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빈자리
72시간이 끝났다.
어제 저녁, 도윤의 72시간 시한이 만료됐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화이트 나이트는 오지 않았다. 법적 가처분도 아직이다. 대신 HMB 조사와 스카우트라는 두 방향으로 압력이 왔다. 형의 첫 수는 정면 충돌이 아니라 소모전이었다.
예상대로다. 형은 직접 때리지 않는다. 시간을 물에 넣고 기다린다. 이카루스가 스스로 말라가길.
그래서 오늘이 중요하다. 소모전에 지기 전에 현금을 만들어야 한다.
▶ 오전 9시. 이카루스 훈련장.
훈련장은 지하 1층에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 철제 벽, 천장에 매달린 LED 조명. 지하라서 창이 없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검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강민재가 떠난 자리가 보였다. 락커에 이름표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 떼려다 만 흔적. 풀 자국이 벽에 묻어 있었다. 락커 위에 검 관리 키트가 놓여 있었다. 민재가 두고 간 것인지, 아니면 가져가는 걸 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은 헌터 6명이 훈련 중이었다. 정확히는 훈련을 하는 척이었다. 동작이 느렸다.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소리 사이에 침묵이 깔려 있었다. 사기가 바닥이라는 건 숫자 없이도 알 수 있었다.
박성우가 다가왔다. 손에 공략 스케줄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공략 스케줄 절반을 소화 못 합니다. 민재가 빠지면서 C급 던전 솔로 가능 인력이 없어요.”
“D급은요?”
“D급은 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 공략료가 C급의 1/3이에요. 수익이 안 나옵니다.”
월 매출 추가 22% 감소. 누적 감소율 44%. 이카루스의 던전 수익은 사실상 중환자실에 들어간 상태다.
던전 공략으로는 이카루스를 유지할 수 없다. PMC가 유일한 답이다.
“PMC 파견 계약 진행합니다.”
“그런데요.” 박성우가 고개를 긁었다. 머리카락 위를 손톱으로 긁는 버릇. 나쳄 소식을 전할 때의 신호다. “PMC 계약서에 ‘최소 B급 이상 헌터 1명의 책임자 서명’이 필요합니다. 이건 헌터관리국 규정이에요.”
B급 이상 헌터 서명.
이카루스에는 B급 이상이 없다. 강민재도 C급이었다. 외부에서 데려와야 한다.
아니면.
승헌 자신이 나서야 한다.
하지만 아직 각성 상태를 공개할 수 없다. 공개하면 HMB 조사의 범위가 달라진다. ‘각성 실패자’가 길드를 인수한 것과, ‘미분류 각성자’가 길드를 인수한 것은 법적 의미가 다르다. 이정호가 바로 그 점을 파고들 것이다.
타이밍이 아니다. 아직은.
“외부 용병 헌터 계약은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B급 용병의 일일 단가가 500만 원입니다. PMC 수익의 절반이 인건비로 나갑니다.”
태경에게 전화했다.
“B급 용병 비용이 문제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 태경의 대답은 짧았다. “PMC 시장은 규제가 빡빡해. B급 서명 없이는 기업 의뢰를 못 받아.”
전화를 끊었다.
승헌은 훈련장 벤치에 앉았다. 철제 벤치였다. 등을 기대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등 뒤로 전해졌다. 헌터들의 훈련 소리가 울렸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마력이 공기를 흔드는 소리. 사람들이 죽지 않기 위해 하는 연습.
방법은 두 가지. 하나, 은밀히 B급 서명을 구한다. 둘, 각성을 공개하고 직접 서명한다.
둘 다 리스크가 있다. 하나는 돈, 둘은 시간. 지금은 둘 다 없다.
▶ 오후 2시. 백호 길드 본사.
백호 본사는 강남 삼성동에 있었다. 22층짜리 유리 건물. 로비에 백호의 엠블럼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양. 로비 전체에 희미한 마력의 압박감이 깔려 있었다. A급 이상 길드의 본사는 건물 자체가 마력 차폐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일반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승헌의 몸은 느꼈다. E급 신체의 피부 위로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
15층 회의실. 한기범이 먼저 와 있었다.
첫 인상은 크기였다. 190cm. 어깨가 밸드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어깨 자체가 벽처럼 보였다. 두 번째 인상은 눈이었다. 눈동자가 어두웠다. 마력이 많은 헌터의 특징이다. 마력이 홍채를 잡아먹는다. 무력 1위의 눈은 그래서 깊고 어두웠다.
