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는 있나?”
집무실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서류 뭉치가 날아왔다. 빳빳한 종이 모서리가 왼쪽 뺨을 강하게 때리고 바닥으로 흩어졌다. 피부 위로 화끈거리는 열기가 번졌고 비릿한 금속성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들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대재상 카엘 폰 아델가드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입술 주변에는 하얀 침전물이 맺혀 있었다. 카엘의 눈등 근육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흩어진 서류를 한 장씩 줍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는 ‘용의 혈세’ 납부 현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인간이 피땀 흘려 수확한 생산물의 삼분의 일을 바치는 굴욕의 기록이었다. 잉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락 님은 이 대륙의 수호자이시다. 그런 분의 권능에 감히 법전 따위를 들이대?”
카엘의 고함이 천장의 샹들리에를 가늘게 흔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마지막 서류를 집어 들며 카엘의 구두 끝을 응시했다. 검은 가죽 장화 위로 푸르스름한 가루가 얇게 앉아 있었다. 드래곤의 비늘이 마찰하며 발생하는 에테르 잔해였다. 저 정도 양이면 단순히 알현한 수준이 아니었다. 비릿한 용의 체취가 방 안을 메웠다.
레온하르트는 안경테를 가운데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차가운 금속 촉감이 손가락 끝에 닿자 머릿속의 복잡한 조항들이 정렬되었다. 그는 카엘의 분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평화 조약 제14조 3항에 따르면 드래곤의 위엄은 인간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존중받습니다. 발락 경의 행위는 명백한 과잉 권력 행사였습니다.”
카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암적색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벽에 걸린 드래곤의 초상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기괴하게 꺾이며 허공을 긁는 모습은 마치 발톱을 흉내 내는 짐승 같았다.
“법? 그따위 종이 쪼가리가 용의 브레스를 막아줄 것 같나? 네놈의 얄팍한 법 지식이 아델가드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카엘은 책상 위의 금색 종을 거칠게 흔들었다. 종소리가 복도로 날카롭게 퍼져 나갔다. 그는 레온하르트에게 바짝 다가와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이단 심문소에 넘겨주마. 마법 제한법 위반, 그리고 종족 간 평화 교란죄. 네놈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려도 그 법전 조항이 튀어나오는지 보지.”
레온하르트는 품 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가죽이 낡아 모서리가 헤진 수첩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첩의 중간 페이지를 펼쳐 카엘의 눈앞에 보였다. 카엘의 눈동자가 수첩에 적힌 숫자들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이것은 지난 3년간 중앙 은행 연합을 통해 유통된 마나석의 세부 내역입니다. 수령인은 익명이지만, 송금 주소는 이곳 대재상 관저로 되어 있더군요.”
카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내뱉으려던 욕설이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졌다. 레온하르트는 수첩을 덮지 않고 한 장을 더 넘겼다.
“베르사 중립 항구에서 거래된 순수 정수 500단위. 드래곤들에게 바친 뇌물 치고는 규모가 상당합니다. 이건 공물법 위반일 뿐만 아니라 의회 기만죄에 해당하죠.”
“이, 이건 조약을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외교적 비용이다!”
카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는 당황한 듯 자신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갔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외교 비용은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장부 어디에도 의장인의 직인은 없더군요. 오히려 대재상 직인만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카엘은 입술을 짓씹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거울이 놓여 있었다. 카엘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했다. 위대한 자들이 갈구했다. 나는 그저 따랐을 뿐이다. 그르르, 카르사스의 이름으로.”
카엘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변했다.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긁히는 듯한 소음이 섞여 나왔다. 드래곤의 언령을 흉내 내는 광기 어린 습관이었다. 레온하르트의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눈앞의 사내는 권력자가 아니라, 거대한 힘에 영혼을 저당 잡힌 껍데기에 불과했다.
카엘은 갑자기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다. 증거? 그딴 건 살아남은 자들이나 따지는 법이지. 죽은 자는 고소할 수 없다.”
집무실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검은 제복을 입은 왕립 법무관 네 명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마법 억제용 사슬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카엘은 레온하르트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휘둘렀다.
