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을 넘어온 새벽빛이 백색 대리석 바닥에 날카롭게 박혔다. 루미나리스의 고산 지대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아우라 실드가 유지하는 정온한 기온 속에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젯밤 보았던 그 핏빛 하늘은 마치 지독한 환각이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매끄러운 촉감이 차가웠다. 킬리안은 거울 앞에서 은색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기계처럼 정교하고 결벽적인 움직임으로 예복의 깃을 바로잡았다. 어깨 위에 내려앉은 그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고양이 상태인 나를 향했다.
준비가 끝났군.
그가 짧게 내뱉으며 장갑을 꼈다. 가죽이 마찰하며 내는 마찰음이 고요한 침실에 울렸다. 황실 조사관 세바스티안의 사후 보고가 접수되었다는 전갈이 새벽같이 도착했다. 황제 카시안 3세의 직접적인 호출이었다. 블랙 로즈 공작으로서 피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커다란 손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그의 고유 능력인 절대 영역의 파동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불결함을 소멸시켰을 그 힘이 지금은 기묘하게 나를 감싸 안는 보호막처럼 작동했다.
저택을 벗어나지 마라.
명령조였으나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굳게 닫히는 문소리가 복도 끝까지 번져 나갔다. 이제 이 넓고 하얀 감옥에 남겨진 것은 나뿐이었다. 꼬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킬리안이 없는 공작저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모든 것이 백색과 은색으로 도배된 이 공간은 숨이 막힐 듯 정갈했다. 하지만 그 정갈함 뒤에 숨겨진 그림자가 나를 자극했다. 앞발을 내디뎌 문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킬리안의 개인 서재는 본관 3층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 평소라면 레나르트가 엄격하게 관리하여 털 한 올조차 허용되지 않았을 장소였다. 복도에는 마력 소독 장치가 주기적으로 백색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가 폐부를 찌를 듯 매캐하게 감돌았다. 서재 문앞에 다다랐을 때, 안쪽에서 낮은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킬리안은 분명 황궁으로 떠났다. 저택의 주인도 없는 방에 누가 들어간 것일까. 문틈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익숙한 향마력 향수 냄새 뒤로 낯선 금속성의 악취가 섞여 있었다.
조금만 더 틈을 벌려 안을 살폈다. 책상 앞에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평소의 구부정한 자세는 간데없고, 칼날처럼 꼿꼿하게 선 뒷모습이었다. 레나르트였다. 그는 킬리안의 책상 위에 놓인 황실 통신석을 손에 쥐고 있었다. 통신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그의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었다.
그렇습니다. 표본은 안전하게 확보 중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인자함이 거세된 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보고를 받는 상대는 누구일까. 통신석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잡음이 귀를 찔렀다.
공작은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금서고의 기록물 역시 곧 회수할 예정입니다.
레나르트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충직한 집사의 것이 아니라, 사냥감을 몰아넣은 추적자의 미소였다. 발톱이 카펫을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남긴 기록 장치, 그리고 에반스 가문의 몰락. 그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 이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레나르트는 황실 직속 정화파의 고위 감시자임이 틀림없었다. 킬리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첩자였다.
바닥에 놓인 화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꼬리가 화분 스탠드에 살짝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음이었지만, 레나르트의 고개가 순식간에 문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조여졌다.
누구냐.
그가 통신석을 내려놓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으나, 문은 이미 마력으로 봉쇄된 뒤였다. 레나르트가 문을 열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실험대의 해부용 생물을 관찰하는 학자의 눈이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직도 고양이 흉내를 내고 계시는군요, 에반스 영애.
목소리가 뱀처럼 고막을 타고 흘러들었다. 소름이 돋아 하악질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몸이 무력하게 흔들렸다. 발버둥을 칠수록 목을 조여오는 힘이 강해졌다. 폐에 공기가 부족해지며 시야가 번쩍였다.
공작님은 당신을 지키는 게 아니라, 단지 가장 위험한 증거물을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정화파의 수장인 킬리안의 저택에서 대놓고 흑마법의 기운을 내뿜는 대담함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나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은제 찻잔이 놓여 있었다.
당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황실에 협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훔친 금서의 행방을 말하세요.
말을 할 수 없는 고양이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앞발을 휘둘러 그의 손등을 할퀴었다. 붉은 핏방울이 그의 하얀 장갑 위로 번졌다. 레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손등을 살피더니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서재 안을 서늘하게 메웠다.
여전히 고결한 척을 하시는군요. 반역자의 핏줄 주제에.
그는 서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병 안에는 보랏빛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력을 억제하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극물이었다. 인간에게도 치명적인 것이 고양이의 몸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는 은제 찻잔에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맑은 찻물이 순식간에 탁한 빛으로 변했다.
이것을 마시면 조금은 솔직해지실 겁니다. 고양이의 혀로는 거짓말을 하기 힘들 테니까요.
