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이 절벽을 긁었다.
흑암절벽. 그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수직으로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은 낮에도 빛을 삼켰고, 지금 이 시각에는 절벽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어둠이었다. 설무한은 그 끝에 서 있었다. 발뒤꿈치 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백 장 아래에서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찢어진 도포 자락이 바람에 채이며 등을 때렸다. 왼쪽 옆구리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렀다. 손을 갖다 댈 기력도 없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열네 개의 발소리가 이십 보 거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등에 닿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기운을 설무한은 삼십 년 전부터 알았다. 긴장할 때마다 발끝에서 기가 새는 버릇까지도. 처음 봤을 때, 위진악은 열두 살이었다. 흙먼지 묻은 손으로 검을 쥐던 아이였다.
"사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위진악의 목소리였다.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어쩌면 가장 찢어지는 일이었다. 설무한은 입을 열려 했다. 목구멍에서 쇳소리만 맴돌았다. 혈맥봉인. 혈도를 막아 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수법. 설무한 자신이 가르친 기술이었다. 제자가 스승의 것을 스승에게 쓰는 꼴이 이럴 줄은 몰랐다. 기도가 막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타들어 갔다.
"사부께서는 오늘부로 청운검문과 관계가 없습니다."
위진악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설무한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발아래 소용돌이치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정무맹 법전에는 이미 문서가 접수되었습니다. 청운검문 원로장 설무한, 문파 공금 삼만 냥 횡령. 증거는 충분합니다."
종이 한 장이 바람에 날려 설무한의 앞으로 떨어졌다. 장부였다. 설무한이 한 번도 손댄 적 없는 숫자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글씨체까지 정교하게 흉내 냈다. 누가 봐도 설무한의 필적이었다.
"진악아."
혈맥봉인을 억지로 밀어낸 목소리는 갈라지고 작았다. 그러나 설무한은 다시 힘을 실었다.
"이것이 네 뜻이냐, 아니면 누군가 시킨 것이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제 뜻입니다."
설무한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이미 알 수 없었다. 삼십 년을 곁에 두었어도,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은 끝내 가르칠 수 없었다. 설무한은 장부를 집어 들지 않았다. 그 종이에 손을 얹는 순간, 이 거짓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근거 없이 믿어온 무언가가 그 순간 완전히 소멸한다는 것을.
"사부."
세 번째로 그 호칭이 들렸다. 설무한은 그때 몸을 돌렸다. 위진악이 서 있었다. 그 뒤로 열세 명의 제자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검을 들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인철, 남옥, 현승. 설무한이 이름을 붙여준 아이들이었다. 지금 그 얼굴들에서 설무한은 죄책감을 찾으려 했다.
없었다. 인철은 신발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옥은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현승만이 설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그 눈에 있는 것은 미안함이 아니라 오기였다.
"현승."
설무한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현승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부님은 틀리셨습니다."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턱이 굳어 있었다.
"무엇을 틀렸느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무림입니다. 위 사형의 선택이 옳습니다."
설무한은 그 말을 듣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것이 더 슬펐다. 분노라도 남아 있었다면, 무언가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목이 조여들었다. 말이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나와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였다. 혈맥봉인으로 막힌 기도를 억지로 밀어냈다. 경맥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무언가 터지는 감각이 왼쪽 어깨에서 목까지 번졌다. 그래도 입을 열었다.
"너희에게 준 것은 검법만이 아니었거늘."
쉰 목소리가 나왔다. 바람이 반쪽을 앗아갔다. 설무한은 다시 힘을 실었다.
"어찌하여 인간의 도리마저 버렸느냐."
위진악이 잠시 멈추었다. 설무한은 그 멈춤을 보았다. 찰나였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짧았다. 그러나 설무한은 삼십 년 동안 이 아이를 보아왔다. 그 미세한 흔들림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위진악은 소매 안으로 오른손을 깊이 밀어 넣었다.
"문파를 위한 선택입니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스승께서는 평생 검을 섬기셨습니다. 이제는 쉬셔도 됩니다."
"쉰다."
설무한이 되풀이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삼십 년이 그 말 한 마디로 끝나는구나."
위진악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무한은 웃으려 했다.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삼십 년이었다. 청운검문이 정무맹의 협공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홀로 사흘 밤낮을 버텼다. 남관에서 적도 수장의 목을 가져왔을 때, 오른팔은 어깨에서부터 제 기능을 잃었다. 마교 분타가 문파 경계를 넘었을 때, 설무한이 혼자 막아섰다. 그때 입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수련장으로 나갔다. 그 상처들이 지금 이 순간을 만들었다.
