포한다.
성문이 다시 열리고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두 사람의 손등에는 여전히 선명한 결합의 인장이 빛났다.
킬리안은 세바스티안을 향해 조소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검을 뽑아 지휘관의 발치에 거칠게 던졌다.
나를 체포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저의 모든 탑에서 포성이 울렸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가 루미나리스의 태양을 가렸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손을 더욱 꽉 쥐며 앞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결의가 서렸다.
제국의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의 굉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포연이 자욱한 전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 전쟁의 끝에 당신의 자리는 나의 옆입니다.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그의 손등을 손톱으로 강하게 눌렀다.
밀려드는 근위병들의 함성 사이로 두 사람의 마력이 섞였다.
은빛과 푸른빛이 교차하며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냈다.
세바스티안은 다가오는 파멸의 기운에 뒷걸음질 쳤다.
아이리스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화살비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마법이 허공을 가르고 나갔다.
무영창으로 발현된 거대한 화염이 근위대의 대열을 무너뜨렸다.
금기된 흑마법의 흔적이 그녀의 주변을 검게 물들였다.
킬리안은 그녀를 보호하듯 자신의 절대 영역을 극도로 확장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오직 그녀만을 위한 방패가 되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전장 위에 거대하게 드리워졌다.
세바스티안은 경악하며 자신의 검을 고쳐 쥐었다.
이것은 반역이다.
그의 비명 같은 외침이 전장의 소음 속으로 묻혀버렸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품에 안긴 채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 이것은 정화다.
그녀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며 주문을 완성했다.
공작저의 대지가 갈라지며 고대의 힘이 깨어났다.
킬리안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검을 고쳐 잡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수천 명의 적을 향해 검끝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