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죽이라고 내놓은 건가.
설무한은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릇에 담긴 것은 쌀알보다 물이 더 많은 멀건 액체였다. 낙양 변두리의 객잔은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질 만큼 허름했다. 탁자 귀퉁이는 기름때에 절어 끈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왼손을 탁자 아래로 숨겼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스며나오는 한기가 뼛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한빙주의 냉기는 파괴된 혈맥을 억지로 이어붙인 대가였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얼음 송곳에 찔린 듯 따끔거렸다.
식은 죽 한 모금을 간신히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미지근한 온기가 차가운 내장과 부딪혔다. 뱃속에서 기묘한 진동이 일어났다. 설무한은 시선을 낮게 깔았다. 벽면에 붙은 누런 방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파의 재산을 횡령하고 스승을 시해하려 한 대역죄인. 그 옆에는 위진악의 얼굴이 그려진 벽보가 당당히 붙어 있었다. 청운검문의 차기 문주이자 정의의 화신이라는 수식어가 눈을 찔렀다. 입안에서 비릿하고 쓴물이 올라왔다.
객잔의 낡은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푸른 도복을 입은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구름 문양. 청운검문의 순찰대였다. 그들은 거만한 걸음걸이로 객잔 중앙을 차지했다. 식사하던 손님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는 짐을 챙겨 뒷문으로 달아났다.
거기 멈춰라.
순찰대원 중 하나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소년의 어깨를 낚아채 가로막았다. 열두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년은 낡은 괴나리봇짐을 품에 꼭 안은 채 벌벌 떨었다. 소년의 눈망울에 공포가 서렸다.
짐을 보여라. 금만상단의 인장이 찍힌 물건을 훔쳤다는 제보가 있다.
아닙니다. 이건 할아버지가 주신 약재일 뿐이에요.
소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순찰대원은 코웃음을 치며 소년의 봇짐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봇짐이 풀리며 마른 약초와 투박한 주먹밥 몇 덩이가 쏟아졌다. 대원은 군화 발로 주먹밥을 짓이겼다. 흙먼지가 묻은 밥알이 지저분하게 바닥에 흩어졌다.
거짓말을 하면 손목을 날려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느냐.
대원이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소년은 바닥에 주저앉아 뒷걸음질 쳤다. 주변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낙양의 공기는 이미 청운검문의 위세에 짓눌려 있었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나무 조각이 손톱 밑을 찔렀다. 이성이 멈추라고 외쳤다. 지금 나서면 위진악의 포위망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약한 자를 지키는 것이 검의 본질이라 가르쳤던 수십 년의 세월을.
설무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순찰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는 한 박자 늦게 소년과 대원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두게.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대원들이 어이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 늙은이는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나.
아이를 겁박하는 것이 청운의 검법이라 가르친 적은 없다.
설무한의 말에 선임 대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설무한의 전신을 훑었다. 낡은 옷차림과 혈색 없는 얼굴이 보였다. 내공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빈약한 체구였다. 대원은 코방귀를 뀌며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우리 문파의 함자를 입에 올리다니.
검신이 허공을 갈랐다. 예리한 금속음이 객잔 내부를 울렸다. 대원은 망설임 없이 설무한의 어깨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죽이려는 기세는 아니었으나 평생 불구가 되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푸른 빛으로 번뜩였다. 단전 깊은 곳에서 잠자던 한빙주의 냉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뻗어 날아오는 검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강철과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상상했던 선혈은 튀지 않았다. 대신 희백색의 서리가 대원의 검신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이게 무슨.
대원의 눈이 경악으로 뒤덮였다. 검을 쥔 손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서릿발이 돋아났다. 살점이 얼어붙는 지독한 추위가 대원의 전신을 강타했다. 설무한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는 단순한 기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년한설의 정수를 담은 극한의 힘이었다.
검신은 이미 투명한 얼음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설무한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검을 가볍게 튕겼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청운검문의 상징과도 같은 장검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얼음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대원은 얼어붙은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한빙진기인가.
