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뒤덮었던 보랏빛 균열이 쩍 소리를 내며 닫혔다. 조각난 구름 사이로 황금색 광채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허공에 뜬 새로운 법전이 거대한 날개를 펴듯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아델가드 전체에 파동으로 퍼져 나갔다. 요동치던 대기의 마나가 일순간 정지했다. 폭주하던 에테르의 흐름이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레온하르트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고쳐 쥐었다. 손가락 끝이 감각을 잃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는 허공에 뜬 법전의 마지막 조항에 마침표를 찍었다. 등 뒤를 짓누르던 거대한 존재감이 비로소 옅어졌다. 500년 동안 인간의 목을 조르던 계약의 사슬이 끊어지는 감각이었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이전보다 차갑고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성벽을 향해 돌진하던 용 군단이 일제히 날개를 접었다. 그들은 더는 인간을 찢으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거구들이 지상으로 하나둘 평화롭게 내려앉았다. 육중한 발톱이 성벽 안쪽 정원의 잔디를 짓밟았다. 비늘 사이에 서린 살의는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용들은 그저 거대한 짐승처럼 바닥에 머리를 낮게 숙였다.
레온하르트의 목을 덮었던 검은 비늘이 거칠게 떨렸다. 피부 안쪽으로 돋아났던 딱딱한 갑피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회귀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짐승의 안광이 사라진 눈동자에 인간의 생기가 돌았다. 날카롭게 돋았던 손톱이 서서히 평범한 형태로 돌아왔다.
입술 사이로 비릿한 금속성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거칠게 닦아내며 일어섰다. 찢어진 셔츠 사이로 비치는 가슴에는 룬 문자가 선명했다. 그것은 더는 타오르지 않고 은은한 푸른 빛만을 머금었다. 마법의 구속력이 아닌 정의의 무게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먼지를 털어냈다.
“끝난 건가요.”
아이린이 검을 거두며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한 진동을 머금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안경을 코끝에 걸쳤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선명했다. 뒤틀린 공간이 바로잡히고 질서가 자리를 잡은 결과였다. 그는 공중에 부유하는 법전을 향해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책장은 그의 손길에 맞춰 부드럽게 닫혔다. 묵직한 가죽 표지의 감촉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것은 이제 대륙의 새로운 심장이 되어 박동했다. 레온하르트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어깨의 짐을 덜어냈다. 굴욕의 세월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셈이었다. 하지만 성벽 위의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성벽 아래쪽 복도에서 거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갑옷이 부딪히는 불협화음이 정적을 잔인하게 찢었다. 카엘의 휘하에 있던 왕립 법무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에는 광기 어린 충성심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손에 든 구속용 사슬이 뱀처럼 바닥을 긁으며 다가왔다. 금속음이 돌바닥에 부딪히며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반역자 레온하르트를 즉결 처분하라.”
가장 앞에 선 법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카엘이 남긴 마지막 비상 명령서를 쥐고 있었다. 법무관들의 지팡이 끝에서 검붉은 마력이 응집되었다. 조약의 파기를 범죄로 규정하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아이린이 다시 검자루를 거칠게 쥐려 했으나 레온하르트가 제지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는 법전의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책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광원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빛의 입자들은 허공에서 글자로 변해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죄악의 목록이었다. 법무관들의 머리 위로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 나열되었다. 뇌물 수수와 증거 조작 그리고 무고한 시민의 구속. 글자들이 법무관들의 몸을 사슬처럼 휘감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닌 절대적인 법의 구속력이었다. 그들이 휘두르려던 지팡이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나 회로가 법의 정의 아래 강제로 봉쇄되었다. 법무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그들의 안색은 핏기가 가셔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갔다. 레온하르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법은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
그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렀다. 말 한마디에 법전의 빛이 더욱 강하게 진동했다. 죄를 지은 자들은 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묵했다. 복도를 메우던 살기는 순식간에 참회로 바뀌어 흘렀다. 그는 더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성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에라스무스가 콧수염을 만지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표식을 지닌 하층민들이 환호하며 따랐다. 도시 곳곳에서 푸른 회로의 빛이 축제의 불꽃처럼 번졌다. 인간들은 더는 용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억눌렸던 세월만큼이나 거대한 함성이 아델가드를 뒤흔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법전을 품에 안고 성벽 끝으로 걸었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눈시울이 시큰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바랐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용과 인간이 같은 대지 위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광경. 그것은 공포가 아닌 상호 존중의 법 아래 이루어졌다. 광장 중앙의 분수대에서는 맑은 물줄기가 솟구쳤다. 용 한 마리가 그 곁에서 날개를 접고 쉬고 있었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법전의 표지를 어루만졌다. 곁에 서 있던 아이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된 여정의 끝에서 느껴지는 평온이 전신을 적셨다. 그는 이제 법전의 관리자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싶었다. 법은 이제 종이 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붉은 노을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델가드의 소란도 서서히 잦아들며 저녁의 정취가 감돌았다. 레온하르트는 성벽 위 벤치에 앉아 안경을 닦고 있었다. 렌즈에 묻은 핏자국은 깨끗하게 지워졌으나 마음은 무거웠다. 발아래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평화로웠지만 그의 이성은 경고를 멈추지 않았다.
