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취곡의 안개는 뼈를 깎는 칼날이었다.
허공을 가르던 몸이 수면을 때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입안 가득 비린내와 흙탕물이 밀려들었다. 설무한은 손가락 끝을 떨며 바닥을 긁었다. 질척이는 진흙이 손톱 밑을 파고들었다.
목구멍이 타는 듯 뜨거웠다. 갈비뼈는 이미 제 위치를 잃었다. 왼쪽 다리는 감각조차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코끝에 닿았다.
단전 깊은 곳에서 서늘한 기운이 치솟았다. 십 년 전 삼켰던 한빙주의 냉기였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냉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부서진 뼈마디를 끼워 맞췄다.
설무한은 눈을 부릅떴다. 시야가 푸른 빛으로 일렁였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젖은 나뭇가지를 생명줄처럼 움켜쥐었다.
손길이 닿은 지면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고통은 여전했으나 몸을 움직일 동력이 생겼다. 진흙탕을 기어 나오며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흑암절벽의 까마득한 높이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위진악.
믿었던 제자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입술 안쪽을 씹자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어금니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그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전신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비취곡의 안개는 방위 감각을 마비시켰다. 설무한은 나무 이끼의 방향과 바람의 흐름을 읽었다.
반나절을 넘게 걷자 인가의 흔적이 보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북적였을 주막 거리가 고요했다. 길가에 서 있던 사내 둘이 설무한을 발견했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왔다. 사내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설무한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그 밑에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청운검문 자금 횡령범 설무한.
사내들이 품에서 도를 뽑아 들었다. 정무맹 소속의 하급 무인들이었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횡령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사내 중 하나가 가래침을 뱉었다.
"시끄럽다. 위 문주님께서 너를 잡으면 황금 백 냥을 주마 하셨다."
위 문주.
위진악이 벌써 그 자리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설무한은 허탈함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평생을 일궈온 문파였다. 그곳이 자신을 사냥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사내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포위망을 좁혔다. 설무한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곳엔 빈 칼집조차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마을 뒤편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거친 고함이 들려왔다. 내공을 온전히 쓸 수 없는 몸으로는 따돌리기가 버거웠다.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자 폐부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숲은 험준하고 어두웠다. 그는 일부러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으로 몸을 던졌다. 옷자락이 찢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바위 틈새에 몸을 숨겼다. 심장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 숨을 죽였다. 한기가 다시 단전을 자극했다.
손끝에 기운을 집중했다. 차가운 기운이 바닥으로 스민 뒤 주변 낙엽을 얼렸다. 추격자들이 얼어붙은 지면을 밟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미끄러졌다.
"으악, 이게 뭐야."
욕설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긴장이 풀렸다. 설무한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 사이의 달빛이 유난히 시렸다.
배신자. 횡령범.
평생 협을 위해 살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남은 것은 파렴치한이라는 낙인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며칠을 산속에서 버텼다. 산짐승을 잡아 허기를 달랬다. 빗물로 목을 축이며 상처를 돌봤다. 한빙주의 기운 덕에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파괴된 혈맥은 여전히 온전치 못했다. 기운을 돌릴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 일었다. 그는 낙양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그곳은 강호의 정보가 모이는 중심지였다.
자신의 자산이 예치된 전장도 그곳에 있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누더기를 걸쳤다. 얼굴에는 흙칠을 하여 인상을 지웠다. 낙양 외곽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객잔으로 향했다. 목을 축이며 정보를 모으려 했다. 객잔 입구에는 커다란 방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 앞을 서성였다.
설무한은 조심스럽게 인파 틈으로 끼어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문파 공금을 횡령하고 금지된 마공을 익혔다는 내용이었다.
그 옆에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위진악이었다. 청운검문의 새로운 빛이라 칭송받고 있었다. 정식 문주 취임 소식이 대대적으로 적혔다.
설무한은 눈을 의심했다. 위진악의 이름 옆에 적힌 공적들은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평생 바쳐 이룬 명예가 통째로 도둑맞아 있었다.
"저 설무한이라는 자, 정말 악질이라더군."
옆에 서 있던 행인이 혀를 찼다.
"위 문주님이 아니었으면 문파가 넘어갈 뻔했지."
설무한은 주먹을 쥐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이명이 들렸다. 세상이 통째로 자신을 기만하는 기분이었다.
객잔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벽면에 붙은 전장의 공고문이 보였다. 설무한 명의의 모든 자산이 동결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정무맹의 요청에 따라 전 지점의 계좌가 폐쇄되었다.
기댈 곳조차 사라졌다. 그는 이제 강호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아니, 지워져야만 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설무한은 고개를 숙이고 객잔을 나가려 했다.
"어이, 거기 누더기."
객잔 구석에 앉아 있던 무인이 일어났다. 설무한의 발걸음이 멈췄다.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낯바닥 좀 보자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사내의 손이 설무한의 얼굴로 뻗어왔다. 설무한은 몸을 뒤로 젖히며 손을 쳐냈다. 거친 동작에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가렸던 얼굴이 드러났다.
사내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는 허리춤의 검병을 움켜쥐었다.
"설무한, 너 이 새끼."
사내의 외침에 객잔 안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무인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설무한은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살폈다. 출구는 이미 세 명의 무인이 막아선 상태였다. 정면의 사내가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검끝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설무한은 상체를 비틀어 검신을 피했다. 동시에 왼손을 뻗어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한빙주의 냉기가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사내의 소매 위로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윽, 팔이."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다. 그의 손목은 이미 청자색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설무한은 떨어진 검을 발로 차올려 손에 쥐었다.
차디찬 강철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익숙하고도 낯선 무게였다. 그는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낮췄다.
