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미래그룹의 첫 수
전날 밤의 통화는 3분이었다.
백호 길드.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운영팀장'이라고만 밝혔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배경 소음은 없었다. 매우 조용한 곳에서 걸었다는 뜻이다.
용건은 단순했다. 제주 블랙 존 D구역 채굴 호위. 3개월 계약. 상세 조건은 한기범 길드장이 직접 면담하겠다고 했다.
백호. 도윤 쪽 화이트 나이트 후보였으나 조건 미합의로 이탈한 길드. 이쪽으로 독자 접촉을 해왔다.
의도: 미정. 하지만 적의 실패작이 내 기회가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승헌은 통화를 끊고 시계를 봤다. 자정이 넘어 있었다.
72시간이 분수령이라고 했다. 이미 6시간이 지났다.
잠들기 전에 마켓 아이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공개매수 성공 확률: 66%. 도윤 전면전 변수 반영 완료.
66%. 어제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의 숫자였다. 이 숫자가 내일 아침에도 유지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형은 밤에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 다음 날 아침. 이카루스 사무실.
사무실 문을 열자 형광등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커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정수기 위에 종이컵만 쌓여 있었다.
책상 14개. 의자 14개. 앉아 있는 사람, 6명.
8명이 출근하지 않았다.
결근률 57%. 조직 와해 전조.
마켓 아이가 어젯밤의 66%를 갱신했다.
스카우트 시도 감지. 내부 이탈 반영. 인수 성공 확률: 54%.
하루 만에 12%포인트. 형이 밤사이 움직인 결과였다.
72시간 중 14시간 경과. 남은 시간: 58시간.
박성우가 다가왔다. 눈 밑에 그림자가 내려 있었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되는 헌터가 다섯입니다. 나머지 셋은 오늘 중으로 결정하겠다는 말만 남겼습니다."
"누구 연락입니까?"
"모릅니다. 다만……"
박성우가 말을 멈췄다. 오른손이 주머니 위를 더듬었다. 스마트폰이 들어 있는 쪽이었다. 승헌은 기다렸다. 3초.
"어젯밤에 전화가 왔습니다. 저한테도."
승헌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연봉 2배. A급 길드 보장. 미래그룹 계열이라고 했습니다."
스카우트 비용 산정. 헌터 8명 × 연봉 2배 = 연간 약 16억. 형에게는 푼돈이다. 하지만 이카루스에게는 전 인력의 절반이다.
"성우 씨는 남은 겁니까?"
"저는……" 박성우가 시선을 내렸다. 형광등 빛이 그의 이마 위에서 번들거렸다. "아직 결정 안 했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승헌은 그쪽이 나았다. 거짓 충성보다 정직한 동요가 계산하기 쉬우니까.
"오후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박성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남은 6명의 헌터 중 두 명이 승헌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키보드를 치고 있지 않았다.
정상이다. 사람은 생존을 계산한다. 나처럼.
▶ 오전 10시 12분.
승헌은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냈다. 은설에게 전화했다.
"거래처 현황 정리해주세요. 어제 공개매수 발표 후 이탈 통보가 왔을 겁니다."
은설의 대답은 빨랐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이미 정리해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 곳입니다. 마석정제소 ‘한빛에너지’, 장비 납품사 ‘크로스기어’, 보험 대리점 ‘세이프존’.”
"계열은요?"
"확인 중입니다. 한빛에너지는 태성그룹 자회사였습니다."
승헌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멈췄다. 태성그룹. 아레스 길드의 모기업. 헌터 업계에서 미래그룹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재벌.
형이 태성과 손잡았다.
"나머지 두 곳도 태성 계열인지 확인해주세요."
"이미 확인했습니다." 은설의 목소리에 0.5초의 간격이 있었다. 나쁜 소식을 전할 때 이 사람이 만드는 간격이다. "크로스기어는 태성 2차 벤더. 세이프존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대표이사가 태성그룹 출신입니다."
3곳 모두 태성 라인.
마켓 아이가 수치를 갱신했다.
거래처 이탈에 따른 매출 영향: 월 매출 22% 감소. 인수 성공 확률 재산정: 48%.
