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지하 비밀 통로는 눅눅했다.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오래된 종이 먼지가 허공에 부유했다.
발바닥에 닿는 돌바닥은 소름 끼치게 찼다.
뒤편에서 들리던 발소리가 끊겼다.
레나르트가 멀어지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옆구리에 낀 가방이 앞발을 무겁게 눌렀다.
가죽의 거친 질감이 털 사이로 느껴졌다.
킬리안은 통로 입구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게 벽에 부딪혔다.
가슴 중앙에 자리 잡은 검은 구멍.
그것이 맥박에 맞춰 불길하게 점멸했다.
절대 영역의 힘이 희미하게 요동쳤다.
손끝을 뻗어 그를 깨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방에서 낡은 고서를 꺼내 놓았다.
표지에는 아무런 문장도 없었다.
기묘한 가죽이 씌워진 책이었다.
앞발을 조심스럽게 표지 위에 얹었다.
가죽의 결이 내 온기를 빨아들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텅 비어 있던 백지에 파동이 일었다.
검은 잉크가 지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글자들이 비틀거리며 대열을 맞췄다.
에반스 가문의 혈통만이 깨우는 마법이다.
시야가 붉게 물드는 착각이 들었다.
제국의 건국 신화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빛의 기적이라는 말은 전부 허상이었다.
성녀 일리나의 기적은 정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력을 강제로 뽑아내는 추출이었다.
대지는 생명력을 빼앗겨 박제되었다.
황실은 이 부정한 힘 위에 제단을 쌓았다.
우리 가문은 그 제단의 설계자였다.
동시에 비밀을 지켜야 할 감시자였다.
기록관이었던 조상들은 파멸을 직감했다.
착취의 끝은 결국 멸망뿐임을 알았다.
진실을 기록하려 할 때마다 칼날이 왔다.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가문의 자부심은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제국은 우리 피로 씻어낸 어둠 위에 섰다.
신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앞발로 막았다.
책장은 멈추지 않고 스스로 다음을 넘겼다.
초대 블랙 로즈 공작의 이름이 보였다.
그는 황실의 가장 충직한 사냥개였다.
착취를 거부한 영지들을 지도로 지웠다.
정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처형이었다.
눈앞의 글자들이 환영처럼 잔상을 남겼다.
킬리안의 창백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도 이 잔혹한 진실의 대가를 치르는가.
심장을 갉아먹는 오염은 가문의 업보였다.
뒷덜미의 털이 곤두서며 몸이 떨렸다.
책의 끝에는 최근의 기록이 있었다.
아버지의 필체가 급박하게 이어졌다.
누명을 쓰기 전 아버지는 책을 썼다.
멸문은 우연도 실책도 아니었다.
진실을 알리려던 자들을 향한 입막음이다.
바닥에 고인 핏물에 닿은 듯 발끝이 찼다.
마지막 페이지 안쪽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황실 인장이 찍힌 비밀 행정 명령서였다.
아이작 에반스의 즉결 처형 승인서.
잉크가 번진 자국 위로 가문 문장이 있었다.
이전 블랙 로즈 공작의 친필 서명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사지로 이끈 길잡이였다.
가장 신뢰한 동료가 운명을 난도질했다.
앞발에 힘이 들어가 날카로운 발톱이 섰다.
종이가 찍히는 소리가 고요를 깼다.
킬리안이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초점을 맞췄다.
그가 피 묻은 손을 뻗어 내 등을 쓸었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는 나를 품 안으로 강하게 당겨 안았다.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증오스럽게 울렸다.
킬리안이 내 귀가에 입술을 바짝 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찾았나, 네가 원하던 것을.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박동이 너무 선명했다.
나를 안은 팔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갈비뼈가 압박되어 숨이 막혀 왔다.
그의 가슴에서 점멸하던 검은 구멍.
그곳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킬리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것은 가련한 짐승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이 기록의 끝은 네 생각과 다를 텐데.
그가 내 앞발 사이의 찢긴 종이를 뺏었다.