위진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신호였다. 제자 둘이 앞으로 나왔다. 설무한은 피하지 않았다. 손이 먼저 나갔다면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들고 온 것이 무기가 아님을 알았을 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 상자였다. 설무한의 비급이 담긴 상자. 청운검문 대대로 내려오는 자하결도 그 안에 있었다. 제자가 상자를 설무한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만은 가져가십시오."
설무한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상자는 무거워 보였다. 실제로는 가벼웠다. 그 안에 담긴 세월의 무게는 아무리 상자를 크게 만들어도 담기지 않을 것이었다.
"필요 없다."
위진악의 눈썹이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사부."
"그것은 청운검문의 것이다. 내가 가져온 것이 아니니 내가 가져갈 것도 없다."
"…사부께서 직접 쓰신 비급입니다."
"문파가 쓰라고 쓴 것이다. 내 것이 아니야."
침묵이 떨어졌다. 바람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찢어진 도포 끝이 다시 펄럭였다. 설무한은 등 뒤의 허공을 느꼈다. 뼈마디가 쑤셨다. 혈맥봉인의 여파가 내장까지 번진 것 같았다. 단전 주위가 차갑게 식어갔다.
"데려가라."
위진악이 말했다. 제자 두 명이 설무한의 팔을 잡았다. 설무한이 가르친 힘이었다. 설무한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있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것을 몸으로 거스르는 일은 설무한의 방식이 아니었다.
절벽 끝으로 밀려갔다. 발뒤꿈치가 경계에 닿았다. 설무한은 아래를 보지 않았다. 위진악을 보았다. 위진악은 설무한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잘 훈련된 눈이었다. 삼십 년 동안 설무한이 만든 눈이었다.
"진악아."
설무한이 마지막으로 불렀다.
위진악의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부."
손이 풀렸다. 등이 허공을 향해 기울었다. 찢어진 도포가 위로 펼쳐지며 바람을 먹었다. 떨어지면서 설무한은 눈을 감지 않았다. 위진악의 얼굴이 점점 작아졌다. 절벽 위에 열네 개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소리치지 않았다.
안개가 올라왔다. 차가웠다. 발끝부터 냉기가 번졌다. 흑암절벽 특유의 습한 한기가 아니었다. 이 냉기는 달랐다.
열 해 전이었다. 금사해 깊숙한 모래 폭풍 속에서 우연히 손에 넣었던 것. 냉기를 머금은 구슬. 한빙주. 삼켜야만 효과가 있다는 말에 주저했던 기억이 있었다. 결국 삼켰다. 이후 십 년 동안 단전 깊은 곳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설무한이 그것을 잊고 있었다.
봉인된 혈맥 벽 너머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손가락 마디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틈새를, 얼음 녹은 물처럼 냉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파괴된 단전에서 불꽃 같은 통증이 치솟는데, 그 한가운데를 푸른 기운이 관통했다. 설무한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얼굴을 덮었다. 차갑고 조밀하게. 절벽도, 하늘도, 위진악의 얼굴도 지워졌다. 가슴 안쪽 깊은 곳에서 맥박이 뛰었다. 멎었다가 다시 뛰었다. 더 강하게. 봉인된 경맥을 따라 냉기가 번지고, 그 길 위에서 파괴된 조각들이 차가운 것으로 채워지며 이어졌다.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터진 제방에 모래를 쌓는 것. 임시로 막은 것이었다.
눈꺼풀 안쪽이 밝아졌다. 설무한은 눈을 떴다. 안개 한가운데였다. 손이 보였다. 손가락 끝에서 푸른 빛이 실처럼 감겨 돌았다. 열 해 동안 단전에서 잠들어 있던 것이 비로소 흘러나오고 있었다. 몸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안개 속에서 차갑고 선명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퍼억.
