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령의 문구는 차갑다. 종이 위에 박힌 잉크는 생명이 없다. 그것을 해석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칼날이 되기도 하고 방패가 되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가 남긴 낡은 법전을 떠올렸다. 그 속에는 공정함 대신 굴욕이 가득했다. 정의 대신 생존을 위한 비굴한 타협이 빼곡했다. 드래곤의 언령에 짓눌린 인간의 역사가 얇은 종이마다 피로 새겨져 있었다. 이제 그 비뚤어진 질서를 바로잡을 시간이었다. 내 손안에 든 아티팩트가 차가운 금속음을 내며 반응했다. 이 작은 금속 덩어리가 아스테리아의 운명을 뒤바꿀 쐐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에라스무스의 지하 실험실은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매캐한 약초 향이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사방의 벽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로 가득했다. 기하학적 도형들이 벽지를 대신해 그려져 있었다. 천장에는 마나 램프가 매달려 파르르 떨리는 빛을 내뿜었다. 희미한 빛이 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석탁 위를 비췄다. 그곳에는 500년 전의 숨결을 간직한 고대 조약의 사본이 있었다. 누런 양피지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장자리가 바스러졌다.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은 기묘한 생명력을 머금고 있었다.
램프의 빛이 조약문을 훑고 지나갔다. 평범한 잉크 자국인 줄 알았던 행간에서 황금색 빛이 일렁였다. 나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글자들 사이에 숨겨진 미세한 룬 문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읽을 수 없는 공식이었다. 드래곤의 언령을 구속하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장치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 문장들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었다. 이것은 거대한 마법적 구속구였다. 용들의 권능을 특정 범위 내로 묶어두는 사슬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수가."
나직한 읊조림이 공허한 실험실에 울려 퍼졌다. 조약의 본질이 이토록 정교한 함정이었을 줄은 몰랐다. 에라스무스는 옆에서 콧수염을 거칠게 꼬았다. 내 어깨 너머로 조약문을 훔쳐보는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깃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몸을 뒤로 주춤거리며 멀어졌다.
"레온하르트, 이건 미친 짓이야."
에라스무스의 목소리가 높게 떨렸다. 그는 내 소매를 잡아끌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축축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학구적 호기심보다 본능적인 공포를 먼저 느낀 모양이었다.
"이걸 몸에 새기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네. 자네 마나 회로가 타버리는 건 시간문제야. 아니, 회로뿐만이 아니지. 영혼 자체가 증발할 수도 있어."
나는 그의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뿌리쳤다. 시선은 여전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룬 문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법조인으로서 나는 알고 있었다. 승소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드래곤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법의 테두리 안에 가두려면 제물이 필요했다.
"내 마나 회로가 타버리는 것보다, 인간의 존엄이 타버리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군."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차갑고 건조했다.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논리적인 결론만을 내뱉었다. 에라스무스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내가 광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법령의 조항이 실체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수반되어야 했다.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던 아이린이 검 손잡이를 두드렸다. 그녀의 주변으로 서늘한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시선은 조약문의 하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인장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불타는 날개를 형상화한 문장이었다. 드래곤 발락의 표식이었다.
"그놈의 이름이 여기 있군."
아이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동자 속에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스승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날의 기억이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다. 검집에서 흘러나오는 오라가 실험실 바닥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이 조약이 그 괴물을 묶어둘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어. 레온하르트, 당장 시작해."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내뱉었다. 투지가 이성적인 판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라스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해독을 시작하게. 법적 구속력을 실체화하는 공식을 내 오른팔에 각인해."
에라스무스는 망설였다.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내 눈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었는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의 마법 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고대 룬어를 분석하기 위한 촉매제를 준비했다.
"나중에 원망하지 말게나. 자네 아버지가 알았다면 나를 죽이려 들었을 테니까."
에라스무스가 중얼거리며 내 팔을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 침이 살갗을 파고들 준비를 마쳤다.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비명을 떠올렸다. 무력하게 무릎 꿇어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복기했다. 모든 감정을 논리의 상자 속에 가두었다. 오직 법전의 문구만을 되새겼다.