기범이 승헌을 올려다봤다. 앵아 있었음에도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C급 길드 사장이 직접 왔어?”
“의뢰인이 직접 나오셨으니, 저도 직접 왔습니다.”
“앉아.”
마주 앉았다. 테이블은 널었다. 기범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손이 컴다. 주먹이 밤톨이만 했다. 검을 잡는 손이었다. 사업가의 손이 아니라 사냥꾼의 손이다.
서류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제주 블랙 존 D구역 호위 계약 개요.
“간단해.” 기범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런데 낮은 목소리가 회의실 전체를 채웠다. 마력이 말에 실리는 것일까. 아니면 무력 1위의 자신감이 만드는 압력일까. “D구역 마석 채굴 현장 호위. 3개월. 백호 소속 채굴팀 12명을 보호하면 돼. 대가는 채굴 수익의 5%.”
승헌은 마켓 아이로 계산했다.
제주 블랙 존 D구역 마석 매장량 추정: 47톤. 시장가 기준 약 230억 원. 5% = 11.5억 원. 3개월 계약 기준 월 3.8억.
“계약 조건을 봐도 됩니까?”
기범이 서류를 밀었다. 손가락 하나로. 승헌은 한 장 한 장 넘겼다.
7페이지. 제12조.
‘공략 실패 또는 호위 대상 인명 피해 발생 시, 이카루스 길드는 피해액의 200%를 손해배상한다.’
함정.
승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계속 읽었다.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함정을 발견한 순간 반응하면 상대가 그것을 읽는다. 협상의 기본이다.
제15조. ‘본 계약의 유효 기간 중 이카루스 길드의 경영권 변동 발생 시, 백호 길드는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기지급 대가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두 번째 함정. 경영권 변동 조항.
이카루스의 경영권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걸 기범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공개매수가 진행 중이고, 형이 방해하고 있다는 것까지.
이 남자는 뉴스를 보고 있다. 그리고 뉴스 뒤의 숫자를 읽을 줄 안다.
승헌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제12조와 제15조, 수정이 필요합니다.”
“뭐가 문제야?” 기범의 말투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낮고, 여전히 널었다.
“손해배상 200%는 업계 관행인 100%의 두 배입니다. 그리고 경영권 변동 조항은 현재 이카루스의 인수 상황을 노린 조건입니다.”
기범이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회의실의 공기를 바꿨다. 온도가 1도 내려간 느낌. 마력이 없는 사람도 느낄 정도의 압박. 무력 1위가 웃을 때의 부산물.
“C급 길드 사장이 계약서를 잘 읽네.”
“사장이니까 읽는 겁니다.”
침묵이 5초 흘렀다. 기범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두드렸다. 마치 설명이 끝났다는 뜻처럼.
“수정 안 해.” 기범이 말했다. “이 조건이 싫으면 안 하면 돼.”
예상했다.
자금 사정상 거절할 수 없다. 기범도 그걸 알고 있다. 이것이 협상의 본질이다. 필요한 줁이 진다.
승헌은 서류를 다시 들었다.
“수락합니다.”
서명했다. 펜이 종이를 누르는 감촉이 달랐다. 어제 이정호 앞에서 서류를 내밀었을 때와는 다른 무게.
기범이 서명된 계약서를 가져가며 말했다.
“재밌겠네. C급이 제주를 감당할 수 있을지.”
“감당하겠습니다.”
▶ 백호 본사 복도.
승헌은 일어서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었다. 백호 본사의 복도는 넓었다. 바닥이 대리석이었고, 벽에 백호 소속 헌터들의 단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의 헌터들은 웃고 있었다. 길드의 전성기 사진일 것이다.
손해배상 200%. 경영권 변동 해지. 둘 다 리스크다. 하지만 이 계약이 주는 건 돈만이 아니다.
백호 내부 접근. 채굴팀 12명과 3개월을 보내면, 백호의 운영 구조가 보인다. 인력 배치, 장비 상태, 내부 갈등.
적의 돈을 받으면서 적의 약점을 배운다. 최고의 실사다.
마켓 아이가 수치를 올렸다.
백호 길드 적대적 M&A 기초 데이터 확보 가능성: 72%.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로비의 대리석 엠블럼이 다시 보였다. 포효하는 호랑이.
언젠가는 저 엠블럼의 주인이 바뀐다.
밖으로 나섰다. 3월의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