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가드 성벽 위로 찢어지는 굉음이 쏟아졌다. 레온하르트 반 아스텔의 손에 들린 공물 명부가 거센 바람에 파닥였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가 수직으로 강하했다. 붉은 비늘이 태양 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뜩였다. 거대 용 발락이었다.
용의 숨결이 대기를 가르며 금속성 소음을 내뱉었다. 성벽을 감싼 대공 방어진이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투명한 마력 막 위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레온하르트는 흩날리는 명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거칠었다. 그는 차분하게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왼손에 들린 낡은 법전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발락의 앞발이 성벽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육중한 무게에 단단한 화강암이 부서져 내렸다. 돌가루가 레온하르트의 어깨 위로 하얗게 내려앉았다. 용의 황금빛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성벽 위를 순식간에 달구었다.
“인간, 바칠 준비는 되었나.”
발락의 목소리는 지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동 같았다. 성벽 바닥이 파르르 떨렸다. 레온하르트의 구두 굽을 통해 그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법전의 중간 갈피를 펼쳤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용의 숨소리 사이로 가늘게 섞였다.
“올해의 공물 명부는 이미 지난달에 확정되었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발락이 콧김을 내뿜자 뜨거운 바람이 그를 덮쳤다.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으나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부족하다. 노동력이 더 필요해. 인간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다.”
용의 앞발이 성벽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오늘부로 공물 징수량을 오십 퍼센트 인상하겠다. 거부하는 도시는 징벌적 사냥의 대상이 될 것이다.”
성벽 아래 대기하던 병사들의 창끝이 떨렸다. 철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공포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레온하르트는 법전의 특정 조항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손가락이 낡은 종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발락, 당신의 갈증은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용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발락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작게 흔들렸다.
“오백 년 전 체결된 최후의 평화 조약 제십사 조 삼 항을 기억하십니까.”
용의 눈꺼풀이 천천히 꿈뻑였다. 불쾌함이 서린 노란 안광이 레온하르트를 짓눌렀다.
“조약 따위를 내밀 셈이냐. 내 앞발 아래 부서질 종이 쪼가리를.”
“이것은 종이가 아니라 대륙의 질서입니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흉작이나 천재지변 시 증액은 법적 무효입니다. 올해 기사령 평원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명부의 기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수량 부족으로 인한 수확량 감소는 이미 의회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귀하가 요구하는 추가 징수는 명백한 위반입니다.”
발락의 목구멍 안쪽에서 붉은 빛이 일렁였다. 브레스가 터져 나오기 전의 전조였다. 성벽 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희박해졌다. 레온하르트의 셔츠 깃이 땀에 젖어 목을 조여왔다.
“조약 제십사 조를 위반한 징수는 침략으로 간주합니다. 침략으로 규정되는 순간, 대공 방어진의 출력 제한은 해제됩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성벽 위로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당신이 브레스를 뿜는 순간, 이 성벽에 설치된 굴절 마법진은 당신의 가슴팍을 향할 것입니다.”
발락의 살기가 피부를 바늘처럼 찔러댔다. 용은 고개를 낮추어 레온하르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비린내가 섞인 뜨거운 숨결이 안경 렌즈를 하얗게 흐려놓았다. 레온하르트는 안경을 벗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용의 거대한 이빨이 보였다.
“법이라니. 인간들이 만든 비겁한 울타리군.”
용의 목소리가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나를 묶지는 못한다.”
발락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용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마나가 날카로운 전류로 변해 지직거렸다.
“언령을 들어라. 대지는 굴복하고, 바위는 무너질지어다.”
발락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현실을 직접 타격하는 물리적인 권능이었다.
성벽의 돌들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단단했던 바닥이 진흙처럼 출렁였다. 레온하르트의 무릎이 꺾였다. 장기 내부가 뒤틀리는 통증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콧속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붉은 핏방울이 법전의 하얀 여백 위로 툭 떨어졌다.
피가 닿은 조약문 조항이 붉게 물들었다. 발락의 눈에 승리감이 서렸다. 용의 언령은 인간의 법 따위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왜곡되며 레온하르트의 뼈를 으스러뜨릴 듯 압박했다.
레온하르트의 오른쪽 소매 안쪽에서 차가운 박동이 느껴졌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나가 한곳으로 쏠렸다. 짙은 푸른색 빛이 옷감을 뚫고 터져 나왔다. 팔목을 감싸고 있던 낡은 금속 팔찌가 진동했다. 고대 룬어가 새겨진 아티팩트가 깨어난 것이다.