조약문의 특정 구절이 내 팔에서 흘러나온 선혈에 반응했다. 붉은 피가 양피지 위로 떨어졌다. 황금색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붉은색과 섞여 기묘한 보랏빛을 내뿜었다. 피가 룬 문자를 타고 흐르며 고대의 계약을 일깨웠다. 잉크가 내 피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악!"
결국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오른팔이 불덩어리에 처박힌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나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에라스무스가 해독한 공식이 피부 위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문신이 아니었다. 세계의 법칙을 강제로 비트는 금기의 낙인이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팔의 혈관이 터질 듯 팽창했다. 룬 문자들이 살을 파고들어 뼈에 각인되는 감각이 생생했다. 땀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고통은 뇌를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법의 집행관은 어떤 순간에도 냉철함을 유지해야 했다.
아이린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강한 손아귀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통을 견디는 나를 지탱했다. 손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내 팔의 고통과 공명했다.
그 순간이었다.
마지막 룬 문자가 완성되는 찰나였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진동이 실험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벽에 걸린 마법 시계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마나 램프가 일제히 깨지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직 내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만이 실험실을 기괴하게 비췄다.
그리고 들려왔다.
아델가드 너머, 수만 리 떨어진 심장부 산맥의 꼭대기였다. 천공의 둥지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포효였다. 그것은 생명체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하늘 자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압도적인 소음이었다.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실험실 천장의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드래곤들이었다. 500년 동안 잠잠했던 조약의 균열을 그들이 감지했다. 권능을 구속하던 사슬이 인간의 손에 의해 비틀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고룡들의 분노가 대기를 타고 전해졌다.
"놈들이 오고 있어."
아이린이 검을 뽑아 들며 낮게 읊조렸다. 검신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내며 떨렸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아델가드의 성벽을 뒤흔들었다.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구름을 뚫고 지상을 향해 급강하했다.
에라스무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콧수염을 쥐어뜯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나는 타 들어가는 팔의 통증을 억누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랏빛 낙인이 새겨진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기묘한 법적 문구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계약 위반에 따른 징벌적 사냥을 허가한다."
떨리는 목소리로 조약의 새로운 조항을 읊조렸다.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들이 아델가드의 상공을 뒤덮으며 햇빛을 차단했다. 제일 선두에 선 것은 붉은 비늘을 번뜩이는 거룡, 발락이었다.
"레온하르트, 놈이 바로 눈앞이야!"
아이린이 외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발락의 거대한 눈동자가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불꽃이 밤하늘보다 더 밝게 빛났다. 놈은 입을 벌려 언령을 내뱉을 준비를 마쳤다.
피가 흐르는 오른팔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보랏빛 룬 문자가 대기 중의 마나를 강제로 빨아들이며 팽창했다. 놈의 눈동자에 서린 오만함이 순간 경악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피고인 발락, 법정 모독죄로 구속을 명한다."
내 팔에서 뿜어져 나온 보랏빛 사슬이 하늘로 솟구쳤다. 발락의 거대한 목을 휘감으며 놈의 언령을 강제로 억눌렀다. 놈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처박히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내 오른팔의 살점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그것은 에라스무스도, 나도 해독하지 못한 금기의 조항이었다.
'집행관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 계약된 모든 용의 심장은 정지한다.'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팔에 새겨진 룬 문자가 내 심장 박동을 동력으로 삼아 더 밝게 빛났다. 아이린이 내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보랏빛 방어막이 그녀를 거칠게 튕겨냈다.
"레온하르트! 멈춰! 네 심장이 버티지 못해!"
아이린의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계약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발락의 거대한 신체가 허공에서 경련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가슴팍에서도 내 팔과 똑같은 보랏빛 낙인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맺은 진정한 조약이다."
나는 피를 토하며 웃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금속 맛이 맴돌았다. 시야가 흐려졌지만, 하늘에서 추락하는 거룡의 모습만은 선명했다. 대재상 카엘이 실험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손에는 국왕의 인장이 찍힌 즉결 처분권이 들려 있었다.
"이 반역자 놈들! 감히 용님들에게 손을 대다니!"
카엘의 고함과 함께 기사들의 검날이 내 목을 겨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내 오른팔의 사슬이 이제는 카엘의 목을 향해 서서히 뻗어 나가고 있었다.
"재상님, 당신도 법정에 설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