“당장 이 반역자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저항하면 현장에서 사살해도 좋다!”
법무관들이 레온하르트를 에워쌌다. 차가운 철제 사슬이 그의 어깨 위로 드리워졌다. 레온하르트는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시계를 확인하듯 소매를 걷어 올렸을 뿐이다. 그의 손목 안쪽에서 고대 룬어가 푸른빛을 내며 점멸하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둔탁한 충돌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무거운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와 비명이 집무실 안까지 침투했다.
문이 경첩째 뽑혀 나가며 실내로 날아들었다. 법무관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문짝에 깔려 나뒹굴었다. 뿌연 먼지 구름을 가르고 붉은색 망토가 휘날렸다.
아이린이 거친 숨을 내쉬며 방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이미 검이 뽑혀 있었고, 칼날 위로는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법무관을 밟고 지나가 레온하르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법이고 나발이고, 내 동료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이 성 전체를 도축장으로 만들어주지.”
아이린의 목소리가 집무실 벽을 울렸다. 그녀는 검을 들어 카엘의 목을 겨눴다. 서슬 퍼런 칼끝이 카엘의 목울대 바로 앞에 멈췄다. 카엘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 자유 기사단 따위가 감히 대재상의 목에 칼을 들이대?”
카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이린은 대답 대신 검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금속의 마찰음이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안경을 주워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아주 느긋한 동작으로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아이린, 칼을 거두세요. 법무부 관할 구역에서 무기 휘두르는 건 가중 처벌 대상입니다.”
“저 인간이 널 죽이려 했다고!”
아이린이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레온하르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 미소는 차갑고도 잔인했다.
“아니요, 대재상께서는 지금 저를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으려는 것뿐이죠. 다만 그 절차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을 뿐입니다.”
레온하르트는 품에서 또 다른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카엘이 아까 던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낡고 누런 종이였다.
“이것은 500년 전 작성된 평화 조약의 원본 부록입니다. 여기에는 드래곤과 내통하는 자에 대한 즉결 처분권이 명시되어 있죠. 그리고 그 집행권은 의회가 아닌, 조약의 수호자에게 있습니다.”
카엘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지만, 아이린의 칼날이 그의 손등을 스치며 피를 냈다.
“그 수호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레온하르트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까지 없던 기묘한 압력이 실려 있었다.
“바로 드래곤의 언령을 이해하는 자입니다.”
레온하르트가 손목의 룬을 카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집무실의 모든 유리창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깨져 나갔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아델가드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카엘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레온하르트는 무너진 창문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을 응시했다. 수만 마리의 용이 구름을 찢으며 지상을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자, 이제 재판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카엘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의 귀에 대고 아주 작게, 하지만 명확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그토록 숭배하던 그들이, 지금 당신을 처단하러 오고 있거든요.”
카엘의 눈동자가 힘없이 풀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용들의 포효가 성벽의 돌가루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성 전체가 거대한 짐승의 뱃속처럼 진동했다.
레온하르트는 찢어진 법전의 한 페이지를 찢어 카엘의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아이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변론 준비는 끝났습니다.”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던 포효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델가드의 대공 방어진이 드래곤의 브레스를 굴절시키며 기괴한 빛을 내뿜었다. 하늘은 이제 붉은색이 아니라, 타오르는 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이린은 검을 갈무리하며 레온하르트의 옆에 섰다. 그녀의 손등에 튄 핏방울이 차갑게 식어갔다.
“변론? 그게 무슨 뜻이야?”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품 안의 아티팩트를 매만졌다. 푸른 빛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번져나갔다.
“법으로 죽이지 못한 것을, 법으로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서 날아오는 드래곤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번뜩였다.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옅은 경련이 일었다. 공포가 아니라, 오래도록 억눌러온 환희의 전조였다.
성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용의 거대한 발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레온하르트는 도망치는 대신 정면을 응시했다. 손목의 룬어가 혈관을 타고 뜨겁게 요동쳤다.
“이것으로 500년의 계약은 파기되었습니다.”
레온하르트가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성을 뒤덮고 있던 마법 결계가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용들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재판관의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