“변호사님 여기 계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평화로운 침묵을 깨뜨리고 들어왔다. 아이린이 한 손에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든 채 나타났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표정은 심각했다. 레온하르트는 닦던 안경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스쳤다.
아이린은 서류 한 장을 빼내어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거기에는 낯선 가문의 인장과 복잡한 룬 문자가 적혀 있었다. 새로운 법전이 선포된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새로운 법적 분쟁이 발생했다는 보고서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민사 소송이 아닌 아주 기괴한 사건이었다. 서류의 종이 질감이 손끝에 까칠하게 닿았다.
“중부 평원의 지주들이 공동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아이린이 검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일말의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서류의 내용을 훑어내려가던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용들이 점유했던 토지의 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이었다. 게다가 용들 측에서도 인간의 경작지를 침범했다며 반소를 준비 중이었다. 용의 언령이 아닌 법전의 조항을 인용한 반소였다.
“법이 바뀌니 다들 자기 권리부터 챙기겠다고 난리네요.”
아이린이 쓴웃음을 지으며 서류 뭉치를 그의 품에 던졌다. 레온하르트는 묵직한 종이 더미를 받으며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해서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정교하고 복잡한 분쟁의 서막이 오른 셈이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며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단 한 순간도 쉬게 해주질 않는군.”
그는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서류의 첫 문장을 읽었다. 렌즈 너머로 사건의 쟁점들이 날카로운 분석을 요구하며 튀어 올랐다. 그의 손가락 끝이 습관적으로 법전의 조항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은퇴의 꿈은 구름 너머로 멀어지고 현실의 업무가 어깨를 눌렀다. 법무관들의 비명 대신 이제는 탄원서의 비명이 들려왔다.
성벽 아래에서는 상인 조합과 기사단 사이의 고성이 들려왔다. 마나석 채굴권에 대한 법적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실랑이였다. 에라스무스조차 연구비 횡령 의혹으로 감사를 받아야 한다며 소란을 피웠다. 평화는 찾아왔으나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전쟁터로 변모했다.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 자락을 여몄다.
그의 눈동자에는 다시 차가운 이성이 서늘하게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린이 내민 사건 보고서를 품에 단단히 갈무리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흔들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성벽 난간을 짚고 서서 멀리 보이는 드라코니아 고원을 응시했다.
“다음 상담 일정은 언제지?”
그는 아이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짧게 물었다. 아이린은 기다렸다는 듯 수첩을 펼쳐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페이지는 이미 빽빽한 글씨로 가득했다.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치솟았다. 그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법전의 서문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지금 당장 집무실 앞에서 세 팀이 대기 중입니다.”
아이린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성벽 입구의 문이 벌컥 열렸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나타난 것은 아델가드 시청의 전령이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긴급 소환장이 들려 있었다. 전령의 안색은 흙빛이었고 무릎은 힘없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전령이 내미는 소환장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소환장에는 대재상 카엘의 이름이 아닌 드래곤 측 중재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내용은 간결했으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새로운 법전의 해석을 두고 고룡 의회가 직접 해명을 요구한다는 통보였다.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 베르사의 중립 항구를 폐쇄하겠다는 위협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입가가 비틀리며 기묘한 곡선을 그렸다.
그는 소환장을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이린이 서둘러 그의 뒤를 따르며 검을 고쳐 멨다. 성벽을 내려가는 그들의 그림자가 노을빛에 길게 늘어졌다. 광장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었지만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변론으로 가득 찼다. 그는 복도를 지나며 대기 중인 서기들에게 손짓했다.
“에라스무스에게 전해라. 고대 조약 3조 7항의 원문을 당장 가져오라고.”
레온하르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서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집무실 문 앞에 도착해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차가운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돌렸다. 쏟아지는 시선과 서류 뭉치 사이로 그는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첫 번째 의뢰인부터 들어오라고 해.”