무거운 것이 물에 처박히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차가운 수압이 전신을 짓눌렀다. 흑암절벽 아래에 이런 거대한 연못이 있다는 기록은 없었다. 연못이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지하의 수맥이었다. 설무한의 몸이 가라앉았다. 수면 위에서 비치는 희미한 빛이 멀어졌다. 폐 안의 공기가 끓어올랐다. 기포가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물속에서 무언가가 설무한의 발목을 낚아챘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비늘이 돋아난 짐승의 앞발이었다. 설무한은 몸을 비틀려 했으나 혈맥은 다시 굳어 있었다. 짐승이 그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수면 아래 수십 장 깊이.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짐승이 설무한을 바닥에 내던졌다. 물기가 가득한 바위 바닥이었다. 설무한은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폐로 들어왔던 물이 섞여 나왔다. 시야가 흐릿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커다란 안광이 번뜩였다. 황금빛 눈동자. 전설 속에서나 듣던 영물, 수룡의 새끼였다. 짐승은 설무한의 가슴 위에 앞발을 올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도포를 찢고 살을 눌렀다.
"죽이러 온 것이냐."
설무한이 겨우 소리를 냈다. 수룡은 대답 대신 설무한의 단전 부위를 코로 킁킁거렸다. 한빙주의 기운. 짐승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벌려 설무한의 어깨를 물었다. 통증이 뇌를 찌르고 들어왔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이빨을 통해 따뜻한 액체가 설무한의 혈맥으로 흘러 들어왔다. 용혈이었다.
파괴되었던 경맥이 꿈틀거렸다. 얼어붙었던 냉기와 뜨거운 용혈이 충돌했다. 설무한은 바닥을 긁었다.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끝에서 피가 튀었다. 고통의 극점에서 의식이 명멸했다.
동굴 안쪽에서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삼백 년 만에 손님이 왔군. 그것도 다 죽어가는 청운검문의 퇴물을 데리고."
설무한은 고개를 돌리려 애썼다. 어둠 속에서 넝마를 걸친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설무한이 절벽 위에서 버리고 온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위진악이 가지고 있어야 할 그 비급 상자였다. 노인이 상자를 바닥에 던졌다. 콰직, 소리와 함께 상자가 부서지며 자하결 비급이 쏟아졌다.
"이딴 쓰레기를 아직도 비급이라 부르나?"
노인이 설무한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눈동자에는 흰자위가 없었다. 칠흑처럼 까맣고,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요."
설무한이 물었다. 목소리는 끊어질 듯했지만,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누구냐고?"
노인이 피식 웃었다.
"삼백 년을 여기 박혀 있었는데 이름이 무슨 소용이야. 네놈이 알 만한 이름이 아니거든."
"그 비급을 어떻게 가졌소."
"이걸 묻고 싶으냐?"
노인이 비급 조각 하나를 집어 손가락으로 튕겼다. 종이는 공중에서 재처럼 산화했다.
"위진악 그놈이 너를 죽인 게 아니야. 네가 그놈을 그렇게 키운 거지."
설무한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래도 할 말이 있소?"
"있지."
노인이 설무한의 이마 중앙, 인당혈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진짜 청운의 검이 뭔지 보여주마. 대신 네 목숨을 담보로 잡겠다."
"내 목숨은 이미 저 위에서 끝났소."
"끝났다고?"
노인이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인당혈을 통해 무언가가 설무한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불처럼 뜨겁고, 얼음처럼 날카로웠다.
"아직 살아 있잖아. 그게 네 문제야."
노인이 비급 조각을 입에 처넣으며 기괴하게 웃었다. 찢겨나간 자하결의 글자들이 노인의 입 안에서 빛을 내며 녹아들었다.
설무한의 시야가 하얗게 뒤집혔다.
같은 시각, 절벽 위.
위진악은 움직이지 않았다. 설무한이 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제자들이 뒤로 물러선 뒤에도,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찬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소매 안에 감춘 오른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사형."
인철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자하결 비급은 어디 있습니까. 상자 안에 없었습니다."
위진악의 눈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백 장 아래의 안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없어."
"비급이 없다고요?"
"사부께서 가지고 가셨다."
인철이 말을 잇지 못했다. 위진악은 돌아서지 않았다. 안개를 내려다보는 그 눈에서 무언가가, 방금까지 완벽하게 봉인해두었던 무언가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하결이 없다면, 정무맹에 낼 수 없다.
정무맹에 낼 수 없다면, 이 모든 것이 헛일이다.
위진악의 입술이 열렸다.
"내려간다."
"사형, 저 아래는 아무도—"
"혼자 간다."
위진악이 절벽 끝으로 걸어갔다. 발뒤꿈치가 경계를 밟았다.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부의 시신조차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발이 멈추지 않았다.
찬바람이 또 한 번 절벽을 긁었다.
위진악이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