54%에서 48%. 오늘 아침 사무실에 발을 들인 이후로만 6%가 더 빠졌다.
어젯밤 66%가 14시간 만에 48%. 형의 첫 수는 빠르고, 넓고, 정확하다.
"대체 거래처 확보 가능합니까?"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2주."
2주. 이카루스의 현금 흐름으로는 3주가 한계였다. 1주의 여유. 타이트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문제는 형이 2주를 가만히 기다려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경 씨에게 연결해주세요. 엘리시움 네트워크로 대체 거래처를 잡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은설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강승헌 씨."
"네."
"어젯밤 백호 길드에서 전화 온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운영팀장 명함이 제 메일로도 왔습니다."
은설이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정보 처리 속도는 마켓 아이와 닮은 구석이 있다.
"미팅 일정 잡아주세요. 가능하면 이번 주 안으로."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에 남은 6명의 헌터가 승헌을 보고 있었다. 불안한 눈이었다. 기대하는 눈은 아니었다. 걱정하는 눈이었다. 자기 밥그릇이 위태로운 사람들이 짓는 표정.
승헌은 일어섰다.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보드마카를 집었다. 뚜껑을 열었을 때 잉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오늘 오후 3시에 전체 회의합니다. 출근한 분들만."
"뭘 논의하는 건데요?" 헌터 중 한 명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방어적인 톤이었다.
"논의가 아닙니다." 승헌이 말했다. "새로운 수익 구조를 제안합니다."
화이트보드에 두 단어를 적었다. 'PMC 전환'. 적고 나서 뚜껑을 닫았다. 설명은 3시에 한다. 지금은 저 두 단어가 궁금증으로 일하는 게 낫다.
72시간 중 18시간 경과. 남은 시간: 54시간.
▶ 오후 3시. 이카루스 회의실.
회의실은 10평짜리 방이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열 개. 창 하나.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어서 오후 햇살이 테이블 위에 줄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6명이 앉았다. 그리고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어젯밤에 결정하겠다던 3명 중 1명이 돌아왔다. 7명.
복귀율 12.5%. 낮지만, 핵심 인력은 아직 남아 있다.
돌아온 헌터의 이름은 김대호였다. C급 중위. 전투형. 의자를 빼고 앉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만 승헌을 향해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이었다.
승헌은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화면에는 PMC 파견 계약 조건이 띄워져 있었다.
"이카루스의 수익 구조를 바꿉니다."
승헌이 말했다. 화이트보드로 걸어가며 보드마카 뚜껑을 열었다.
던전 공략료 의존에서 PMC 파견 + 던전 공략 병행 체제로 전환. 기업 보안 용역 시장. 일당 $600에서 $1,700. 안정적인 현금 흐름. 숫자를 하나씩 화이트보드에 적으며 설명했다.
헌터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이영철이었다. 팔짱을 끼고 있었다.
"우리가 경비원이요?"
"기업 보안 전문가입니다." 승헌이 말했다. 보드마카로 숫자 두 개를 동그라미 쳤다. "$600과 $1,700. 경비원과의 차이는 일당에 있습니다."
이영철의 팔짱이 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던 것이 멈추긴 했다.
태블릿을 돌렸다. 월 예상 수익. 현재 던전 공략료 대비 1.4배. 숫자가 화면에 찍혀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숫자 앞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침묵한다. 승헌이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김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위험은요? 기업 보안이면 민간인 사이에서 일한다는 건데,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집니까?"
"계약서에 책임 조항을 넣습니다. 이카루스 귀책 사유가 아닌 한 의뢰사가 부담합니다. 보험도 별도 가입합니다."
김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동의는 아니었지만, 거부도 아니었다.
"언제부터요?" 박성우가 물었다.
"다음 주부터. 첫 의뢰인은 제가 잡겠습니다."
박성우가 옆의 헌터를 봤다. 눈짓이 오갔다. 승헌은 그 눈짓의 내용을 계산하지 않았다. 마켓 아이가 읽을 수 없는 종류의 데이터였다.
회의가 끝났다. 헌터들이 하나씩 나갔다. 이영철이 가장 마지막이었다. 문 앞에서 멈추더니 돌아봤다.
"경비원은 싫습니다."
"보안 전문가입니다."
