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블랙 먼데이
72시간 중 38시간 경과. 남은 시간: 34시간.
어제 오후, 이카루스 헌터 7명에게 PMC 전환 구조를 설명했다. 반응은 반반이었다. 박성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영철은 코웃음을 쳤다. 숙자를 본 뒤에야 침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늘은 다른 전선이다.
▶ 오전 10시. 엘리시움 사무실.
엘리시움은 강남 외곽의 4층짜리 빌딩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이카루스와는 달랐다. 복도에 화분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사무실 안에는 원두커피 냄새가 남아 있었다. 태경이 아침에 내렸을 것이다.
책상 위에 마석 시세 차트가 펼쳐져 있었다. A3 용지에 인쇄된 3년 치 추이. 우상향. 선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지금 시장은 마석이 영원히 오를 거라고 믿고 있다.
틀렸다.
태경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고, 차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이 수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 남자는 숫자를 읽을 때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가는 버릇이 있다.
“거래처 대체 루트는 확보했어.” 태경이 손가락을 세웠다. “한빛에너지 대신 ‘동원정제’, 크로스기어 대신 ‘삼진테크’. 비용은 15% 높지만 품질은 동급이야.”
“고맙습니다.”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고마움을 받아들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금이 모자라.” 태경이 차트를 두드렸다. 손가락 끝이 우상향 선의 끝을 짚었다. “이카루스 LBO 이자 상환 + 대체 거래처 선급금 + 운영비. 다음 달부터 현금 흐름이 마이너스야.”
승헌은 차트를 봤다.
마석 시세. 저급 마석 가격이 지난 2년간 40% 올랐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서. D급 던전 남획으로 단기 공급이 줄었고, 마나 산업 확장으로 수요는 계속 늘었다. 시장 전체가 마석을 금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몇 년 더 오를 거라는 애널리스트 보고서가 주마다 나왔다.
승헌은 차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2024년부터 2026년까지. 선이 꺾이는 지점이 세 군데 있었다. 단기 조정. 매번 시장은 공포에 빠졌고, 매번 회복했다. 그 패턴이 시장의 자신감을 만들었다. '마석은 떨어져도 반등한다.' 모든 투자자가 그렇게 믿고 있다.
그 자신감이 버블이다. 그리고 버블은 터진다.
하지만 승헌은 알고 있었다. 2년 후를 알고 있었다.
2028년 8월. 동남아 6개국에서 D급 던전이 동시 발견된다. 저급 마석 공급이 300% 폭증. 가격은 1/4로 폭락. 길드 연쇄 도산. 블랙 먼데이.
전생의 기억이었다. 뉴스 헤드라인까지 기억한다. '마석 대폭락, 중소 길드 40% 도산 위기'. 그날 한국 마석 거래소가 서킷 브레이커를 발동했다. 전생에서 승헌은 그 폭락을 TV로 봤다. 이카루스의 인수전을 포기한 뒤였고, 형의 밑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화면 속 숫자들이 빨간색으로 물들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 형은 웃고 있었다. 미래그룹은 마석 폭락의 수혜자였다. 부채비율이 높은 중소 길드들을 헐값에 사들였다. 위기는 형에게 쇼핑 시즌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 자리에 선다. 형이 아니라 내가 위기를 산다.
그날, 이 차트의 선이 절벽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전 세계가.
“태경 씨.”
“응.”
“마석 선물 펀드를 하나 만들어야 합니다.”
태경의 손가락이 커피잔 위에서 멈결다. 커피 수면 위에 남아 있던 작은 막이 흔들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그만큼 정지한 것이다.
“선물?”
“저급 마석 숏 포지션. 2년 만기.”
태경이 안경을 벗었다. 안경다리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생각할 때의 버릇이다. 5초.
“근거는?”
말할 수 없다.
“마켓 아이 분석입니다.” 승헌이 말했다. “현재 저급 마석 공급 구조는 지속 불가능합니다. D급 던전의 글로벌 발견율이 연평균 12%씩 증가 중이고, 동남아 미탐사 지역의 마나 밀도 데이터를 보면 2년 내 대규모 신규 공급이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절반은 사실이었다. 마켓 아이가 보여주는 수치는 공개 데이터 기반이고, 동남아 마나 밀도 추이는 실제로 상승세였다. 그 데이터만으로도 ‘장기 조정 가능성’을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2028년 8월’이라는 정확한 시점은 전생의 기억에서 온 것이다. 마켓 아이는 시점을 모른다. 승헌만 알고 있다.
태경은 10초 동안 승헌을 바라봤다. 안경을 다시 걸었다.
“숏 포지션은 리스크가 크다. 시장이 2년 더 오르면 펀드가 먼저 죽어.”
“그래서 외국계 펀드를 경유해야 합니다.”
“외국계?”
“차명 구조입니다.” 승헌이 말했다. “케이맨 아일랜드 SPC. 엘리시움이 LP로 참여하되, GP는 현지 법인. 한국 자본시장법의 직접 적용을 피합니다.”
태경의 표정이 바뀌었다.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이 남자는 수익률 앞에서 도덕을 잠시 접어두는 능력이 있다. 그게 승헌이 태경을 선택한 이유다.
“SPC 설립비는?”
“초기 3억. GP 선임과 법률 자문 포함.”