뒤에 서 있던 다른 대원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청운검문에서 이 정도의 극음지기를 다룰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십 년 전 사라졌던 전임 수석제자였다.
설무한이다. 죽었다던 설무한이 살아 돌아왔다.
대원 중 한 명이 실성한 듯 소리를 지르며 객잔 밖으로 뛰어 나갔다. 나머지 인원들도 부상당한 동료를 버려둔 채 앞다투어 문밖으로 도주했다. 정적이 찾아온 객잔 안에서 설무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빙주의 냉기가 혈맥을 거꾸로 타고 올라와 심장을 압박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탁자를 짚었다. 소년이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무한은 소년에게 손을 내밀려다 멈췄다. 자신의 손끝에는 여전히 죽음의 한기가 서려 있었다.
객잔 밖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일제히 타올랐다.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리며 객잔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도망친 순찰대원들이 불러온 병력이 아니었다. 이미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정예들이었다.
스승님 역시 살아 계셨군요.
객잔 입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한 목소리였다. 설무한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화려한 비단 도복을 입은 위진악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청운검문의 고수들이 검을 뽑아 든 채 살기를 뿜어냈다.
위진악이 천천히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 조각을 즈려밟으며 설무한에게 다가왔다.
그 몸으로 여기까지 오시다니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이제 그만 쉬셔야겠지요.
위진악이 소매 안에서 천천히 오른손을 꺼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굶주린 늑대처럼 번뜩였다. 위진악은 품 안에서 작은 옥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설무한이 위진악을 제자로 받아들이던 날 직접 깎아 선물했던 증표였다.
위진악은 보란 듯이 옥패를 바닥에 던졌다. 옥패는 설무한의 발치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포위해라. 저 노인을 산 채로 잡아 가두어라.
위진악의 명령과 함께 수십 명의 무인이 객잔 안으로 쇄도했다. 설무한은 부서진 옥패 조각을 내려다보며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전이 비명을 질렀다. 한빙주의 기운이 전신을 찢어발기는 고통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다.
진악아 네놈에게 검을 가르친 것이 내 평생의 한이다.
설무한의 발아래에서부터 차가운 냉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바닥의 기름때와 흙먼지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하얗게 변했다. 위진악의 안색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위진악은 소매 속으로 떨리는 손을 감추며 소리쳤다.
죽여라. 지금 당장 저 자의 목을 쳐라.
설무한은 대답 대신 검 끝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객잔 바닥이 거대한 얼음 꽃처럼 갈라지며 솟구쳤다. 달려들던 무인들의 발목이 순식간에 빙결에 갇혔다.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설무한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위진악의 미간이 떨렸다. 그는 급히 뒤로 신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나 설무한의 검은 이미 위진악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네놈의 목숨으로 이 인연을 끊겠다.
설무한은 단전에 남은 마지막 내공을 쥐어짜 검신에 밀어 넣었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시퍼런 검기가 객잔의 서까래를 일격에 가로질렀다. 위진악이 급히 자신의 검을 뽑아 막아섰다. 두 사람의 검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희백색의 폭발이 일어났다.
충격파에 객잔의 벽면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설무한은 입가에 고인 검은 피를 닦아내며 다시 발을 굴렀다. 이제 물러설 곳도, 숨길 힘도 없었다. 그는 위진악의 심장을 향해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실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죽어라.
설무한의 검이 위진악의 가슴팍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위진악은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붉은 환약 하나를 씹어 삼켰다. 그의 전신에서 피 냄새 진동하는 진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아직 멀었습니다 스승님.
위진악이 설무한의 검신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손바닥이 베여 나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위진악의 눈동자가 기괴한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설무한을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검을 쥔 설무한의 손목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았다. 위진악의 검이 설무한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설무한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고 위진악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이것이 네가 원하던 끝이냐.
설무한은 왼손에 모인 한빙진기를 위진악의 단전을 향해 그대로 때려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