이영철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문을 닫고 나갔다. 거절이 아니었다.
▶ 오후 5시 40분. 이카루스 건물 1층.
승헌은 사무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통에 먼지 냄새가 고여 있었다.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고장 난 지 2주째였다. 수리비 230만 원. 지금의 이카루스에서는 회의 안건이 될 만한 금액이었다.
은설에게서 문자가 왔다.
[거래처 3곳 확인 완료. 전부 태성 라인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 미래그룹 전략기획팀장 이름 확인했습니다. 최준혁. 강도윤 부회장 직속입니다.]
최준혁.
전생에서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형의 손발. 깨끗한 서류와 더러운 실행을 동시에 처리하는 사람. 전생에서 이 남자가 이카루스 인수를 방해했을 때, 승헌은 싸울 자본이 없어서 물러났다.
형은 직접 오지 않는다. 대신 체스 말을 보낸다. 최준혁은 형의 나이트다. 대각선으로 움직이고, 예측이 어렵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켓 아이가 조용히 수치를 갱신했다.
태성그룹-미래그룹 공조 확률: 78%.
78%. 이건 단순한 거래처 이탈이 아니었다. 형이 태성이라는 재벌을 끌어들인 것이다. 개인 간의 싸움이 기업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형이 이카루스를 원한 건 아니다. 승헌을 멈추고 싶은 것이다. 이카루스는 도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도구를 빼앗으면 장인도 무력해진다. 역으로 말하면, 도구를 지키는 동안은 장인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1층 출구로 나섰다. 3월의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차갑지는 않았다. 겨울이 끝나가는 바람이었다.
인수 확률 48%. 어젯밤 66%에서 18%포인트 하락. 24시간도 안 됐다.
하지만 거래처를 빼앗긴 것이 전부 손해는 아니다. 태성과의 거래를 끊으면 이카루스의 의존도가 낮아진다. 인수 후 구조조정이 더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형이 이 길드의 가격을 낮춰주고 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돌아왔다.
은설에게 전화했다.
"이탈한 거래처 3곳 계약서 전부 정리해주세요. 위약금 조항 확인하고, 태성 측이 먼저 계약을 파기한 증거를 보전해두세요."
"이미 스캔해뒀습니다."
승헌은 전화를 끊고, 다음 번호를 눌렀다. 태경.
"태경 씨, PMC 의뢰인 하나 잡아야 합니다. 가능하면 규모 있는."
태경의 대답은 짧았다.
"마침 하나 들어왔어. 제주 블랙 존 채굴 호위. 의뢰인이 좀 까다로운데."
"누구입니까?"
"백호 길드."
승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의 전화. 운영팀장의 차분한 목소리. 제주 D구역. 3개월. 조각들이 맞아떨어졌다. 태경의 네트워크로도 같은 건이 들어왔다는 건, 백호가 이카루스를 복수 채널로 접근하고 있다는 뜻이다.
적의 실패작이 내 기회가 되는 경우. 도윤이 백호를 놓쳤고, 백호가 이쪽으로 왔다. 우연은 아니다. 시장은 빈자리를 싫어한다.
마켓 아이가 새로운 수치를 올렸다.
백호 길드 접촉 시 장기 전략 가치: 산정 중…… 백호 내부 재무 데이터 접근 가능성 분석 필요.
산정 중. 마켓 아이도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승헌은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백호를 적대적 M&A로 꺾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때 가장 어려웠던 건 내부 정보 확보였다. PMC 의뢰를 받으면 3개월 동안 백호의 현장에 발을 들일 수 있다.
적의 돈을 받으면서 적의 약점을 배운다. 최고의 실사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승헌은 걸음을 옮겼다.
72시간 중 22시간 경과. 남은 시간: 50시간.
형의 첫 수: 스카우트 + 거래처 이탈 + 태성 공조. 세 방향 동시 타격.
내 첫 수: PMC 전환 + 대체 거래처 + 백호 접촉.
다음 수는 형이 먼저 둔다. 항상 그렇다. 형은 선수를 두고, 나는 후수를 두면서 판을 뒤집는다.
그게 전생에서 배운 유일한 패턴이다.
3월의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이번에는 조금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