그의 손이 내 입가로 다가왔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저항했다. 하지만 그의 마력 압박이 온몸을 짓눌렀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력이 사방에서 조여왔다. 입술이 강제로 벌려지고 차가운 찻잔의 끝이 닿았다. 비릿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혀끝에 닿는 액체의 감촉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순간이었다. 서재 안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창가 쪽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우라 실드를 뚫고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내부에서 발현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운이었다. 레나르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그는 찻잔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가 허락했지.
낮고 서늘한 음성이 공간을 갈랐다. 황궁으로 떠났던 킬리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강력한 마력의 잔향을 품고 있었다. 서재의 모든 유리창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갔다. 레나르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일렁이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림자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레나르트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챙그랑, 소리를 내며 은제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랏빛 액체가 백색 카펫 위로 얼룩지며 번져 나갔다. 레나르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처박혔다.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킬리안이었으나, 동시에 킬리안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차가운 청색이 아니라, 타오르는 듯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실 혈통인 골든 블러드만이 가질 수 있다는 그 찬란하고도 잔혹한 빛이었다.
내 사유물에 손을 대다니.
그의 목소리가 서재 전체를 진동시켰다. 레나르트는 공포에 질려 바닥을 기며 뒤로 물러났다. 평소의 침착함은 온데간데없고, 죽음을 목전에 둔 짐승의 비굴함만이 남았다. 킬리안, 아니 그 형상을 한 존재는 천천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리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양이의 이름이 아닌, 에반스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나의 이름을. 그의 손가락이 내 젖은 털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다정했으나, 그 뒤에 서린 살기는 레나르트를 향해 있었다.
이 벌레를 어떻게 처리할까.
그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판결을 기다리는 사형 집행인처럼, 그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레나르트는 떨리는 손으로 품 안의 비상 통신석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킬리안의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지자, 레나르트의 팔은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바닥에 고정되었다.
대답해라. 죽일까, 아니면 더 쓸모가 있을까.
그의 금빛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열망이 읽혔다. 그것은 단순히 첩자를 처단하려는 정의감이 아니었다. 자신의 규칙을 위반한 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자, 나를 향한 뒤틀린 소유욕이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찻잔과 레나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서재 밖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실버 나이트의 갑옷 부딪히는 소리였다. 누군가 저택의 보안 마법이 깨진 것을 감지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레나르트의 입가에 비열한 희망이 어린 순간이었다.
킬리안이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선택은 빠를수록 좋다.
그의 그림자가 서재 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들이닥친 기사들이 문을 부수기 직전, 킬리안의 손이 내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어둠 속에서 레나르트의 단명이 끊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문이 부서지며 쏟아져 들어온 빛 사이로,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황실의 명입니다!
킬리안은 나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다시 차가운 청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닥에는 레나르트의 일그러진 안경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조사관, 내 서재에 예의도 없이 들어오는 법을 어디서 배웠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차갑고 단단했다. 세바스티안은 바닥의 보랏빛 얼룩과 킬리안의 품에 안긴 나를 번갈아 보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장감이 서재 안을 터질 듯이 채웠다.
황실에서는 공작님께서 금지된 존재를 은닉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세바스티안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마력 탐지기가 붉은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정확히 킬리안의 품에 있는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킬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내 목덜미를 더욱 깊숙이 끌어당겼다.
금지된 존재라. 이 고양이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요, 공작님. 우리가 찾는 것은 짐승의 껍데기 뒤에 숨은 반역자입니다.
세바스티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날에 맺힌 마력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그 기운을 쳐내며 불꽃을 튀겼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 순간, 내 몸 안에서 억눌려 있던 마력이 폭발하듯 꿈틀거렸다. 레나르트가 아까 강제로 먹이려 했던 보랏빛 액체가 입술에 닿았던 탓일까. 시야가 붉게 물들며 심장 박동이 고막을 울렸다.
안 돼. 여기서 변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고양이의 앞발이 인간의 손가락으로 길어지기 시작했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의 망토로 나를 감싸 안았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망토 밖으로 삐져나온 가느다란 인간의 팔이 세바스티안의 눈에 박혔다.
찾았군.
세바스티안의 입가에 잔혹한 승리감이 어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킬리안은 나를 안은 채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저택 전체에 비상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킬리안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눈을 감아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재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킬리안 블랙 로즈가 평생을 숨겨왔던, 황실의 금기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무영창 전이 마법이었다.
우리는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이리스.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멀어지며 세상이 암전되었다. 다음 순간, 발바닥에 닿은 것은 차가운 대리석이 아니라 질척이는 흙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소독약 냄새가 아닌, 진득한 피 냄새였다.
눈을 떴을 때, 하늘은 1000년 전의 그날처럼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킬리안은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을 보며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 중앙에 검은 구멍이 뚫린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것이 네가 원한 진실인가.
그가 피 섞인 웃음을 흘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내 뺨을 스치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편의 숲에서 수천 마리의 마수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죽은 줄 알았던 레나르트가 일그러진 얼굴로 걸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당신의 무덤에.
레나르트의 손에는 킬리안의 심장을 꿰뚫었던 것과 같은 검은 마력석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