"물러서라. 피를 보고 싶지 않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무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저놈 팔다리만 잘라가도 황금 백 냥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대여섯 명이 동시에 쇄도했다. 설무한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청운검문의 기본 검식인 낙엽검이었다.
검기는 없었으나 궤적은 정교했다. 사내들의 옷자락이 찢기고 도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객잔을 채웠다. 설무한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뒤로 도약했다.
그때 객잔 2층에서 묵직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난간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청운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위진악의 심복인 조칠이었다. 설무한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칠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작은 호각을 꺼냈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낙양의 밤공기를 찢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설 장로님."
조칠이 난간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뽑았다. 검신에 서린 검기가 푸른 빛을 발하며 설무한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설무한은 검을 들어 막아섰다.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충격에 밀려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입가에 다시 피가 맺혔다.
"진악이가 말하더군. 당신은 결코 죽지 않고 낙양으로 올 거라고."
조칠의 검이 다시 춤을 추듯 몰아쳤다. 설무한은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혈맥이 뒤틀리며 단전에서 거친 통증이 일었다.
"내 자산은 물론이고, 당신의 숨구멍까지 전부 막아두라고 했다."
조칠이 검을 휘두르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 당신 편은 강호 어디에도 없다."
설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 끝에 남아 있는 모든 내력을 끌어모았다. 한빙주의 기운이 검신을 타고 흘러가며 검날을 하얗게 물들였다.
두 사람의 검이 다시 맞부딪쳤다. 조칠의 검에 서린 검기가 차가운 냉기에 부딪쳐 부서져 나갔다. 조칠의 안색이 변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건, 청운검문의 무공이 아니잖아."
"이름을 잃었으니 무공 또한 그래야겠지."
설무한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바닥의 나무판자가 얼어붙으며 빠드득 소리를 냈다. 그는 조칠의 목을 겨누며 검을 내질렀다.
조칠은 당황하며 검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설무한의 검은 허초였다. 그는 몸을 낮춰 조칠의 가슴팍에 장력을 날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조칠의 가슴을 때렸다. 조칠은 뒤로 날아가 탁자를 부수며 처박혔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각혈했다.
설무한은 그를 마무리하지 않고 객잔 밖으로 몸을 날렸다. 호각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무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내린 낙양의 거리는 미로 같았다. 그는 좁은 골목을 누비며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어느덧 도착한 곳은 낙양 전장의 뒷골목이었다.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설무한은 문 옆의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계좌는 동결되었고 명예는 실추되었다. 하지만 그가 전장을 찾은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벽의 특정 벽돌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작은 틈새가 벌어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낡은 열쇠가 나타났다. 사부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만 남겨준 비밀 금고의 열쇠였다.
그때였다. 뒤편 어둠 속에서 차분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설무한은 열쇠를 쥐고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위진악이 서 있었다. 비단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이곳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사부님."
위진악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설무한이 평생 아꼈던 청운검이 들려 있었다.
"그 열쇠를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목숨만은 살려드리겠습니다."
설무한은 열쇠를 주먹에 꽉 쥐었다. 손바닥이 열쇠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려 피가 났다.
"진악아, 너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많은 것을 버렸느냐."
"버린 것이 아니라 얻은 것입니다. 당신이 갖지 못한 권력과 명예 말입니다."
위진악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에 반사된 달빛이 설무한의 눈을 찔렀다.
"사부님은 너무 고지식하셨습니다. 강호는 이제 협이 아니라 실리로 움직입니다."
위진악이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바닥을 가르며 설무한의 발치를 스쳤다. 설무한은 뒤로 물러나며 검을 세웠다.
"내가 가르친 첫 번째 검식을 기억하느냐."
설무한의 말에 위진악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대답 대신 검을 더 강하게 휘둘렀다.
"닥치십시오. 그 따위 가르침은 이미 잊었습니다."
위진악의 검이 설무한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설무한은 피하지 않고 검을 맞받았다.
금속의 마찰음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위진악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설무한의 무릎이 바닥에 닿을 듯 꺾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정의는 이토록 힘이 없습니다."
위진악이 검을 내리누르며 차갑게 웃었다. 설무한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의가 아니다. 이것은 책임이다."
설무한의 단전에서 푸른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한빙주의 진기가 검을 타고 역류하여 위진악의 팔을 덮쳤다.
위진악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손가락부터 시작된 결빙이 팔꿈치까지 순식간에 차올랐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얼어붙은 팔을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설무한은 바닥에 떨어진 청운검을 집어 들었다.
검의 무게가 손목을 타고 가슴까지 전해졌다. 그는 검끝을 위진악의 목에 겨누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설무한의 목소리에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다. 위진악은 떨리는 눈으로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골목 입구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일렁였다. 정무맹의 순찰대가 도착한 것이었다.
"저기다! 대죄인 설무한이다!"
무인들이 화살을 겨누며 달려왔다. 설무한은 위진악의 목에서 검을 뗐다. 그는 열쇠를 품에 넣고 전장의 담벼락 위로 몸을 날렸다.
위진악은 얼어붙은 팔을 부여잡은 채 멀어지는 스승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추격해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위진악의 고함이 낙양의 밤을 뒤흔들었다. 설무한은 지붕 위를 달렸다. 한빙주의 기운이 혈맥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의식이 흐릿해졌다.
그는 전장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게 멈춰라, 설무한."
낙양 전장의 주인이자 강호의 거상인 금만천이었다. 그는 수십 명의 호위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설무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만천은 손에 든 장부를 펼쳐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었네."
그의 뒤로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금빛 안개가 설무한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설무한은 검을 고쳐 쥐며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약속된 것을 받으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