“3억이면 엘리시움 운전자금의 15%야.” 태경이 안경을 올렸다. “적은 돈이 아니야. 이카루스 운영비도 빠듯한데.”
“운전자금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SPC는 이카루스 현금 흐름과 완전히 분리된 구조입니다.”
태경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두 번. 리듬이 느릸 것은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리스크는?”
“내부자 거래 의혹. 미래 정보 활용으로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의심받을 수 있다, 가 아니라 의심받을 거다, 아닌가?”
승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경의 눈이 2초간 승헌의 눈을 고정했다.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는 걸 이 남자는 알고 있다.
태경이 커피를 마셨다. 한 모금. 내려놓았다. 커피잔이 테이블에 닿을 때 작은 소리가 났다.
“조건 하나. 은설 씨 명의는 쓰지 마. 그 사람은 보호해야 돼.”
“처음부터 계획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태경이 승헌을 봤다. 안경 너머의 눈이 달랐다. 투자자의 눈이 아니라, 탐정의 눈이었다. “마켓 아이라는 스킬이 이 정도 예측을 할 수 있어? 글로벌 마석 시장 2년 후를?”
“할 수 있습니다.”
“근거는?”
“수익률로 증명합니다.”
태경은 3초간 더 봤다. 안경다리를 다시 돌렸다. 느리게. 생각을 정리하는 속도였다.
“좋아. 펀드 세팅은 내가 할게. SPC 설립, GP 선임, LP 유치 구조까지 2주.”
승헌은 일어섰다.
태경이 등 뒤에서 말했다.
“승헌 씨.”
돌아봤다. 태경은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처음과 같은 자세. 하지만 눈이 달랐다. 커피를 보는 게 아니라 승헌을 보고 있었다.
“2년 뒤에 네 말이 틀리면, 엘리시움은 끝이야. 나도 끝이고.”
“틀리지 않습니다.”
문을 닫았다.
▶ 엘리시움 복도.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가 타일 바닥에 울렸다. 4층의 창으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마켓 아이가 수치를 갱신했다.
블랙 먼데이 발생 확률: 94.7%. 예상 시점: 2028년 7월~9월. 포지션 수익 예상: 투자금 대비 820%.
820%.
이 숫자 하나면 이카루스의 모든 부채를 갚고, 백호 인수의 종잣돈까지 마련할 수 있다. 이카루스를 발판으로, 마석 시장을 지렛대로, 백호를 다음 목표로. 그 전체 그림이 820%라는 숫자 안에 들어 있다.
투자금 20억 기준 수익 164억. 거기에 이카루스 자체 가치 상승분을 합치면 200억 이상의 자산이 된다. 형의 미래그룹과 정면으로 싸울 규모는 아니지만, 최소한 테이블에 앉을 자격은 되는 금액이다.
하지만 2년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 당장의 현금 흐름 문제는 이 펀드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시간이다. 2년을 버틸 체력. 그리고 체력의 첫 번째 조건은 현금이다.
▶ 오후 4시 20분.
엘리시움 사무실을 나서자, 은설에게서 전화가 왔다.
“백호 길드 PMC 의뢰 건, 미팅 일정 잡았습니다. 내일 오후 2시. 백호 본사.”
“의뢰인이 직접 나옵니까?”
“한기범 길드장이 직접 면담한다고 합니다.”
한기범. 백호 길드장. 무력 랭킹 1위. 이름만으로도 시장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전생에서 이 남자를 적대적 M&A로 꺽는 데 3년이 걸렸다. 이번에는 그의 돈을 먼저 쓴다.
“은설 씨.”
“네.”
“백호 측 담당자 이름이 운영팀장이었죠. 혹시 실명 확인 됐습니까?”
“박정우. 백호 길드 운영팀장. 전직은 태성그룹 인사팀입니다.”
태성 출신. 또 태성이다. 하지만 이번엔 형의 줄이 아니라 백호 자체의 라인이다. 구분해야 한다.
전화를 끊었다.
엘리시움 건물을 나서자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강남의 빌딩 사이로 오렌지색 반노을이 내려와 있었다. 거리의 소음이 희미해졌다. 퇴근 시간이 지난 뒤의 강남은 조용해지는 대신 더 밀도가 높아진다. 사람들이 술집과 카페로 흐르는 시간.
뒤에서 태경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켓 아이라… 그걸로는 설명이 안 돼.
태경은 의심하고 있다. 당연하다. 2년 후 시장을 정확히 예측하는 스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켓 아이는 공개 데이터 기반의 분석 도구이다. 확률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시점을 특정할 수는 없다. 그건 태경도 안다.
하지만 태경은 수익률을 선택했다. 의심보다 수익을 취한 것이다. 투자자다운 판단이다.
의심은 허용 범위 안이다. 확신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문제는, 태경이라는 사람이 의심을 오래 묻어두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답을 요구할 것이다. 그때까지 숫자로 답을 준비해야 한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승헌은 걸음을 옮겼다.
72시간 중 44시간 경과. 남은 시간: 28시간.
스카우트 대응: 진행 중. 거래처 대체: 진행 중. PMC 전환: 다음 주 개시. 블랙 먼데이 포지션: 셋업 2주. 백호 미팅: 내일.
형의 철 수에 다섯 개의 대응을 동시에 돌리고 있다. 전생에서는 하나도 못 했다.
이번 생에서는 전부 한다.
3월의 바람이 강남 거리를 쓸었다. 밤이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