푸른 빛은 보호막이 되어 레온하르트를 감쌌다. 용의 언령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압력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뒤틀리던 성벽의 돌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멈춰 섰다.
“무엇이냐, 그 빛은.”
발락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섞였다. 용의 눈동자가 레온하르트의 팔목을 향해 고정되었다. 푸른 빛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타올랐다.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팔목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전신의 통증을 마비시켰다. 아티팩트에 새겨진 룬 문자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용의 언령과 공명하며 기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것은 당신들이 잊고 싶어 하던 기록입니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조약의 이면에 새겨진 진짜 법령이지요.”
발락의 거대한 날개가 움찔거렸다. 용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성벽을 움켜쥐었던 발톱이 빠져나가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이 아티팩트의 빛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이다. 네놈, 정체가 뭐냐.”
발락이 포효하며 다시 앞발을 치켜들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살의가 가득 담긴 일격이었다. 공기를 찢는 발톱이 레온하르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레온하르트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팔목의 아티팩트를 용의 발톱을 향해 내밀었다.
“판결을 집행하겠습니다.”
푸른 빛이 거대한 파동이 되어 성벽 전체를 휩쓸었다. 용의 발톱과 푸른 광막이 충돌했다. 폭음과 함께 아델가드의 대기가 하얗게 타올랐다.
성벽 아래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이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빛의 폭풍 속에서 레온하르트의 검은 실루엣만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발락의 거대한 몸집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용은 중심을 잡으려 날개를 퍼덕였으나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팍 비늘 하나가 푸르게 변하며 갈라졌다. 용의 비늘이 부서지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종이 깨지는 것처럼 맑고 기괴했다.
“이, 이럴 수가.”
발락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불사신과 같았던 용의 육체에 선명한 균열이 생겨 있었다. 그 틈새로 푸른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안경알 너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법전을 덮어 품에 넣었다. 소매를 걷어붙여 팔목에 각인된 룬의 흐름을 확인했다. 아티팩트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발락의 심장 박동에 맞춰 더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발락, 조약 위반에 따른 가압류를 시작합니다.”
레온하르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성벽 끝에 선 그의 발바닥 아래로 부서진 돌가루가 밟혔다.
“가압류 대상은 당신의 심장부에 깃든 순수 마나입니다.”
발락의 황금빛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용은 날개를 활짝 펴고 급하게 고도를 높였다. 이미 늦었다는 듯, 레온하르트의 발밑에서 시작된 푸른 마법진이 하늘을 가로질러 용의 몸을 옭아맸다.
“멈춰라! 인간!”
용의 외침은 허망하게 흩어졌다. 푸른 사슬이 용의 목과 날개를 감싸 쥐었다. 성벽 아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전설 속의 괴수가 일개 인간의 손짓에 묶여 허우적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팔을 허공에 휘둘렀다.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발락의 몸이 성벽 쪽으로 끌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용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레온하르트의 표정은 평온하기까지 했다.
성문 안쪽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왕립 법무관들의 붉은 제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두에는 대재상 카엘이 서 있었다. 카엘은 성벽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레온하르트 반 아스텔! 당장 멈추지 못할까!”
카엘의 고함이 성벽 위로 날아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하늘에서 발버둥 치는 발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재상님, 법 집행 중에는 개입할 수 없다는 규정을 잊으셨습니까.”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파동을 타고 카엘의 귀에 명확하게 꽂혔다.
“이것은 반역이다! 드래곤과의 조약을 파괴하려는 속셈이냐!”
카엘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며 소리쳤다. 뒤로 마법 제한법을 관리하는 집행관들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공기 중에 살벌한 마력이 응집되었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천천히 카엘을 돌아보았다. 푸른 빛이 서린 그의 눈동자가 카엘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훑었다.
“조약을 파괴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는 다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법을 도구로 삼아 인간을 노예로 만든 당신들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발락의 비명이 아델가드 전체를 뒤흔들었다. 용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마나 덩어리가 레온하르트의 아티팩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발락의 거대한 몸이 힘없이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델가드 성벽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레온하르트는 쏟아지는 마나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입술을 짓씹었다.
추락하는 용의 그림자가 성벽을 덮쳤다. 카엘과 법무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레온하르트는 그 혼란의 중심에서 홀로 서 있었다. 팔목에 새겨진 룬 문자가 붉게 변하며 살을 태우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면서도 아티팩트를 놓지 않았다. 법전의 마지막 장이 바람에 넘어가며 백지 위로 푸른 글씨를 써 내려갔다.
새로운 계약의 시작이었다.
