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는 짐승의 혀처럼 축축하게 목덜미를 핥았다. 라그나 요새의 외벽을 넘어온 지 불과 수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등 뒤로 보이던 요새의 거대한 성벽은 이미 형체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뒤틀린 나무들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는 무채색의 숲이었다. 안개 낀 고립지. 지도가 거부하고 시간이 박제된 무법지대의 입구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면이 진흙처럼 출렁이며 발목을 붙잡았다. 나무줄기들은 허공에서 서로를 옭아매며 비명을 지르는 형상으로 굳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와 썩은 이끼 향이 뒤섞여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걸음을 멈추고 안경테를 가늘게 밀어 올렸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현실을 붙들게 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부유하는 미세한 에테르 입자들에 고정되었다. 입자가 불규칙하게 진동하며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공간 왜곡의 징후였다. 오른쪽으로 세 걸음 가면 왼쪽으로 다섯 걸음 되돌아오게 되는 기묘한 미로. 이곳의 나무들은 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침입자의 뇌를 공략하는 마법적 환각의 매개체였다.
"멈추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좌표의 개념이 무의미합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낮게 깔렸다. 뒤를 따르던 아이린이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렸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기사단의 정예인 그녀에게도 이 불길한 정적은 견디기 힘든 압박인 모양이었다. 아이린은 콧방귀를 뀌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가죽 장화가 마른 나뭇가지를 짓밟자, 숲 전체가 웅성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법무관 나리, 제정신이야? 뒤에선 카엘의 추격대가 오고 있다고. 여기서 꾸물대다간 안개 귀신이 되기 전에 목이 먼저 날아갈걸."
아이린이 허리춤에서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서늘한 검신이 안개 사이로 푸른빛을 산란시켰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평소의 호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짐승 같은 직감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검 끝으로 앞을 가로막은 비틀린 나무를 가리켰다.
"이딴 나무때기들이 길을 막으면 베어 넘기면 그만이야. 법전 따위가 이 유령들의 목을 칠 수 있을 것 같아? 내 검이 당신의 그 고리타분한 공식보다는 빠를 거다."
아이린이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은빛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나무줄기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강철이 나무에 닿는 타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검날은 마치 물줄기를 베듯 나무의 몸통을 맥없이 통과했다. 벤 자리는 안개처럼 흩어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응집되어 원래의 뒤틀린 형태로 돌아왔다. 오히려 자극받은 나무들이 꿈틀거리며 아이린의 발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품 안에서 낡은 아티팩트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청동 원판에는 해독하기 난해한 고대 룬어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나직하게 법전의 조항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아 대륙 조약 제14조 2항. 공간의 고유 점유권은 물리적 실체에 우선하며, 인위적 왜곡에 의한 통행 방해는 불법으로 간주한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룬어가 혈관을 타고 붉게 타올랐다. 심장 근처가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아티팩트가 푸른 진동을 내뿜었다.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뇌가 바늘로 찔리는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이것은 마나를 소모하는 마법이 아니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의 허점을 파고들어 현실을 재정의하는 작업이었다.
주변의 안개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지형 자체가 재배열되고 있었다. 아이린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거두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돌들이 제멋대로 굴러가며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방금 뭘 한 거야? 주문도 외우지 않았잖아."
아이린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녀의 손등에 맺힌 땀방울이 차갑게 식어갔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손가락 끝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냈다. 과도한 에테르 공명이 신체에 가하는 부담은 상당했다. 속이 메스꺼웠고 시야가 잠시 흐릿해졌다. 하지만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냉담한 어조를 유지했다.
"공식의 오류를 지적했을 뿐입니다. 이곳의 수호 장치는 침입자의 공포를 먹고 자라죠. 당신이 무력으로 해결하려 할수록 안개는 더 짙어질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의 심부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땅이 파도치듯 출렁였고, 안개 속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것은 생명체가 아니었다. 이곳에 발을 들였다가 죽어간 자들의 잔류 사념이 에테르와 결합해 만들어진 환영들이었다. 갑옷을 입은 기사의 형상을 한 환영들이 흐릿한 칼날을 세우며 다가왔다.
아이린이 다시 검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팔 근육이 터질 듯 팽창했다. 이번에는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환영들이 내뱉는 입김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풀들이 검게 타죽었다.