종이는 그의 손끝에서 검게 타들어 갔다.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진실이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틀었다.
발톱으로 그의 손등을 깊게 그어 내렸다.
붉은 피가 백색 대리석 바닥을 더럽혔다.
킬리안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입가에 기괴한 뒤틀림이 일었다.
너를 살려둔 건 내 최대의 결벽이었다.
그의 절대 영역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공기가 희박해지며 시야가 흔들렸다.
공포가 목을 조르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내 턱을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다.
킬리안의 시선이 내 보랏빛 눈에 박혔다.
그의 눈 속에 비친 나는 작고 초라했다.
그가 내 귀 근처의 털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결벽이 나를 죽이는군.
그의 등 뒤에서 검은 안개가 솟구쳤다.
아나테마의 저주와 닮은 마력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진하고 역겨운 기운.
통로 벽면의 대리석이 검게 부식되었다.
그의 절대 영역이 오염을 밀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오염의 근원이 그 자신인 것 같았다.
나는 앞발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돌연 멈춘 듯 고요했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통로에 울렸다.
멀리서 들리던 금속음이 가까워졌다.
실버 나이트의 마력 탐지기가 비명을 질렀다.
킬리안은 나를 바닥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의 손등에서 흐른 피가 내 흰 털을 적셨다.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붉은 얼룩이 남았다.
그는 타버린 종이 재를 발로 뭉갰다.
그리고 나를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도망쳐라, 아이리스 에반스.
검 끝이 내 코끝에서 멈췄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온기가 없었다.
오직 사냥감을 쫓는 포식자의 냉기뿐이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뛰었다.
뒤편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비명이 섞였다.
벽이 무너지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왔다.
출구를 향해 달리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했다.
기록의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에반스의 피는 블랙 로즈의 제물이다.
지하 통로 끝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곳에는 세바스티안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의 탐지기가 나를 향해 붉은빛을 쐈다.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나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숨을 죽였다.
세바스티안의 군화 소리가 눈앞까지 왔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렸다.
찾았다, 황실의 잃어버린 열쇠.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공중에 매달린 몸이 무력하게 흔들렸다.
그는 내 눈동자 속의 파동을 확인했다.
세바스티안의 손가락이 내 목을 압박했다.
숨이 막혀 눈앞이 흐릿하게 번졌다.
그때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사방을 찢었다.
무너진 벽 사이로 킬리안이 걸어 나왔다.
그의 몸 전체가 검은 마력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열쇠는 내 사유물이라고 했을 텐데.
킬리안의 검이 세바스티안의 목을 겨눴다.
세바스티안은 나를 방패처럼 앞세웠다.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줄기에 닿았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온몸이 굳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킬리안의 눈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대리석이 바스러졌다.
세바스티안이 내 목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이 짐승의 진짜 이름이 뭔지 아나, 공작.
세바스티안이 내 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킬리안을 보며 한 글자씩 내뱉었다.
그것은 제국에서 금기시된 고대의 단어였다.
킬리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안은 나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앞발을 즈려밟으며 속삭였다.
이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살아있는 제단이지.
세바스티안이 내 앞발을 짓눌렀다.
뼈가 어긋나는 통증에 비명이 터졌다.
그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솟구쳐 올랐다.
킬리안이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절대 영역은 나를 밀어냈다.
서로의 마력이 충돌하며 거대한 빛이 일었다.
그 빛 속에서 아버지의 환영이 보였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기록을 태워라, 아이리스.
환청과 같은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폐허였다.
킬리안은 무릎을 꿇은 채 가슴을 쥐었다.
그의 검은 구멍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났다.
세바스티안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나는 부러진 앞발을 끌며 벽에 기댔다.
킬리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한쪽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나를 죽여야 했을 때 죽였어야지.
그가 피 섞인 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다시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살의와 애증이 뒤섞인 기묘한 압박감.
나는 벽에 막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의 검끝이 내 심장을 정확히 겨눴다.
그의 손가락이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이제 네가 제단이 될 차례다.
킬리안의 검이 내 가슴을 향해 낙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