발락의 몸이 성벽 아래 해자에 처박혔다.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치며 아델가드의 광장을 적셨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해자 쪽을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무거운 숨을 내쉬며 아티팩트를 소매 안으로 감췄다. 타버린 살점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고통을 억누르며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집행 완료되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벽 계단 끝에서 아이린이 검을 뽑아 든 채 나타났다.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온하르트, 당신 미쳤어? 저건 고룡 의회의 중재자라고!”
아이린의 외침에도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카엘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카엘이 떨리는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네, 네놈...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지려고!”
레온하르트는 카엘의 발앞에 멈춰 섰다. 품에서 낡은 법전을 꺼내 그의 가슴에 툭 던졌다.
“제십사 조 사 항을 읽어보시죠. 위반한 용에게는 신체적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카엘의 눈동자가 법전의 글귀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런 조항은... 본 적이 없다. 어디서 이런 걸!”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발락이 추락한 자리에서 푸른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 너머, 천공의 둥지가 있는 산맥 쪽에서 거대한 울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용들이 내뱉는 집단적인 포효였다. 아델가드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발락 혼자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아티팩트가 박힌 팔을 꽉 움켜쥐었다. 룬의 빛은 꺼지지 않은 채 피부 밑에서 심장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진부한 전개로군요.”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해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물줄기 사이로 발락의 눈동자가 다시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그 눈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닌, 깊은 의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몸을 돌려 성벽 아래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뒤에서 카엘이 비명을 지르듯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대지가 다시 한번 크게 들썩였다. 아델가드 중앙에 솟아 있는 ‘시간의 탑’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종소리였다.
레온하르트는 걸음을 멈추고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의 빛이 용들의 포효를 잠재우고 있었다. 아티팩트와 탑의 빛이 공명하며 레온하르트의 시야를 하얗게 가렸다.
빛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의 언령도, 인간의 말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대륙의 주인이었던 존재의 속삭임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소매를 걷어 팔목을 내밀었다. 룬 문자가 공중에 홀로그램처럼 떠오르며 복잡한 수식을 만들어냈다.
“에라스무스, 보고 있나.”
보이지 않는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성벽 한구석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먼지 구름을 헤치고 수다스러운 노학자가 콧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레온! 자네 정말로 저질렀군! 저 공식을 정말로 활성화한 건가!”
에라스무스의 눈에는 경외와 공포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팔목을 붙잡으려다 뜨거운 열기에 손을 뗐다.
“이건 법이 아니야. 이건... 신을 구속하는 계약서라고!”
레온하르트는 에라스무스의 호들갑을 뒤로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구두 소리가 정적에 잠긴 성벽 계단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성벽 아래에는 이미 기사단과 시민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용의 추락과 탑의 공명은 그들에게 세상의 끝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레온하르트는 인파를 헤치고 자신의 사무소로 향했다. 아델가드 외곽의 낡은 건물 위로 ‘아스텔 법률사무소’라는 간판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칼날의 감각이 아니었다. 거대한 의지가 등 뒤를 꿰뚫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인간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용의 것과 같았다.
“인간, 네가 건드린 것은 단순한 계약서가 아니다.”
남자가 손을 뻗자 레온하르트의 사무소 문이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은 우리 종족의 심장을 묶는 족쇄지.”
남자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법전을 다시 꽉 쥐었다. 팔목의 아티팩트가 비명을 지르듯 푸른 빛을 내뿜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꺼낸 겁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압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남자의 손이 레온하르트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왔다. 광속에 가까운 일격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 앞에 법전을 펼쳐 들었다.
검은 불꽃과 푸른 빛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사무소 건물이 통째로 휘청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먼지 구름 속에서 레온하르트의 손에 들린 법전이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쓰인 글자가 아니었다. 공중에 떠오른 법의 조항들이 사슬이 되어 남자의 팔을 감아쥐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인간의 마법이 아니군.”
남자의 눈에 처음으로 경악이 서렸다. 레온하르트는 피가 흐르는 팔을 들어 남자의 눈앞에 룬의 낙인을 들이밀었다.
“이것은 인간의 마법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직접 서명한, 조약의 원본이지요.”
레온하르트의 선언과 함께 아델가드 전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변해 빛나기 시작했다. 용의 형태를 한 남자의 몸이 빛의 사슬에 묶여 바닥으로 처박혔다.
레온하르트는 무너진 사무소 잔해 위에 서서 멀리 보이는 천공의 둥지를 응시했다. 수천 마리의 용이 대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찢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룬을 만지며 조용히 읊조렸다.
“다음 변론을 준비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