"이번엔 진짜야. 저놈들은 그냥 환상이 아니라고. 내 피부가 따끔거리는 걸 보니 에테르 농도가 치명적이야!"
아이린이 외치며 첫 번째 환영의 가슴을 찔렀다. 검은 허공을 갈랐지만, 환영이 내두른 손톱은 그녀의 어깨 갑옷에 깊은 흠집을 남겼다. 금속이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아이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레온하르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레온하르트는 아티팩트의 중앙 다이얼을 돌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의 눈빛만은 법전의 문구처럼 정교하게 빛났다. 그는 환영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들은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공격의 궤적, 이동 속도, 그리고 안개와 연결된 가느다란 마력의 실.
"아이린, 왼쪽으로 15도 각도. 3미터 뒤로 물러나십시오."
"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제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30초 내에 당신의 왼쪽 폐가 저 환영의 손에 관통당할 겁니다. 조약 제7조, 신체 보존의 원칙을 지키고 싶다면 움직이세요."
레온하르트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이린이 이를 악물며 몸을 날렸다. 그녀가 원래 있던 자리에 거대한 환영의 칼날이 박혔다. 대지가 폭발하듯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아이린은 구르듯이 일어나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 한 방울이 눈가를 적셨다.
레온하르트는 아티팩트를 허공으로 던졌다. 청동판이 공중에서 정지하더니 눈이 시릴 정도의 청백색 빛을 발산했다. 그는 고대 룬어의 마지막 구절을 완성했다.
"존재하지 않는 권리는 행사될 수 없다. 소멸하십시오."
빛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환영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기 속으로 분해되었다. 마치 끓는 물에 눈이 녹듯, 압도적이었던 공포의 실체들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숲을 덮고 있던 짙은 안개도 파동에 밀려나며 시야가 확 트였다. 멀리 숲의 중심부에 위치한 낡은 석탑의 형체가 드러났다.
아이린은 검을 짚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검은 장갑이 땀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괴물 같은 용들을 보았을 때보다 더한 경외감이 그녀의 눈동자에 서렸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단순한 법무관이 이런 힘을 가질 리 없잖아."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아티팩트를 주워 올렸다. 청동판의 표면은 열기로 인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의 코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는 소매로 거칠게 피를 닦아내며 안경을 고쳐 썼다.
"저는 그저 계약의 이행을 감시하는 자일뿐입니다. 자, 일어 서십시오. 안개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두 사람은 석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그 정적은 오히려 폭풍 전야의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레온하르트가 돌연 발을 멈췄다. 석탑 입구, 이끼 낀 돌계단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짙은 갈색 로브를 걸친 노인이었다. 그는 무릎 위에 두꺼운 고서를 올려둔 채, 길게 기른 콧수염을 비비꼬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도 노인의 눈동자는 기묘한 금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노인은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아, 망할 놈의 공식. 왜 여기서 마나 역류가 일어나는 거지? 드래곤 놈들이 공기 중에 독이라도 푼 건가."
노인이 투덜거리며 깃펜을 휘둘렀다. 수다스러운 혼잣말이 정적을 깨뜨렸다. 아이린이 경계하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노인은 그녀에게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시선을 고서에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꼬아 올렸다.
그때, 노인의 시선이 레온하르트의 손에 들린 아티팩트에 머물렀다. 노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레온하르트에게 다가왔다. 아이린이 검을 뽑으려 했지만, 노인의 움직임은 잔상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빨랐다.
"이, 이 문양! 이 끔찍하고 아름다운 비례는 뭐야?"
노인이 괴성을 지르며 레온하르트의 멱살을 낚아챘다. 노인의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들이밀며 아티팩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노인의 눈에 광기 어린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너, 이 물건 어디서 훔쳤어? 아스텔 가문의 문양이 왜 네 놈 손에 있는 거냐고!"
노인의 외침과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푸른 마력을 뿜어내며 레온하르트의 턱밑을 겨눴다. 노인의 시선이 레온하르트의 눈동자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이라도 확인하려는 듯한 집요한 눈빛이었다.
"말해! 그 고집불통 늙은이, 레오나르도 반 아스텔은 어떻게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